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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자리-75화 (75/112)

75화.

“나가자, 이단.”

그의 잔뜩 지친 것 같은 초췌한 얼굴에 그녀가 자신도 모르게 울컥하여 속삭였다. 아셰는 단번에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지금 정상이 아니다.

“굳이 황궁에서 있을 필요 없잖아. 다른 곳으로 가자, 이단.”

“……내가 황제였다면 이 황궁을 모조리 불태웠겠지만, 나는 통령이야.”

그가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게는 이곳이 끔찍할지라도 폴라리아 공화국에게는 황궁이 필요해. 무너트리기에는 너무 많은 비용이 드는 데다가, 무엇보다 역사적 공간으로 상징성이 있어.”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그를 품에 안았다. 지금의 그는 그간 그녀가 보았던 그 어떤 모습보다 약해 보였고, 그만큼 불안정해 보였다. 광기를 고백하던 1년 전보다 훨씬 더 위태로운 분위기에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이제 그는 그녀를 위해 전쟁터를 건너와 바다를 멈추거나, 시골 영지까지 단숨에 올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그녀는 그에게 거대한 연민을 느꼈다.

“참아야 해. 내 이름의 무게는 엔리히고, 내 지위의 무게는 공화국이니.”

그의 왼쪽 손목에는 그녀가 예전에 감아 준 싸구려 흰 천이 여전히 둘둘 말려 있었다. 그가 손목을 내밀었다.

“네가 직접 풀어. 이제 이런 것은 필요 없겠지.”

그녀는 천천히 예전에 그녀가 직접 맨 매듭을 조심스럽게 풀었다. 흰 천이 살랑대며 바닥에 툭, 하고 떨어졌다.

“매일같이 생각했어.”

먹이를 틀어쥔 들짐승처럼 야만스러운 눈을 하고, 그가 그녀의 손목을 꽉 잡은 채 느릿하게 속삭였다.

“널 사랑하고, 기다리고, 어떻게 해서든 너와 결혼하겠다고.”

그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다가, 그녀의 목을 붙잡아 그대로 입을 맞추었다. 입술 전체를 흡입하듯 빨아들이던 그가 각도를 바꾸어 혀를 거칠게 휘감았다. 느릿하면서도 끈질기게 달라붙던 입맞춤이 깊어지며 그가 급하게 그녀를 자기 쪽으로 당겨 와 거칠게 몸을 밀착시켰다. 다급한 몸짓 하나하나가 이상하게 퇴폐적이었다. 그를 감싸고 있는 위태로운 공기가 조금이라도 안정되기를 바라면서 그녀는 천천히 그를 꼭 안았다.

“이러고 있으니까…… 정말로 옛날 생각이 나.”

아셰는 그의 팔을 베고 속삭였다.

“내 궁의 그 좁은 침대 안에서 밤새도록 이렇게 누워 있었잖아.”

이단이 드디어 살짝 웃었다. 처음 봤을 때의 불안하기 그지없던 분위기가 조금 안정된 것 같아 아셰는 내심 안도했다. 지금 이 순간은 정말로 아메탄의 궁에서 함께 안고 있는 것 같은 따뜻함마저 느껴졌다. 짧고 강렬했던 정사 후, 그는 나른한 표정으로 그녀와 함께 침대에 누워 그녀의 몸을 쓰다듬고 있었다.

“침대에 누워 있던 그 때에도 넌 매일같이 새로운 이야기를 듣기 위해 눈을 반짝였지.”

이 방은 아셰의 궁보다도 화려했고, 침대는 둘이 편안하게 누워도 자리가 남을 만큼 넓었다.

“더 화려한 궁을 줄 수도 있었지만, 그런 곳들은 모두 비워 두었어. 하인들을 적게 쓰기 때문에 가장 큰 본관에만 모두 머물고 있지. 그래도 이곳은 가장 넓고 화려한 방이야.”

“그래 보여. 이렇게까지 큰 방은 필요 없었는데.”

“설마 너 혼자 쓸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그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결혼식 이후 하인들을 시켜 내 짐을 모두 옮겨오라고 할 거야. 너와 같이 지낼 거니까.”

“응? 말도 안 돼.”

아셰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어떤 왕도 왕비와 처소를 같이 쓰지 않아. 왕비도 왕에게 알리지 않고 비밀리에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을 거 아냐.”

“난 통령이야. 왕이 아니고. 게다가 네가 왜 비밀리에 사람을 만나?”

그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소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녀는 갑자기 등 뒤에서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나, 나는…… 음, 그러니까 영부인이 되는 거잖아. 당연히 정치에 관여하여…….”

“무슨 소리야. 정치라니, 그딴 건 할 필요 없어. 내가 말하지 않았어? 다니엘이 널 가둬 뒀을 때가 가장 내 마음이 편했다고. 시튼 같은 늙은 노인네가 아름답다며 침을 흘리는 꼴을 보고 있느니 너를 이 방에 가두는 게 낫지.”

“…….”

그녀에게 웃으며 인사하던 시튼이라는 영주가 머릿속에 스쳤다. 그 짧은 순간마저도 못마땅해하는 기색이 역력한 그의 어조에 그녀는 머리가 살짝 아찔해지는 것을 느꼈다. 잠시 약해졌다 착각했지만, 그는 그대로였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1년 전의 이단이 맞다면, 그는 나를 다니엘보다 더 깊숙하게 감금시켰으면 감금시켰지 절대 남들 앞에 세우지 않을 겁니다.’

황궁 속에서 초점을 잃은 그를 보고, 그녀는 그가 자신을 전쟁 이후 바로 데려오지 않은 것을 이해하기로 마음먹었다. 마력이 줄면서 예전의 기개가 사라지고 마음이 많이 약해진 거라고 생각했다. 예전의 그가 아니라 새로운 남자라고 생각하기로 해서 그를 안아 주었다. 어쩌면 그 마력이 끊기면서 그녀에 대한 집착마저 사라진 것일 수도 있다고 추측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녀는 그의 눈빛이 더 섬뜩하게 변한 것을 보고 자신이 착각했음을 알았다.

‘제게 왕녀님의 가치를 보여 주시면…….’

사브르가 빠르게 선수를 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는 이미 이 사태를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예상하고 있었고, 그래서 자신을 직접 데리러 오며 협박에 가까운 대화를 시도했던 것이다.

‘……저의 우정을 드리지요.’

그리고 그녀는 그의 말을 들어야 할 이유가 있었다. 지금으로서는 그녀는 그를 없앨 조금의 기회도 없었다. 물론 이단에게 말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그녀는 ‘나의 공화주의’를 반쯤 읽고 그 생각을 버렸다. 통령은 왕과 달라서 아무나 죽일 수 있는 그런 위치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이단에게 사브르가 그들의 아이를 없앴다고 말한다면 이단은 망설임 없이 그를 죽일 것 같았다. 그 역시 자기 자신을 못 믿겠다고 하지 않았었나.

‘리젠, 나는 남자와의 사랑 같은 건 어렸을 때부터 생각도 안 했어. 아마 왕족이라면 거의 다 그럴 거야. 당연히 정략혼을 해야 하고, 괜히 사랑 같은 것에 빠지면 파란만 일어나.’

아주 옛날, 대학을 막 졸업하고 첫 연회를 앞둔 그녀의 친구에게 아셰는 진심으로 그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사악한 왕비를 사랑하여 수많은 사람의 죽음을 방관한 그녀의 아버지를 비난하며.

‘나는 이 모든 일이, 아바마마가 테스티를 진심으로 사랑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해. 왕족이라면 사랑 같은 건 하지 말아야 해. 그냥 주어진 대로 의무를 다 해야 해.’

사브르가 아이를 없앴다는 명확한 증거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역사적 사명감을 띠고 엔리히 황조의 독재를 끊어 버리고 합리적인 공화정을 세우겠다던 그가 사적인 감정으로 사람을 죽이는 셈이 된다. 그것도 스타람을 대표하고 있는 영주를 없앤다면 첫 번째 통령의 지위는 엉망진창이 된다. 그는 황제가 아니기 때문에 법을 지켜야 하고, 법에는 명확한 증거 없이 사람을 죽이면 안 된다고 되어 있으니까. 켄도 죽이지 않던 그가 혁명 동지를 죽인다면…….

그녀의 인생은 아주 예전에 망가졌다고 생각했지만, 이단 엔리히의 인생은 지나치게 무거웠다. 더 이상 황족이 아니더라도 그에게 얽혀 있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제 핏줄을 모두 죽이고 트라우마에 갇히면서까지 그는 혁명을 이루어 냈다. 엔리히라는 이름의 무게와 공화국이라는 지위의 무게를 책임지겠다며 이 끔찍한 황궁을 온몸으로 견디고 있는 남자였다.

아셰는 그의 인생을 지켜 주고 싶었다. 자신의 아버지처럼 사랑에 미쳐 모든 것을 망쳐 버린 사람으로 기억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그녀는 이제 황궁에 온 지 하루였고 공화정에 대해서도 잘 몰랐다. 이단에게 말하는 거야 언제든지 할 수 있었고, 상황을 더 냉정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심지어 이단은 지금 정신적으로 너무 불안정해 보여서 무언가를 의논하기에는 위험해 보였다.

그녀는 심지어 아이를 캐넌에서 켄과 함께 기를 생각까지 했다. 딱히 지킬 것이 없는 그녀가 나서는 것이 맞았다. 어쨌든 사브르를 죽일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서는 그와 가까워져야 했고, 그러려면 일단은 사브르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 주어야 했다.

“나는 널 돕고 싶어. 나는 아메탄의 왕녀고, 다니엘은 전기 기술을 갖고 있어. 리스에서 이미 서신을 보냈어. 아마 나를 명분으로 해서, 기술은 얻기 힘들겠지만 교역 정도야 시작될 거야. 그럼 조금 더 빠르게 안정이…….”

“……웃기지 마.”

갑자기 이단을 둘러싼 분위기가 바뀌어서 아셰는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조금 진정된 듯했던 그의 눈이 다시 분노를 품은 채 번득이기 시작했다. 그의 나른했던 표정도 순식간에 굳어 버리고, 온몸을 둘러싼 근육에도 긴장했는지 힘이 들어갔다.

“네가 공익이나 공화국에 별다른 관심이 없다는 걸 모를 것 같아?”

그의 목소리가 섬뜩하게 바뀌었다. 그가 거칠게 그녀를 눕히고 그녀의 위에서 두 손을 잡아 단단히 고정시켰다. 그녀는 순간 느껴지는 그의 위압감에 숨을 죽였다.

“아, 아니…… 음…….”

“너, 목적이 있지?”

그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아셰는 그 어느 때보다 그가 낯설다고 생각했다. 그가 1년 전, 캐넌에 와서 자신이 황제를 닮았음을 고백했을 때조차 이토록 두렵지 않았다. 그 때 그녀는 그가 아무리 위태롭게 느껴질지라도 자신이 진정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정말로 그를 멈출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까 황궁에 들어왔을 때부터 느꼈어. 네게 느껴지는 분위기와 눈빛이 꼭 마치 열여섯의 너 같더군. 원하는 것이 있고, 그를 위해 무언가를 꾹꾹 눌러 참고 있는 그 분위기 말이야. 그 불길함을 그저 네가 왔다는 것만으로도 좋아서 억지로 묻어 뒀지만 역시나군.”

“……이단, 일단 이것 좀 놔.”

“네가 진정 사랑으로 내게 왔다면 이러지 않았겠지. 정말로 네가 나만을 위해 이곳에 왔다면 왜 내게 전쟁이 끝나자마자 데리러 오지 않았냐고 화를 내는 게 정상이야. 그런데 너는 그것에 대해 또다시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갑자기 네 오라비 얘기나 하고 있어. 그토록 내게 화를 내달라고, 투정이라도 부려 달라고 간청했는데 말이야.”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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