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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자리-77화 (77/112)

77화.

아셰의 말에 그가 그대로 이성을 잃은 듯 훨씬 더 세게 몸을 움직였다. 너무 깊게 들어와 통증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녀의 다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몰아쳐 오는 감각에 절정에 오른 그녀가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동시에 절정을 느끼며 그대로 그녀의 몸 위로 무너진 그가 한참 동안이나 몸을 떨다가, 달아오른 그녀의 뺨을 한 번 핥고 낮게 말했다.

“……참아야 해.”

숨을 참는 목소리는 눅진했다. 그가 그녀를 꽉 껴안았다. 거친 정사의 후폭풍 때문에 아셰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숨을 할딱였다. 온몸이 얼얼할 정도로 통증이 몰려왔다. 그가 눈을 감고 축 늘어진 그녀의 몸을 그대로 끌어안은 채 속삭였다.

“총은 안 돼. 위험해.”

그녀의 다리가 여전히 절정을 기억하며 떨렸다. 비릿한 정사의 냄새가 둘 사이에 감돌았다.

“간단하지만 불안정하고 너무나 위험한 무기야. 황궁은 안전한 곳이니 총이 필요 없어. 여기서 총을 지니고 다니는 사람은 사브르밖에 없어.”

그녀는 힘겹게 눈을 떴다. 흐린 시야 사이로 이단이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천천히 빠져나가자 다리 사이로 그의 흔적이 왈칵 흘러 내렸다. 그의 낮은 목소리가 방 안에 천천히 울렸다.

“하고 싶은 게 있다면…… 그래, 해.”

그는 그녀를 얽어맨 팔에 체중을 가득 실은 채, 땀에 젖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넘겼다.

“무슨 생각인지 여전히 모르겠지만 어차피 그래 봤자 이 끔찍한 곳의 기한은 5년이니까. 약초학 공부를 해도 좋고, 이 방 가득 찻잎을 채워도 좋아. 네가 우려 주는 차라면 나는 언제든 기쁘게 마실 거야.”

아셰가 기운이 하나도 없는 표정으로 웃었다. 그녀는 맨 처음 달빛 아래에서 누구보다도 약한 표정을 지으며 앉아 있던 그를 생각하며 이단의 검붉은 머리카락을 쓸었다.

“이단.”

아셰는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정신이 없었지만, 먼저 그가 꺼낸 화제라면 지금이라도 묻고 싶었다.

“왜…… 왜 두 달 동안 나를 기다리게 했어?”

그가 다시 그대로 그녀의 몸 위로 무너지는 바람에, 아셰는 그의 표정을 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녀가 그것을 묻지 않아서 그 역시 초조했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었다.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아셰는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은 채 천천히 말을 꺼냈다.

“황궁에 돌아오자 그대로 옛 생각이 나더군.”

그녀는 눈을 깜빡이며 완전히 돌아온 시야로 높은 천장의 화려한 무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곳이 싫고 어지럽다며 지붕에 올라왔던 열여섯 살의 너를 생각하니…… 이곳의 주인이던 황제의 비가 되기 싫다며 친오라비의 목숨을 끊은 스물두 살의 너를 생각하니…… 네가 다시 이곳에 올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어.”

그 말을 들으며, 그녀의 시야에 어지럽게 그 옛날의 카드 하나가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 사랑 카드는…… 안정과 신뢰를 뜻하지는 않아요.’

그들은 분명히 서로를 사랑하는데, 서로의 사랑을 믿을 수가 없었다. 결국 그는 그녀의 사랑을 믿지 않았다. 그녀가 그 두 달 동안 그를 끊임없이 의심했던 것처럼.

“1년 전 캐넌에서의 네 모습은 내게 너무 충격적이었거든. 너는 한 번도 내게 그런 표정으로 화를 내고 웃어 주지 않았어. 게다가, 그 남자는 너를 위해 거짓말까지 했잖아. 네가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넌 그 영주에게 마음 한 켠을 줄 수밖에 없었을걸.”

잊기 힘들 것 같다더니, 정말 그의 생각은 그 시절 캐넌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넌, 널 고발한 애라도 친구로 계속 곁에 두었던 애야. 조건 없는 호의를 받아 본 적이 없어 작은 따뜻함이라도 지나치게 높게 평가하지.”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나는 황제가 아니라 통령이고, 네게 억지로 오라고 명령할 수 없었어. 청혼을 넣어도 네가 거절하면 그만이지. 네 보호자가 없어 협박할 사람조차 없는 이 시점에, 과연 네가 이 끔찍하고 숨 막히는 낯선 곳에 올까? 게다가 나는 네게 황제를 닮은 광증까지 고백했어.”

아셰는 머리가 어지러워져 마른침을 삼켰다. 무심코 흘려버렸던 정보들이 머릿속에 끼워 맞춰지고 있었다. 빠르게 사망자 명단을 발표한 것, 재취를 장려한다는 의미로 영주의 혼인에는 지원금까지 지원한다고 한 것, 혼란한 틈에 남편을 잃은 여인들은 얼른 재혼을 해야 한다는 조급한 분위기를 조성한 것……. 영지의 후계자를 생산해야 하는 켄이 그 분위기의 압박을 견디기 어려울 것까지 예상한 움직임이었다.

이 남자는 자신을 믿지 못했고, 정말로 자신이 다시 돌아갈 곳이 없어질 때까지 기다린 것이다. 선택의 여지없이, 어쩔 수 없이 그의 곁에 머물 수밖에 없도록. 그녀가 이 모든 일을 눈치챈 것을 알았는지 그가 천천히 말했다.

“나조차도 이 황궁을 보자마자 도망치고 싶었는데, 네가 황궁에 오고 난 뒤 다시 캐넌에 가겠다고 할까 봐 두려웠어. 내가 두려운 건 언제나 단 하나, 네가 나를 떠나는 것이니까. 네게 돌아갈 길을 차단하는 건 내게 당연한 일이야.”

“……서신이라도 보낼 수 있었잖아.”

“나는 그 누구도 믿지 못해. 사브르조차도 그 영주가 널 좋아한다는 사실을 내게 숨겼지. 난 황제가 아니고 내게 충성을 맹세하는 자는 없어. 사브르를 곁에 두지만 그는 내가 아닌 공화정에 충성하는 자야. 네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다면 중간에 어떤 공작을 부릴지 몰라. 게다가 대륙엔 아직도 이단 엔리히라면 치를 떠는 제국의 잔재들이 많아. 네 존재를 들켰다가는 널 가만히 두지 않았을 거야. 나는 그런 위험은 절대로 무릅쓰고 싶지 않았어.”

“…….”

“이 두 달은 내게도 어려운 기간이었어. 켄이 영주민들의 그 바람을 무시하고 모든 혼담을 거절할까 봐 나도 불안했어. 아니면 이미 너와 켄이 더 깊은 사이가 되었거나. 나도 모험을 했어. 성공하여 네가 내게 온다면 이제 더 이상 캐넌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니까.”

그녀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던 것은, 그녀에게 복수라는 거대한 동기가 없었다면 그가 예상한 대로 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보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가지 않은 길에 대해서는 당연히 알 수 없는 법이다. 그러나 캐넌에서의 삶은 그녀가 아주 어릴 때부터 원해 왔던 일상이었고, 켄은 그녀를 위해 희생한 바가 있었다.

복수심만 없었더라도, 그녀가 이길지 질지 모르는 전쟁의 끝까지 이단을 기다렸을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물론 그녀는 이단을 사랑했고, 이단만이 느낄 수 있게 하는 수많은 감정이 있었다. 아무리 켄과 가까워도 줄 수 없는 마음이 있었다. 역설적이게도, 그녀가 두 달 동안 초조해하며 보낸 시간들은 그녀가 얼마나 이단을 기다렸으며 그를 사랑했는지 증명하는 기간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사랑이 전부가 아닌 여자였다. 오히려 왕족이 진정으로 사랑을 하면 세상이 시끄러워진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살아남기 위해 사랑보다 중요한 것들이 너무 많다는 걸 그녀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당장 편안하고 안정된 삶에 정착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은 이단뿐만이 아니라 그녀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남들이 뭐라고 하더라도, 영지의 주민들은 그들을 인정했다. 그와 성에 단둘이 남아, 아이를 낳고, 그 아이를 양자로 들여 영지의 후계자로 키우고……. 켄과 영지의 주민들이 모두 바랐던 결과였다. 남들은 손가락질하더라도 캐넌의 친근한 사람들은 모두 인정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오는 길에서부터 정치 싸움에 휘말리는 일도 없었겠지. 끝끝내 사랑하는 남자에게까지 속을 숨겨야 하는 끔찍한 황궁보다 외롭지 않았을 것이다.

“네가 황궁에 오던 그 순간, 나는 내 결정에 확신이 들었지.”

그가 그녀의 몸을 꾹 누르며 말했다.

“네 표정에는 이미 캐넌에서 보이던 그 순진함이 없었거든. 촌뜨기 같았던 네 모습보다 훨씬 화려할지 몰라도 내게 인사하던 네 얼굴에는 이미 진실이 사라져 있던데……. 그 어느 때보다 켄 카세튼을 죽여 버리고 싶더군.”

그녀는 숨을 몰아쉬었다. 황제의 핏줄이 더 이상 의미가 없더라도 그가 지니고 있는 선천적인 집착과 잔인한 내면은 변하지 않았다. 만일 그가 황제였다면, 그가 이룬 것이 반역이었다면 그는 그 자리에서 군대를 끌고 켄 카세튼을 죽인 뒤 그녀를 강제로 끌고 왔을 것이다.

“나는 인권을 중시하는 법을 가진 공화국의 수장이고 그래서…… 고작 할 수 있는 거라곤 켄에게 짝을 붙여 주어 너와 갈라놓는 것밖에 없었지만.”

그의 모든 말이 진실이었기 때문에 아셰는 한숨조차 쉴 수 없었다.

“그래, 너는 나를 사랑할지도 몰라. 나와 몸을 섞고, 내 곁에 있겠지. 하지만 넌 이미 켄 카세튼과 캐넌에 다른 것들을 남기고 왔어.”

그는 상상도 하기 싫다는 듯 낮게 읊조렸다.

“그 모든 건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이고. 네 모든 것을 가지지 못해 내가 얼마나 불안한지 알면…… 너는 지금이라도 도망가고 싶겠지. 하지만 넌 그놈이 혼란스러울까 봐 절대 캐넌으로 돌아가지 않아. 맞지?”

그가 그녀의 몸을 꼭 안은 채 눈을 감았다. 캐시가 그와 함께 한 시간을 말한 건 그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았으나, 시간의 힘을 언급한 것은 목에 걸린 가시처럼 숨을 쉴 때마다 의식이 되었다. 그래, 5년이 지나면 나아질까? 그놈이 함께 했던 시간만큼 함께 하면 그만큼의 내 흔적이 네게 새겨질까? 네 속을 짐작조차 할 수 없다는 이 답답함이 조금이라도 해소가 될까? 5년 전의 그녀와 똑같은 모습이 싫었다. 그녀가 그 작은 궁에서 다니엘에게 했듯이, 힘없는 왕녀가 권력자에게 속살거리듯 자신에게 계속 가면을 쓰고 대할까 봐 두려웠다. 깊은 밤이 그대로 내려앉고 있었다.

“네가 원하는 남자는 나일지 모르지만, 그만큼 바라는 건 그의 행복이야. 정작 나의 행복은 네게 중요하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어.”

그녀는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정곡을 찔렸기 때문이다. 이단의 승리를 바랐지만 그의 행복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대답하지 못하는 그녀의 몸을 그의 다리가 더 꽉 붙들었다.

“시간이 지나면 돼. 시간이 지나고 이 끔찍한 곳을 떠나면 나도 네게 평화와 안정, 소박하고 즐거운 삶을 줄 수 있을 테니까. 5년이야. 임기가 끝나고 나면 네 손을 잡고 공화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에 터를 잡지.”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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