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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자리-78화 (78/112)

78화.

“캐넌에서 멀었으면 좋겠군.”

악력이 센 남자의 품에서 그녀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이 남자의 모든 말에서 이상한 살기를 느꼈기 때문이다. 확실히 이곳에서 그는 불행하다. 아메탄 궁에서 보았을 때의 그는 너무 젊었다. 5년에 가까운 전쟁은 그를 아예 다른 남자로 만들어 버리기에 충분했다. 정적이 흐르고, 한참이나 지난 후에야 그가 한숨을 쉬며 속삭였다.

“아셰.”

“…….”

“그렇더라도,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그의 속삭임에 그녀는 또다시 마음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의 어조가 또다시 다정하고 슬프게 바뀌었다. 이렇게 쓸쓸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가 진심을 전할 때 아셰는 괜스레 서러워졌다. 오히려 그가 냉혹하게 켄의 이야기를 하면서 그녀를 몰아칠 때보다 훨씬 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네가 기다린 것처럼…… 나도 기다릴게. 약속해. 다 기다릴게. 네 모든 것이 올 때까지 보채지 않고 조용히 기다릴 거야.”

“나는 네게 왔어……. 대체 뭘 기다린다는 거야?”

“네 모든 것을. 네 몸 외에, 아직 내게 오지 않은 너의 많은 것들.”

“…….”

“늘 캄캄한 밤에 너를 떠나며 미친 듯이 갈망했어. 제발 같이 아침을 맞이했으면 좋겠다고. 내일 아침에 눈을 뜨면 네가 있겠지. 지옥 같은 황궁이라고 할지라도 내일 새벽은 분명 천국 같을 거야.”

그녀를 안은 채 그대로 잠이 든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녀는 한참 동안이나 잠을 이루지 못했다.

예전처럼 축하 연회가 며칠씩 열리지는 않았지만 결혼식은 황궁의 가장 아름다운 정원에서 성대하게 이루어졌다. 예전 같았으면 황족과 왕족의 결합이기 때문에 세기의 결혼식이 될 법했지만 그들은 더 이상 황족도 왕족도 아니었다. 거대한 연회를 감당할 수 있는 인력이 황궁에 있는 것도 아니어서, 열두 명의 영주와 아메탄에서 온 적은 인원의 하객만 함께 했다. 그러나 다니엘은 상당히 대단한 인물을 데리고 왔는데, 바로 가수 리한 카드민이었다.

리한 카드민은 혁명 도중, 폴라리아의 점령 이후 공화정의 완성을 보지 않고 다시 아메탄 왕국으로 돌아갔다. 이 모든 혁명이 지긋지긋하다는 이유였다. 그가 왕정 국가로 다시 돌아갔다는 것은 꽤나 많은 시사점이 있는 사건이었다. 그는 여전히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다웠고, 낮고 고운 음색으로 그들의 결혼식 축가를 불러 주었다.

예전에 함께 싸웠던 동지들 앞에서, 다른 왕을 섬기며 그 왕의 명령에 따라 축가를 부르는 리한의 모습은 몹시 역설적이어서 다들 엄숙해졌다. 공화정은 그가 쓴 한 권의 책, ‘나의 공화주의’에 사상을 두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정작 그가 세운 체계를 떠났다. 아셰는 아름다운 흰 드레스 속에서, 다니엘이 리한을 데리고 온 것엔 경고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내 여동생을 결국 데려갔지만, 너희와 함께 싸웠던 정신적 지주는 내 밑에 있다. 아메탄이 쉽게 폴라리아에게 무릎을 꿇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아셰와 꼭 닮은 다니엘의 푸른 눈은 서늘하게 이단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셰는 높고 푸른 하늘과 정원에 핀 아름다운 꽃들을 보면서 전혀 아름답지 않은 결혼식이라고 생각했다. 다니엘은 한 나라의 국왕으로서 공화국의 실패를 누구보다도 바라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좋든 싫든 이제 이단과 한배를 탄 사이였다. 리한의 축가를 모욕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몇 명의 영주들과, 표정을 알 수 없는 사브르, 그리고 아프도록 그녀의 팔을 쥐고 있는 이단에게 둘러싸여 그녀는 머리가 다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축하해요. 왕녀님, 오늘 너무 아름다우세요.”

그중, 진심으로 그녀의 행복을 바라며 밝게 웃고 있는 사람은 리젠뿐이었다. 그녀의 유일한 친구인 리젠은 여기까지 먼 걸음을 해 준 것이다. 그녀의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했던 아셰는 순간 울컥 눈물이 나왔다. 리젠은 그런 아셰를 안고 낮게 말했다.

“……비상을 가져오려 했지만 황궁에 들어오며 몸수색을 당했어요. 어쩔 수 없이 하수도에 버릴 수밖에 없었어요.”

부탁한 적도 없었는데, 리젠은 이미 그녀가 무슨 마음을 품고 있는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네 도움은 바라지 않아. 내가 알아서 할 거야.”

아셰가 속삭였다.

“너는, 그날 내게 정보를 알려 준 순간부터 내게 모든 빚을 갚은 거야. 더 이상 마음에 부담을 갖지 마. 게다가 비상이라니, 너답지 않아.”

“항상 생긴 대로만 살 수는 없지요. 게다가 제가 왕녀님을 고발한 과거 때문에, 최선을 다해 도운 것은 맞지만…….”

리젠은 당차고 또박또박하게 말했다.

“……그게 전부는 아니었어요. 예전에 말했지만, 그 정의할 수 없는 미묘하고 복잡한 감정들이 언제나 관계의 본질이지요.”

아셰가 놀란 눈으로 웃었다. 하나 더 리젠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그래, 이단을 본 소감은 어때? 정말로 해방자 같아?”

아셰는 재미있다는 듯이 속삭였고, 리젠은 망설이며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누가 봐도 좀 위험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 그를 한 번 흘낏 바라본 뒤 리젠이 그녀를 다시 한 번 끌어안으며 말했다.

“왕녀님, 행복하세요. 저는 언제나 왕녀님의 행복을 바라요. 행복이 곁에 없는 것 같다면, 부디 왕녀님의 행복을 위해 스스로 노력해 주세요. 제 부탁이에요.”

함께 매일같이 대학에서 붙어 다니며 공부하던 시절이 있었다. 이제 그들은 멀리 떨어져 1년에 한 번도 채 볼 수 없었다. 아셰는 지금, 그녀가 진심으로 그녀만을 생각하며 조언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상하게…… 아직 행복하신 것 같지가 않아서.”

“목표하고 있는 바가 있어서 초조해. 마치 어린 시절 같아. 나는 힘이 없고, 그래서 내가 원하는 미래가 오지 않을까 봐 끊임없이 불안한 기분. 생각해 보면…… 미래가 기대되었던 시절은 내 인생에 단 한순간…….”

아셰는 침울하게 속삭였다. 리젠에게만 말할 수 있는 그녀의 진심이었다.

“캐넌에서 아이를 기다리던 그때뿐이었어.”

정작 속삭이는 아셰는 담담한데 리젠의 눈에 눈물이 고였고, 그녀는 누가 볼세라 재빨리 눈물을 닦아 냈다. 리젠은 이어 무어라 말하고자 했지만, 다니엘이 다가와 아셰에게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아셰.”

아셰는 그녀의 친절한 이복 오빠를 향해 싱긋 미소 지었다. 다니엘은 복잡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결국에는 그녀를 살짝 안으며 말했다.

“……행복해라.”

“고마워.”

아셰는 그 순간 누구보다도 다니엘의 진정성을 느낄 수 있었다. 왕궁을 떠나서야 알았지만, 그녀의 살인이 밝혀지고 5년간의 유예를 주장한 건 정말로 그녀를 위한 최선이었을 것이다. 막 왕위에 오른 젊은 왕은 태자를 죽인 무거운 죄를 지은 이복 여동생을 차마 살려 줄 수 없었을 테니. 친형을 죽인 이복 여동생이었지만 그래도 그는 그녀를 아꼈다.

“네 삶은 길고, 아이는 다시 돌아오지 않아. 혹시나 네가 아이를 잊지 못해 불행하다면, 그 아이도 자신을 잊고 네가 자유롭게 행복하기를 바랄 거야. 부디 다가올 행복을 더 생각해.”

그 옛날, 에곤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에곤도 그녀에게 비슷한 말을 했다. 아무런 의도도 없이, 순수하게 그녀만을 위해서.

아셰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웃었다. 어째서 그녀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똑같은 조언을 하는 걸까. 그녀는 그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 누구도 그 아이를 품지 않았다. 숨도 쉬지 않은 그 아이를 눈으로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어떻게 이해시킬 수 있단 말인가. 아이와의 유대감을 갖고 있는 것은 온 세상에 그녀뿐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에게 해를 끼친 사람들은 절대 잊지 않았다.

분위기의 무거움을 눈치챈 리젠이 재빠르게 끼어들었다.

“……아 맞다. 왕녀님, 어머님이신 샤틴 마마께서 축하의 말씀을 전해 달라고 하셨어요.”

아셰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괜찮으니 다른 말들도 전해 봐.”

“음…… 왕녀님이 없어서 너무 외롭다고…….”

“이제 와서? 이상하네. 예전 에곤 영주님과 결혼할 땐 엄마를 버리고 늙은이에게 다리를 벌린다며 저주만 퍼붓더니.”

천연덕스러운 아셰의 얼굴에 다니엘과 리젠이 참지 못하고 민망하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리젠이 머리를 넘기며 급하게 말했다.

“아, 됐어요. 제가 몇 배로 축복해 드릴게요.”

아셰가 까르르 웃으며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리고 리젠과 다니엘의 손을 이끌고 맛있는 음식들이 가득한 테이블로 향했다. 화려한 연회는 없었어도 직접 활기찬 다과회를 준비했던 것이다.

“거절하셨어야죠.”

아셰는 쿠키를 가지러 직접 빈 접시를 가지고 주방에 가려다가, 익숙한 목소리를 듣고 멈춰 섰다.

“어떻게 그러실 수 있습니까? 딜라나의 표정을 보셨어요? 어떻게, 당신이 외국인 왕의 명령을 듣고 공화국에서 축가를 불러요? 우리는 황제를 무너트리기 위해 함께 싸웠습니다.”

“계약이었어. 기억 안 나? 난 공화국에 그 어떤 미련도 없어. 그 미친 황제가 죽었으면 된 거야.”

사브르와 리한이었다. 그러고 보니 어느 순간부터 다과회에서 그들을 보지 못했다. 그녀는 나무 뒤에서 몸을 숨기고 숨을 죽였다.

“외국인 왕? 네가 섬기는 건 외국인 통령이 아니고? 너도 스타람 사람이야.”

“제가 섬기는 건 공화정부일 뿐이죠. 저를 움직이는 건 공화주의의 신념이고요. 나는 당신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공화주의자지만…….”

리한은 아름다운 푸른 머릿결을 쓸며 말했다. 눈부시게 하얀 팔이 마치 그림책에서 튀어나온 것 같았다.

“나는 이제 남들 앞에 서는 것이 무서워. 내 신념으로 누군가가 움직인다는 것도 두렵지. 지금 스타람 상황은 너도 알 텐데. 조금이라도 아카날 총통의 의견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숙청되고 있어. 차라리 허울뿐인 왕이 있었을 때는 각 영지의 독립성이 인정되어 이 지경은 아니었지.”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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