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반복하지 않으면 됩니다. 이곳은 달라요. 이단은 권력의 근원인 자신의 핏줄마저 끊어 낸 사람입니다. 당신을 보내 주었다고요. 그것만 해도…….”
“그럼 너나 충성해. 나는 권력도, 인기도, 신념도 지긋지긋해. 내게 필요한 건 평온이고 아메탄은 합리적인 곳이야. 다니엘 전하는 이단과는 다른 의미로 훌륭한 지도자고.”
“그래도 왕이죠. 당신은 왕의 명령을 따라 여기까지 왔고요. 지금 그가 한 일이 뭔지나 압니까? 공화국 통령의 결혼식에, 그의 사단장을 끌고 와 축가를 시켰다고요. 공화국에 대한 모욕입니다. 당신도 왕정 국가만 아니었다면 이곳에 오고 싶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 대단한 국왕이 당신을 이용하고 있다고요.”
“여기서는 안 그랬나? 넌 내 연인을 볼모로 두고 날 억지로 전쟁터에 붙잡아 뒀어. 이단은 폴라리아 점령 때까지 나를 부지런히 써먹었고.”
“…….”
“어차피 난 어디서든 이용당했지. 다 똑같아.”
“하지만…….”
“다시 이곳에 오라고? 미쳤어, 내가?”
리한은 웃으며 그에게 낮게 속삭였다.
“열두 명의 영주들? 다들 다음 통령 자리를 두고 벌써부터 신경전이 대단하더군. 내가 상상한 딱 그대로야. 한번 권력을 쥐면 눈이 돌아가지. 이곳이 스타람처럼 되지 않을 보장이 어디 있지?”
사브르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리한이 날카롭게 말을 이었다.
“이단 역시 저 자리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 머리에는 통령이, 가슴에는 황제가 자리한 남자니까. 저 사이에서 자신보다 못한 사람들의 의견을 조율해 가며 본능을 억누르고 있는 게 전쟁보다도 어려울걸.”
“그렇기 때문에 지지하는 겁니다.”
사브르가 참담한 어조로 말했다.
“그는 누구보다도 능력이 뛰어나지만 이곳을 끔찍하게 싫어합니다. 어린 시절부터 쌓아 온 권력에 대한 혐오가 그의 지도자로서의 가장 큰 장점입니다. 아카날처럼 그 자리를 놓고 싶지 않아 할까 봐 전전긍긍하고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혼인 상대로 아메탄의 왕녀는 몹시 뜬금없군. 나는 그가 딜라나와 결혼해서, 딜라나가 다음 통령이 될 줄 알았어.”
“모두가 그를 얻고 싶어 했죠. 그는 권력의 상징이니까. 그런 의미에서 저는 지금의 혼인이 아주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5년 후에 네가 그를 놔줄까? 지금 상황을 보면 그럴 것 같지도 않은데.”
“우리 중 이단만 한 지도자는 없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붙잡아야죠. 연임에 관한 규정을 법에 반드시 넣을 겁니다.”
“뭔가 또 그림을 그리고 있나 본데, 오늘의 혼인도 네 뒷공작인가?”
“일단은 맘에 든다는 것까지만 말씀드리죠. 꽤 영리하더군요.”
“넌 이단을 놓지 못해. 여기 있는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겠지만, 스타람을 겪었던 나와 너만이 아는 끔찍한 딜레마가 있지. 아, 이단 정도는 알려나? 그는 사람을 꿰뚫는 데에는 본능적인 감각이 있으니.”
리한은 피식 웃으며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성냥으로 불을 붙였다. 그의 조각같이 아름다운 얼굴에 퇴폐적인 표정이 더해지자 아무 감정이 없는 아셰마저도 눈을 떼지 못할 정도로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넌 무능력한 지도자의 밑에 있을 수 있는 사람도 아니거니와.”
“…….”
“통령 자리에 네가 앉는 것은 더 끔찍하겠지. 원래부터 사단장 자리조차 싫어하지 않았나. 너는 뛰어난 사상가이자 정치인이지만 네가 통령 자리에 앉은 그 순간부터…….”
“그만하십시오.”
“네게는 지옥이 펼쳐질걸. 공화주의의 원칙에 따라 임기는 5년이지. 그 이후 네가 딜라나 같은 영주한테 자리를 넘길 수 있을까? 네가 그토록 물심양면으로 만들어 온 공화국을? 물론 이단이 있어 이길 수 있었지만 그 물밑 작업은 네가 모두 한 것을 알아. 그걸 역량이 안 되는 사람에게 넘긴다고?”
“그만하세요.”
“못 넘기지. 그럼 너는 또 다른 아카날이 되는 거야. 너도 알고 있겠지, 그 딜레마를. 알고 있으니 그토록 이단에게 매달리는 것 아닌가. 이단은 적어도 제 스스로 권력을 탐하지는 않을 테니까. 네가 이단보다 더 훌륭한 사람을 찾으면 미련 없이 떠날 그 마음이 네게 매력적이겠지? 공화국의 위기는 항상 내부에서 오니까.”
아셰는 숨을 죽이고 사브르의 표정을 살폈다. 그토록 표정을 숨기는 데 능했던 청년의 얼굴에 거대한 절망이 드리워져 있었다.
“삶은 역설의 연속이야.”
리한은 오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담배 연기 속에서 그의 색기 있는 얼굴이 더욱더 숨 막히게 아름다웠다. 모두를 홀려 버릴 것 같은 얼굴로 그가 몸을 나무에서 천천히 떼고 길쭉한 다리를 들어 담배를 밟아 비벼 껐다.
“공화주의의 기반을 마련한 나는 내 발로 왕정 국가에 기어 들어갔고, 누구보다도 순수한 공화주의자인 너는 뼛속까지 독재자인 이단을 택했지. 내가 왜 폴라리아 공화국에 계속해서 남지 않았냐고?”
그는 터벅터벅 걸어 사브르에게 다가갔다. 아셰는 빈 접시를 끌어안고 나무 뒤에 바짝 몸을 붙였다.
“내가 네 딜레마를 똑같이 겪었기 때문이지. 어쩔 수 없게도, 다수가 옳지 않은 경우가 꽤 많거든. 한 치 앞을 보지 못하고 일단 눈앞에 승리가 보이면 정신을 놓아 버려. 이단이 마법을 쓸 때 모두가 기뻐하는 것을 봤지? 멍청하게도, 그러니 이단이 황제를 죽일 때 그 힘을 안타까워하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지. 이단이 욕심을 조금이라도 부렸다면, 폴라리아 공화국은 지금 똑같이 제국이 되었을걸.”
“…….”
“네가 나를 끌어들이려는 이유를 알아. 너는 평생 감시자로 남고 싶어 하지. 갈 길이 먼 공화국에서 가장 필요한 존재는 본디 지도자가 아닌 감시자니까.”
리한은 그대로 사브르를 스쳐 지나가, 단숨에 아셰가 숨어 있던 나무 뒤에서 그녀의 팔을 낚아챘다. 그녀는 숨을 몰아쉬며 빈 쿠키 접시를 꽉 쥐었다. 언제부터 들켰는지도 알 수 없었다. 리한이 뇌쇄적인 미소를 지으며 낮게 말했다.
“제가 아메탄 왕국에 너무 적응했나 보군요. 왕녀가 직접 쿠키 접시를 가지고 이렇게 외진 곳까지 올 줄이야. 시녀를 부를 수 있는 종이 있지 않던가요?”
“……캐넌에서 이런 건 빈 접시를 가장 먼저 본 사람이 직접 했습니다.”
리한이 아셰에게는 여전히 웃는 낯을 보이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사브르, 너는 여전히 형편없는 군인이야. 이 정도 인기척도 못 알아챈다면 목숨을 걱정해야 할 테지. 아, 그래서 여기서 홀로 그렇게 총을 보란 듯이 지니고 있나? 나는 이곳의 사람이 아니니 네가 알아서 해. 나는 전하께 돌아가 보겠어.”
리한은 그녀의 팔을 놓고, 짧게 목례한 뒤 그대로 성큼성큼 걸어 사라졌다. 사브르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제가 졌군요. 이런 곳에 다른 사람이, 그것도 당신이 직접 올 줄은 몰랐으니까.”
아셰는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이단은 5년 후에 황궁을 떠나고 싶어 해요. 연임이라니, 절대 받아들이지 않을 겁니다.”
“그는 지금 당장 황궁을 떠나고 싶어 하죠. 할 수만 있다면, 당신의 손을 끌고 대륙 구석에 박혀 나오지 않을걸요.”
사브르는 어깨를 으쓱하며 피식 웃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죠. 지금 그가 떠나면 공화국이 어느 지경이 될지 알고 있으니까. 체제를 설립하는 5년간 그는 합리적인 기틀을 마련하고 떠날 생각일 겁니다. 그는 그가 무너트린 제국에 대한 책임감이 있습니다. 조금 더 붙잡아 둬도 괜찮지 않을까요? 게다가 이제 당신도 곁에 있고.”
“이단은 여기서 행복할 수 없어요. 알고 있지요? 그는 황궁을 싫어해요.”
“그래서 가장 이곳에 어울리는 사람입니다. 제가 당신에게 투표권을 주려는 이유기도 하고.”
그가 물이 흐르듯 말했다.
“황궁의 안주인이란 건 나름 매력적인 자리입니다. 제가 드릴 그 투표권을 잘 지키시고 입지를 다지시면 더욱 피부로 느끼실 겁니다. 예를 들어, 당신이 아메탄 왕국에 돌아갔을 때 이제 그 누구도 당신을 살인자라 욕하지 못해요.”
아셰는 빈 쿠키 그릇을 더 꽉 쥐었다. 사브르가 그녀에게 원하는 것을 드디어 눈치챈 것이다. 이단조차도 바라지 않는 이단의 연임을 도와 달라는 뜻이었다.
“아메탄이 폴라리아의 밑에 서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그건 모두가 다 알아요. 당신을 모두가 무시했던 그 작은 왕국의 사람들에게 보여 주고 싶지 않습니까? 대륙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자가 된 당신을요.”
“……대가는요?”
“저의 우정과 당신의 권력.”
그가 씩 웃으며 말했다. 이 남자는 대체 자신의 뭘 믿고 같은 편을 제안하는 것일까? 물론 그녀는 그가 내민 손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제가 생각보다 유능합니다. 이단이 절대 하지 않을 것들을 몰래 해낼 수 있지요. 예를 들어…….”
아셰는 고고하게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비밀리에 명령하시면, 캐넌이 가난으로 허덕일 때에 물자라도 몰래 보낼 수도 있고.”
사브르는 눈웃음을 지으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원하신다면 그 누구도 모르게 켄 카세튼에게 편지를 전해 드릴 수도 있습니다.”
“원하지 않아요.”
“시간이 지나면 또 모르지요. 지금보다 더 나이가 들게 되면 옛 인연이 그리워질 수 있으니까요, 또.”
그가 다시 그녀의 손을 잡은 채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 외에도 필요한 것이 있다면, 이단 통령이 당신을 과보호하느라 절대 허락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면 제게 말씀하세요. 뭐든 다 들어 드리겠습니다.”
“…….”
“그가 계속 이곳에 있게 된다면, 당신은 그 옆에서 영원한 권력을 누릴 수 있습니다. 원하는 것은 제가 비밀리에 모두 해 드리지요. 분명, 이 황궁을 떠나 어느 대륙 구석에서 그에게 갇혀 사는 것보다는 나은 삶일 겁니다. 그는 단둘이 있기에 위험한 사람이니.”
그녀가 그의 옅은 갈색 눈을 바라보며 생긋 웃었다. 그녀는 손을 빼지 않은 채로 낮게 말했다.
“황궁에 계속 남을 수 있다는 것도 흥미롭지만, 무엇보다 당신의 우정이 탐나는군요.”
“……원하는 것이 있으십니까?”
“예.”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속삭였다.
“내게 당신의 우정을 줄 때에, 함께 부탁할 것이 있어요.”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