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그게 뭐죠?”
“별거 아니에요. 지금도 당신은 가지고 있답니다.”
한 손으로는 빈 쿠키 접시를 꽉 잡은 채, 그녀가 몸을 앞으로 기울여 사브르의 얼굴을 가까이 마주 보았다.
“이단은 절대 내게 총을 주지 않더군요. 제게 총을 주세요. 누르기만 하면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서요.”
“……총 말씀입니까?”
의외의 말이었는지, 그가 그의 옆구리에 장착된 기다란 나무총을 곁눈질하며 말했다.
“내게 총을 주고, 사용하는 법을 가르쳐 주세요.”
“왜죠?”
“나는 아주 어릴 적부터 보잘것없는 비상을 손에 쥐고 위태한 삶을 살았거든요. 마치 벼랑 끝을 걷는 것 같은 기분으로 불안하게 한 걸음 한 걸음을 걸었지요. 인생은 저를 항상 극한으로 내몰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은데…… 저는 제 몸 하나 지킬 힘이 없답니다.”
“……총은 안전한 무기가 아닙니다. 남의 눈에 띄기에 몰래 지닐 수 없고, 방아쇠를 당기기 위해서는 꽤 긴 시간의 장전이 필요하죠. 소리가 크게 나고, 불발이라도 되면 무척 위험해집니다. 차라리 단검을 지니고 있는 게 나을걸요.”
“제가 단검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실력이 안 된다는 건 제가 제일 잘 알아요. 총을 지니고 다니겠다는 게 아니고, 그저 제 방에 둘 수 있으면 돼요. 이건 심리적인 거예요.”
그녀가 포기하지 않고 말을 이어 가자, 사브르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뭐, 저도 황궁에서 홀로 총을 들고 다니는 입장이니 이해 못 할 건 아닙니다.”
그녀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걸렸다.
“이단에게는 비밀로 해 주세요. 당신과 똑같은 소리를 하면서 절대 허락하지 않더군요.”
“제가 바보인 줄 아십니까.”
그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통령님은, 제가 당신의 손을 잡았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저를 죽일 듯이 노려볼 겁니다. 그나마 그가 황제가 아니고 법을 지켜야 하는 통령이라는 걸 다행으로 생각해야죠.”
사브르가 무릎을 펴고 일어나 그녀의 손을 놓았다.
“그가 황제였다면, 몇 년 전 이 궁에서 이유 없이 죽어 나갔던 많은 사람들의 시체 속에 이미 제 주검이 포함되어 있었을 테니까요. 당신과 제가 그의 시야에서 벗어난 지 오래됐습니다. 본능대로 움직인다면 그는 충분히 아무런 증거 없이도 그럴 사람입니다. 황궁에 와서 조금 더 제정신이 아니기도 하고요.”
역시 그녀가 보았던 그의 불안정한 정신 상태는 남들의 눈에도 보일 지경이었나 싶었다.
“아, 다니엘 국왕이 확실히 여동생을 아끼긴 했나 봅니다. 교역이 빠르게 성사되었어요. 투표권과 회의 참석권은 제가 처리했습니다. 통령님께 직접 말하세요. 다음 회의부터 참석하겠다고.”
사브르의 예상은 맞았다. 이단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그녀를 끌어안은 채 물었다.
“……아까 어디 있었어?”
“말했잖아. 쿠키를 가지러 주방에 간 것뿐이야. 리젠이 쿠키를 좋아하더라고. 당연히 더 주고 싶지 않겠어? 그것도 내가 직접 준비한 결혼식 다과회인데. 하지만 황궁이 익숙하지 않아서 길을 헤맸다고.”
“왜 일하는 사람을 부르지 않았지? 너는 결혼식의 주인공이야.”
“캐넌에서는, 그냥 더 먹고 싶은 사람이 가는 거야.”
“넌 이제 캐넌의 사람이 아니야.”
캐넌이라는 말이 나오자 그나마 화내지 않으려고 애썼던 그의 목소리에 날이 섰다. 그녀를 끌어안은 팔에 힘이 잔뜩 들어간 것을 느낀 그녀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제발, 이단.”
그녀는 그의 가슴을 밀어내며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나는 너와 오늘 혼인했어. 내 발로 이곳에 왔다고. 나는 이제 캐넌에도, 아메니티에도 가지 않아. 폴라리아 공화국의 수도, 엔리히의 황궁이 이제 나의 집이야. 집에서도 감시할 셈이야? 네가 그동안 늘 불안해했다는 건 알지만, 결국 나는 네 곁에 있잖아.”
그가 피식 웃으며 그녀의 턱을 들었다.
“내가 그날, 캐넌에 직접 가지 않았다면 네 말을 모두 믿었을지도 모르지. 다른 누구도 아니고 우리의 결혼식이야. 내게는 그 무엇보다 간절했던 네가 공식적으로 오는 날이었다고. 하지만 넌 모든 것에 감흥이 없는 표정이었잖아.”
“이단, 놓고 얘기해. 내가 순진한 신부였기를 바란다면…… 미안하지만 난 결혼식이 두 번째야.”
그녀는 태연하게 말했지만 또 다른 결혼식을 언급하자마자 그의 눈에 또다시 분노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딱히 설렐 이유가 없잖아.”
“……난 설렜어.”
그는 그녀의 눈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그녀를 놓아주고 창가에 섰다. 밤하늘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었다. 황제가 그토록 오랫동안 군림할 수 있었던 것은 마력의 힘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사람의 마음을 꿰뚫었고, 그토록 많은 사람이 이 궁에서 죽어 나갔던 건 황제가 그를 혐오하는 사람들의 표정을 빠르게 읽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단은 자신이 황제를 가장 많이 닮은 자식이라는 사실을 의식하고 있었다. 황태자마저도 그를 두려워했고, 황제와 단둘이 독대한 날 그는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는 표정이었다. 그래서 그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그녀의 발걸음이 황궁으로 향했던 건 분명 사랑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아버지와 다르게 살기 위해 매시간 치열하게 참았다. 혁명 동지들은 권력을 잡고 나자 더 많은 것들을 원했다. 쓸데없는 회의로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영주들의 탐욕을 마주할 땐 모두 다 죽여 버리고 그의 마음대로 하고 싶었지만 그 모든 충동들을 인내했다. 아셰를 이 방에 가두고, 예쁘고 작은 입에서 모든 진실이 나올 때까지 그녀를 놓아주지 않은 채로 대체 무엇을 숨기고 있냐고 윽박지르고 싶었지만 참았다.
“이단…… 음, 혹시 마음이 상했다면 미안해. 진심이야.”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눈치가 빠른 아셰는 그에게 서운하다고 말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그녀는 그의 머릿속에서 얼마나 끔찍한 갈등이 매일같이 오고 가는지 짐작도 못할 것이다. 그에게는 전쟁터가 차라리 나았다.
그녀가 오고 나서도 불안함과 초조함이 그를 미치게 할 때마다 그가 생각하는 것은 1년 전 켄 카세튼을 바라보던 아셰의 표정이었다. 꾸밈이나 숨김은 하나도 없는 천진난만한 웃음, 가벼운 주먹질까지 동반하던 솔직한 투정,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뚝뚝 흘러 볼을 적시던 눈물.
그녀를 윽박지르고 가둬서 어떻게든 모든 진실을 털어놓게 한다면 아셰는 절대 그에게 그런 모습을 보여 주지 않을 것이다. 사랑? 사랑과 별개의 문제였다. 그가 그녀의 사랑만을 원했다면 이렇게 먼 길을 돌아오지도 않았다. 캐넌으로 향하는 그녀의 생각 한 자락조차 싫었다.
정상적인 감정이 아니라는 건 인지하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인 황제는 본디 자신의 여자가 자신의 뜻을 조금이라도 거스르는 것을 싫어했다. 무심결에 말대꾸를 했다거나 다른 남자에게 너무 활짝 웃어 주었다며 죽은 비도 있었다.
어떻게 할 수 없는 과거의 기억조차도 도려내 버리고 싶은 이 끔찍한 소유욕은 엔리히의 핏줄이 그에게 남긴 저주였다. 황궁에 온 뒤 그 미친 피는 제 주인을 잡아먹을 시기가 드디어 되었다는 듯이 시도 때도 없이 머릿속을 헤집으며 들끓었다.
“뭐라고…… 말 좀 해. 왜 아무 말이 없어?”
그가 침묵을 지키자 아셰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가 낮게 말했다.
“……네게 실수할까 봐.”
그녀가 다가와 그를 뒤에서 조심스럽게 안았다. 그는 그를 안은 그녀의 손이 떨리는 것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그녀가 언젠가 그를 완전히 믿고 켄을 바라보던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볼 때가 오겠지. 나를 의지하고 모든 것을 맡기겠다는 그런 얼굴로 내 품에 안기는 그날이 오겠지. 이제 시간은 나의 편이니까. 캐시가 말했던 그 끔찍한 시간의 흔적을 내가 네게 직접 남길 수 있게 되었으니까.
아셰는 그녀가 쿠키 접시를 가지러 가는 간단한 몸짓에조차, ‘캐넌’의 이름을 달았다는 것이 그에게 얼마나 큰 분노를 일으키고 있는지 짐작도 못했다. 이단이 오랜 시간 동안, 켄 카세튼이라는 연적을 얼마나 생각했는지도.
“기다릴 거야. 약속했으니까.”
그가 낮게 말했다. 슬프게도 그건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그녀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연적과 싸우는 일.
“네가 원하는 대로, 묻지 않을게.”
“…….”
“너는 날 사랑하고, 날 기다렸고, 나와 결혼해 주었으니까.”
미친 듯이 흔들리는 자신의 마음을 스스로 다잡듯 그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아셰는 자신도 모르게 연민을 느꼈다.
“약속해. 사랑한다고, 계속 곁에 있겠다고, 네겐 나뿐이라고.”
“약속할게.”
“……그래.”
그는 낮게 말했다.
“그거면 돼. 난 무조건 약속은 지켜. 그러니 너도 꼭 지켜.”
아셰는 그의 등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그는 한 번도 그녀에게 하려던 말을 망설인 적이 없었다. 어린 날, 아메탄 왕궁에서 아셰가 세상에 대해 물었을 때도 그는 배신하기로 마음먹은 왕국의 왕녀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 주었다. 한밤중 바다에서 만나 혁명의 진행 과정을 물었을 때에도 그녀에게 진실이든 아니든 이런저런 전략을 설명해 주던 남자였다.
광기를 고백해야겠다 마음먹고 나서 망설이지 않고 자신의 약점을 말했던 그날 밤조차 그는 솔직하게 얘기해 주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녀에게 실수할까 봐 말을 하지 못하겠다고 하니 그녀는 왠지 서러워졌다. 황궁에 돌아오고 얼마나 다른 사람이 된 걸까. 이단은 점점 더 광인에 가까워지는 자신을 자각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녀는 다시 한 번, 아이를 죽인 사람이 사브르임을 말하는 것을 포기했다. 이 사실을 알았을 때 그가 어떤 비극을 불러일으킬지 몰라 불안했다. 아이 그 자체보다 자신을 향한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라 한들 그 역시 1년 전, 아이를 잃은 것에 대해 눈물까지 흘리며 슬퍼했었다. 그가 냉철하게 뒷생각까지 하면서 사브르를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의 불안정한 정서를 생각하면 당장 뛰어나가 그의 목을 조를지도 모른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