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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자리-81화 (81/112)

81화.

아까 사브르와의 대화에서 그녀가 확신한 것이 있다면 사브르와 이단의 관계는 카이든과 다니엘의 관계와 완전히 다르다는 점이었다. 사브르는 이단에게 충성하지 않았고, 아셰를 데리러 가는 길에서마저 자신의 이익을 따라 움직였다. 게다가 그는 여기서 유일하게 총을 지니고 다니는 남자였다. 오히려 이성을 잃은 이단이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어차피 이단에게 온전히 의지하는 방식의 복수를 꿈꿨다면 그 긴 시간을 기다리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엔 그녀의 손으로 해야 할 일이었다.

“이단.”

그녀가 속삭였다. 트라우마가 가득한 황궁에서 그는 오히려 예전보다 훨씬 더 위태로워 보였다. 나중에 그가 정신적으로 좀 안정되면 모를까 지금은 그에게 더 복잡한 상황을 만들어 주고 싶지 않았다. 그가 자기 자신을 못 믿겠다고 했던 말을 그녀는 잊지 않았다.

“나도 회의에 참석하고 싶어.”

그녀의 말에 그가 한숨을 쉬었다. 아셰는 그 한숨을 뒤로하며 재빨리 말을 이었다.

“이 예쁜 방에 갇혀서 너만 기다리려고 이곳에 온 건 아니야. 나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아메탄의 왕가 회의에 참석했어. 아메탄은 왕정 국가지만 대다수의 일을 회의로 결정해.”

“……안 그래도 사브르가 뒷공작을 잘 해 놨더군. 네 오라비는 교역을 마치 선물을 주는 것처럼 승낙했고. 그 대가가 투표권과 회의 참석 권리? 도대체 넌…….”

“이 중 회의의 경험이 가장 많은 건 나일걸. 아메탄의 왕권은 생각보다 약하고, 책임 소재를 묻기 위해 회의가 항상 진행되니까. 너를 궁에 들인 것도 결정적인 나의 한 표 덕분이었음을 잊지 마.”

창틀을 붙잡은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녀가 그의 예복 단추를 풀며 속삭였다.

“나, 잘 할 수 있어. 네게 도움이 되고 싶어.”

“……못된 버릇까지 들었네. 의도가 있는 유혹이라니. 네가, 내게.”

그가 뒤를 돌아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찌를 것 같은 시선이 달라붙자 그녀의 손이 순간 멈췄다.

“누가 그런 걸 시켰지?”

그의 눈에 조소가 스쳤다. 일전에 캐시가 정략혼이니 뭐니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때는 흘려들었는데, 캐시에게 그런 말을 할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그리고 사브르가 그들의 결혼을 정략혼으로 만들어 어떻게든 이용하고자 했다는 사실도 쉽게 유추가 가능했다. 그러나 아셰가 그 말을 들어주었다는 것이 의외였다. 그리고 그 의외성을 발견할 때마다 이단은 이상한 좌절감을 느꼈다.

“뻔하지. 사브르군. 어쩐지 널 데리러 가는데 내가 직접 가지 못하게 막았지. 무력을 행사할 수도 없으니 어쩔 수 없이 허락했지만…… 그 길에서 네게 이상한 말을 속삭인 모양이지? 어쩐지 그날, 생각보다 늦는다 했어.”

“사브르는…… 네게 충성할 뿐이야. 알잖아.”

“몇 번을 말하지? 사브르는 공화정에 충성해. 내가 이 황궁을 지긋지긋해하는 걸 정확히 알고 나를 붙잡으려고 기를 쓰는 거야. 가능하다면 나를 10년이고 20년이고 붙들어 놓을걸. 다른 영주들은 그의 눈에 차지 않아. 특히나 이렇게 둘로 갈라져 있으면 서로를 음해하다가 최악의 결과로 가기 마련이지. 하지만 난 최대한 어느 멍청한 놈이 이 자리에 앉아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체제를 세울 테고, 무조건 5년이 지나면 떠날 거야.”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사브르가 별다른 의심 없이 그녀에게 자신의 의도를 밝힌 것은 이단이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캐넌에 비해 이곳은 너무나 많은 욕망이 뒤섞여 복잡하기 그지없었고, 너무나 많은 변수 속에 각각의 입장이 달랐다. 그가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나는 임기 이상 이곳에 있을 생각이 없어. 폴라리아 공화국에 대한 내 책임감은 거기까지야. 그 다음은 너를 데리고 여길 떠날 거야.”

“……나, 나도 원하는 바야. 그 체제를 세우는 데에 최선을 다해 널 도와줄게.”

“네가…… 원하는 걸 도저히 모르겠군.”

그녀가 자신도 모르게 말을 더듬자, 그는 전혀 그녀를 믿지 않는다는 듯이 못을 박았다. 아셰는 그가 그런 마음을 품을 수밖에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이상하게 서운했다. 예전의 그라면 그녀에게 이렇게 무서운 얼굴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대체 그녀가 곁에 있는데 뭐가 저렇게 못마땅한 걸까.

“5년 전만 해도 넌 이 모든 것에 관심이 없었어. 관심이 생겼다면 그 또한 캐넌의 흔적이겠지.”

그녀는 반박하는 대신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그의 정신은 예전보다 훨씬 더 흐려져 있었다. 그녀가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아 하는 것을 눈치챈 그가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네가 내 뒤에서 정치질을 하고 싶어 하더라도, 방을 따로 쓰는 건 안 돼.”

“……왜?”

그가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 씁쓸함이 잠시 내려앉았다. 대체 이 남자를 둘러싼 광기의 정체가 뭘까. 사람을 그 어느 때보다 무섭게 몰아붙이다가도, 어느새 감싸주고 싶을 만큼 약한 모습을 보여준다.

“나는 이곳에 다시 오고 난 후 한 번도 깊게 잠들어 본 적이 없었어.”

못된 버릇이 들었다며 그녀의 손을 멈출 땐 언제고, 그녀와 가까이 있자 욕망이 동한다는 듯이 그가 창틀에 기대어 앉아 그녀의 드레스를 천천히 끌어 내렸다. 그의 손이 그녀의 등을 쓸어내리자 어딘지 야릇한 느낌이 들어 아셰는 마른침을 삼켰다.

“네 곁에서는 그나마 잠이 들 수 있었어. 불면에 시달리던 사람에게 그 사실이 얼마나 중요한지 너는 알겠지.”

“……알아.”

그녀가 그의 목에 팔을 감고 낮게 말했다.

“나는…… 내 친구와 형제가 있는 아메탄에 가고 싶지 않아. 오직 그 이유 하나 때문에.”

전쟁터에서보다 더 끔찍한 나날을 그는 보내고 있었다. 아셰는 그를 꼭 끌어안았다. 그 어떤 이단 엔리히라도 괜찮다고 아주 예전에 약속했다. 그녀는 그 약속을 지키고 싶었기에, 조금 불안정한 그라고 해도 곁에 있어 주겠다고 다짐했다.

“그곳에서는 잠이 오지 않거든.”

그가 그대로 그녀를 번쩍 들어 침대로 향했다. 그녀가 속삭였다.

“네 어두움을 이해해.”

그는 아무리 그녀에게 섬뜩한 표정을 지어 보여도 그녀를 원했다. 그 어떤 대화를 해도 결국엔 감정적으로 자신의 앞에서 무너지는 그를 느끼며 아셰는 막연한 슬픔을 느꼈다.

“말해. 우리가 약속한 것들.”

그가 단단한 몸으로 그녀를 누르며 속삭였다. 이제는 익숙해진 흔적을 새기는 통증이 목덜미에 느껴지는 것을 참으며 그녀가 말했다.

“사랑해.”

그녀는 속으로, 자신이 미쳤다고 생각했다. 이 남자와 함께 있으면 이상한 광기에 휩싸여 버린다. 바로 곁에 있는데도, 결혼까지 했는데도 여전히 관계는 비틀거린다.

“또.”

그가 그녀의 가슴에 붉은 흔적을 연달아 만들며 말했다.

“항상 네 곁에 있을게.”

“또.”

“내게는…….”

아마도 이 남자가 뿜어내는 기운이 위태롭기 때문이겠지. 그녀는 그의 곁에 있을 때마다 그 미친 감정의 파도에 동요되어 자신조차 비정상이 되는 것 같았다.

“……너뿐이야.”

9. 영부인

“지금까지 저희의 체계를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사브르는 아셰를 차마 바라보지 못하고, 테이블에 앉아 지도를 펼친 뒤 커다란 종이에 필요한 단어들을 적어 가며 설명을 시작했다. 아셰와 사브르는 테이블에 마주 앉아 있었고, 이단은 침대에 나른하게 몸을 기댄 채로 ‘제국의 역사’ 책을 읽고 있었다. 사브르는 아셰의 온몸에 흩어진 붉은 자국들을 보며 어디에 눈을 둬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시선을 떨궜다.

“폴라리아 공화국의 확정된 국경은 이 정도입니다. 이렇게 깔끔하게 국경을 정할 수 있었던 데에는…… 음…… 조금의 군대가 필요하긴 했습니다.”

“그럴 테죠.”

아셰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사브르가 변명하듯 말했다.

“그래도 제국에 비하면 꽤나 그 크기가 줄었습니다. 물론 대륙에서 가장 넓고 인구가 여전히 가장 많긴 합니다만, 공화주의가 싫은 영지들은 각각 왕국이나 공국을 세우도록 허가했습니다. 굳이 사상을 강요하지는 않았죠.”

“하지만 대다수의 곡창 지대와 주요 금광, 철의 생산지와 평원은 모두 포함하고 있군요. 새로운 왕국들은 산맥 위에 지어졌나요?”

“비꼬지 마.”

침대에서 이단이 그들에게 시선을 주지 않은 채로 말했다.

“힘이 없으면 평화도 없어.”

간단하게 상황을 정리한 이단은 조용히 책장을 넘겼고, 사브르가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저희는 열두 개의 행정 지역을 나누어 혁명의 지도자였던 열둘에게 배분했습니다. 많은 귀족들이 죽었고, 그래서 신분제도 철폐했습니다. 물론 영지 이주의 자유를 국민들에게 주었지만 대다수가 자신의 터전에서 움직이지 않았어요. 사실…… 누가 지도하든 별로 상관없어 보이더군요. 난폭한 황제가 사라졌다고 하니 모든 걸 만족한 느낌이었어요.”

“그렇겠죠. 리스에서는 이런 소문이 돌았어요. 이단이 자신의 아버지와 형의 목을 그어 죽인 뒤 눈물로 이렇게 말했다고요…….”

그녀가 씩 웃으며 말했다.

“아버지, 이제 제가 황제입니다.”

그 말에 사브르와 이단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이단이 드디어 책에서부터 시선을 돌려 아셰를 보고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진짜야? 그걸 믿는 건 아니겠지?”

아셰는 팔짱을 끼고 대답했다.

“그만큼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일반인들은 황제와 통령의 차이도 몰라. 리스 공국 평민의 문맹률은 40%가 넘고, 그건 아마 제국도 만만치 않을 텐데. 그냥 위에서 누가 싸움박질 중인 거지. 대다수는 오늘 저녁 식사 메뉴만큼도 관심이 없을걸. 그렇지만 궁금하긴 했어.”

그녀가 눈을 반짝이며 이단을 바라보았다.

“정말로 그게 마지막 순간이었어?”

이단이 어쩌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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