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네 기대를 무너트려서 미안하다만, 아니 어쩌면 대륙의 기대겠지. 아비를 죽이고 스스로 나라를 건국한 남자에 대한 이야기가 얼마나 자극적이기를 원할까. 하지만 그렇게 극적이지는 않았어.”
사브르는 이단의 말을 들으며 싱긋 웃고 뒤통수를 긁었다.
“알다시피 최근 2년간 마력은 너무나 급격히 사라져서, 아무리 황족이어도 거대한 마법을 쓰기 어려워졌어. 나는 5년 전만 하더라도 간단한 손짓으로 시카 성의 벽을 무너트릴 수 있었지만, 그때에는 황궁의 벽에 금 하나 가게 하기도 힘들더군. 하지만 그건 황제도 마찬가지여서 침입자를 감지하지 못할 정도로 감각이 둔해졌지…….”
이단은 민망하다는 듯이 다시 책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가 머쓱해하며 말해 준 진실은 확실히 소문과 달랐다. 눈속임으로 커다란 전투를 폴라리아에서 벌인 후, 이단은 황궁으로 숨어 들어가 가장 높은 나무에 기어 올라간 뒤 5일간을 그대로 버텼다고 했다. 황궁은 고대의 보안 마법이 거대하게 걸려 있어 몰래 들어가기 힘들지만, 이단은 황족이라 침입이 어렵지 않았고 황제의 마법 자체도 많이 약해졌기 때문이었다.
그는 제아무리 황제라도 항상 침전에만 숨어 있을 수는 없다고 판단했고, 잠복한 지 5일째에 1황자의 부축을 받아 마약에 취해 연못으로 비틀거리며 가는 황제를 발견하고 그대로 방아쇠를 당겼다고 했다.
“별로 알리고 싶은 끝은 아니야. 총이 있으니 가능한 일이었어. 목을 긋긴 뭘 그어? 황궁에 들어갈 수만 있다면 네 가녀린 손으로도 할 수 있는 일이었는데.”
“안 울었어? 아버지, 제가 황제입니다, 이런 말도 안 하고?”
“그런 말을 할 새도 없이 미친 듯이 뛰어 탈출했지. 그게 다야. 이 전쟁을 끝낸 건 나의 탁월함이 아니라…….”
그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냥 자연재해와 같이 닥친 마력의 저하와, 스타람의 총기 기술이야. 아, 내가 황족이어서 황궁의 고대 마법을 뚫고 잠입에 성공한 것? 결국 나는 혈통의 힘으로 전쟁을 끝냈고 그 공을 인정받아 통령 자리에 올랐지. 별로 소문나면 좋을 법한 마무리는 아니군. 역사가 어떻게 기억할지는 나조차도 궁금하고.”
아셰는 살짝 한숨을 쉬었다. 그러면 그렇지, 캐넌에서 들었던 그 수많은 말은 진실과 멀리 떨어져 있는 그저 자극적인 가십들이었다. 심지어 마지막까지 통령 자리를 두고 싸웠다던 리한 카드민은 그 자리에 있지도 않았다. 훨씬 더 전에 아메탄 왕국으로 돌아가 버린 것이다. 그녀가 리한 카드민에 대한 소문까지 말하자 이단이 무심하게 대답했다.
“리한 카드민이 유명인이어서 그런 소문이 돈 거야. 내가 유명했던 것도 황제의 아들이기 때문이고. 그리고 대중은 그 유명함을 사랑하지. 그 명성이 없었다면 내가 만장일치로 1대 통령에 당선되었을지 의문이군.”
“당선되셨을 겁니다.”
사브르가 끼어들었다.
“다만 그때처럼 그 누구도 야심을 드러내지 못할 압도적인 분위기는 아니었겠죠.”
그가 지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어쨌든, 그렇게 열두 개의 영지를 나누어 가졌습니다. 공화국의 기반인 법률도 다시 손을 보고요. 저를 포함한 열둘의 영주는 투표권을 가지고, 다음 통령을 우리들 사이에서 선출할 권리를 가지죠. 스타람처럼 전원 투표를 시행하기엔 인구가 너무 많습니다. 물론 지금 스타람의 그 전원 투표도 최초 1회 이후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지만…….”
“그럼 열둘의 영주는 여기 머무르나요?”
“네. 그리고 법률에 근거하여 지금은 신생 국가의 기틀을 만들고 있습니다. 영지는 영주가 자유 투표에 의해 선출한 대표에게 맡기고 옵니다. 영주는 그 영지의 최고 권력자이지만 직접 통치는 투표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대표는 영지 주민의 의견을 모아 영주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합니다.”
“음, 아메탄에서는 다른 방식으로 평민들의 길을 열어 줘요. 보다 더 전문적이고…….”
아셰는 당당하게 말했다. 그녀가 산하기관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데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카를 왕과 이브나 왕비 얘기는 하지 말자. 사브르에게 아메탄 왕국의 역사를 들려주고 싶은 게 아니라면.”
이단이 끼어들자, 아셰는 삐죽거리며 입을 다물었다. 사브르가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한다는 기세로 눈을 빛냈다.
“이단 통령님은 영지를 거부하셨고……. 어쨌든 앞으로 회의에 참석할 사람들은 영부인님까지 포함하여 열넷입니다. 이제 기틀을 다지는 단계라 회의가 길어요.”
이단은 지루했는지 한 번 하품을 하고, 책을 내려놓은 뒤 기지개를 켰다. 아셰가 눈웃음을 치며 말했다.
“이단, 나 달콤한 것 먹고 싶어. 여기는 케이크나 쿠키가 없어?”
“주방에 부탁하면 돼.”
“그렇게 지루하면 걸어서라도 다녀와. 난 단것이라면 다 좋으니 네가 먹고 싶은 걸로 직접 고르는 것도 좋겠다. 괜히 사람들 바쁜데 종을 울리지 말고.”
그가 안 그래도 좀이 쑤셨다는 듯이 벌떡 일어섰다.
“다른 책을 좀 가져와야겠어. 제국의 역사라니 스무 번도 더 읽은 책을 가져다 놨군, 사브르. 가는 길에 네 쿠키도 부탁하지. 금방 올 테니…….”
이단이 사브르를 쏘아보았다.
“……이상한 소리 하지 마.”
그가 이미 그를 내보내려는 의도를 파악했지만 다 봐준다는 듯 그녀를 잠시 바라보고, 방문을 닫고 나갔다. 아마 그녀가 방을 따로 쓰고 싶어 할까 봐 어느 정도 타협해 준 듯했다. 사브르는 후, 하고 한숨을 쉬었다.
“끔찍하군요.”
사브르가 그제야 긴장이 풀린다는 듯 편한 어조로 말했다.
“저도 결혼을 해야 하나 싶군요. 저 의심의 시선을 견디고 있느니…….”
“결혼한다고 해서 해결이 되지는 않을 거예요. 여하튼 얼른 말해 봐요. 아까부터 이단이 자리를 비우기만 기다리고 있던데.”
“……열둘의 영주는 다음과 같습니다.”
그가 종이에 재빠르게 열둘의 이름을 적었다.
“지금 다음 통령의 후보는 둘. 시튼과 딜라나입니다. 시튼의 편에 이렇게 다섯, 딜라나의 편에 이렇게 다섯.”
“……당신과, 이 캐시라는 사람은요?”
“중립입니다. 저, 이단, 캐시. 이렇게 셋은 아직 누구의 편도 들지 않고 있지요.”
“이단은 다음에 남아 있지 않으려고 해요.”
“연임안을 통과시킨 뒤, 추천에 기권이 불가능하다는 안만 합의되면 됩니다.”
그가 씩 웃으며 말했다.
“상대방이 다음 통령이 되느니, 차라리 그 누구의 편도 들지 않던 이단이 낫다는 판단이 들게 하면 다수결이 성립되죠.”
사브르는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펜을 들었다.
“권력을 유지하는 법은 예로부터 두 가지입니다. 외부의 적에 시선을 돌리거나, 자신들끼리 싸우게 하거나. 당장은 외부의 적이 없지만, 자신들끼리 싸우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을 겁니다. 인간의 본능이니까.”
“연임안이 통과될까요?”
“다들 다음 통령을 생각하므로 무조건 통과됩니다. 한번 권력을 잡으면 놓기 싫겠지요. 지금은 이단이 떠날 것이라고 모두가 믿고 있습니다.”
그가 목소리를 더 낮췄다.
“제 목표는 이단을 한 번 더 통령 자리에 앉히는 겁니다.”
“그게 당신의 우정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인가요?”
“지난번에 말씀드렸지만 왕녀님은 아메탄 왕국의 유일한 왕녀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전기에 대한 교역을 끌어왔습니다. 그건 대단한 혈통입니다. 앞으로도 아메탄 왕국의 협조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작고 약하지만, 대륙에서 가장 영리한 사람들이 모여 있으니까요.”
“영리한 사람들을 활용하는 제도가 있는 것뿐이죠.”
그녀가 팔짱을 끼고 말했다.
“이브나 왕비는 평민이었지만 카를 왕의 눈에 들어 아메탄 왕국의 기반을 세웠지요. 이브나 왕비가 국가의 체계를 다시 세울 때 무조건적으로 우선순위에 둔 것은 민생으로…….”
문이 벌컥 열렸다. 아셰의 열띤 얼굴을 보고 이단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역시, 네가 이브나 왕비의 이야기를 할 줄 알았지. 아메탄 왕국의 사람들은 그녀를 너무 존경해. 과도하게 신격화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싶은데.”
그가 그녀의 앞에 산더미처럼 쌓인 쿠키와 케이크를 내려놓으며 아셰의 입술에 짧게 입을 맞췄다. 아셰는 씩 웃으며, 사브르를 바라보았다.
“그래? 어떨 것 같아? 내가 플라리아의 이브나가 된다면.”
사브르는 어설프게 웃었다. 이단이 미간을 찌푸리자 아셰가 재빨리 덧붙였다.
“여기서 자아실현이나 하려고. 이왕 이 자리에 오른 것, 다니엘보다 잘해 봐야지 싶어. 다니엘이 재위 초기에 그렇게 나한테 조언을 많이 구하더라고.”
그녀는 쿠키 하나를 재빨리 집느라 그의 표정을 살피지 못했다.
“이 넓은 땅이 캐넌처럼 되면 안 되잖아? 캐넌은 불편한 게 많은 곳이었거든.”
만일 그녀가 그의 얼굴을 봤다면, 캐넌이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옅게 띄고 있던 미소조차 사라진 것을 눈치챌 수 있었을 것이다.
아메탄 왕국은 왕권이 그다지 강하지 않았다. 아메탄 왕국은 왕족, 귀족, 산하기관으로 삼권이 분리되어 있었다. 정치적인 결정과 상관없는 모든 전문성과 객관성을 지닌 일은 산하기관이 담당했고, 산하기관은 가장 영리하고 똑똑한 평민들로 이루어졌다.
영지를 가진 귀족들에게는 왕족에 준하는 정치적 영향력이 있었고, 그래서 아메탄 왕국에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는 안이라면 무조건 회의가 열렸다. 왕은 집행권과 결정권이 있었지만 대다수의 경우 다수결로 회의를 끝마쳤다. 어린 시절부터 왕족들은 회의를 거치며 형제의 잠재력을 판단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경우 서로를 음해하기도 했다. 물론 뒷배경이 아무것도 없는 아셰는 그저 눈치를 보다가 적절한 때에 윌리엄의 편이나 들곤 했지만.
그래서 아셰는 어릴 적부터 많은 회의에 참석해 왔으나, 단언하건대 그녀가 참석했던 수많은 회의 중 이곳의 회의는 최악이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