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자리-83화 (83/112)

83화.

“세금징수권은 영주의 자유죠.”

“대표랑 의논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국고도 채워야 합니다. 통령의 권한으로 하죠.”

“그럼 통령이 누구한테는 조금 내라고 하고, 누구한테는 많이 내라고 하면요?”

“곡창 지대가 있는 곳은 더 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건 저희 영지를 두고 하는 소리인가요?”

사브르가 말했던 두 개의 세력이 반대를 위한 반대를 서로 주고받으며 애초의 안건부터 멀어지는 결과가 나오고 있었다. 아셰는 예전에 루벤과 윌리엄이 끝없이 대립했던 기억이 나서 한숨을 쉬었다. 이단은 피곤하다는 듯이 그들을 지켜보다가, 논리에 맞지 않는 말을 하면 반박하고 쓸데없는 소리가 나오면 다시 안건으로 화제를 돌리곤 했다.

“차라리 전쟁이 나았다는 생각을 가끔 해.”

두 시간 동안 이어진 회의에서 아무런 결과를 도출하지 못하고 잠시 쉬는 시간이 주어졌을 때, 이단은 아셰에게 작게 말했다. 아침에 ‘제국의 역사’를 읽을 때만 해도 평온해 보이던 그의 얼굴에 지루함이 가득 묻어 있었다.

“그때에는 위계라는 게 있었거든.”

이어지는 회의에서, 갑자기 나온 안건은 영주들의 사병 허용권이었다. 딜라나를 비롯한 영주들은 당연히 사병을 키울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요구했고, 시튼을 비롯한 영주들은 사병을 키우면 영지 간의 갈등이 생길 수 있다며 반대했다.

결론이 없는 싸움에 모두가 지칠 때 즈음, 그동안 아무 말도 없었던 아셰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회의란 이렇게 작은 주제를 정하는 것보다는 큰 주제를 정하고 세부적으로 들어가는 것이 효율적입니다.”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 쏠렸다. 물론 그 시선들이 못마땅함을 품고 있다는 건 그녀가 제일 잘 알았다. 혼인과 핏줄로 아무런 배경 없이 얻은 자리, 최대한 몸을 사려야 했다. 그녀가 테이블의 중앙에 놓여 있던 양피지를 가져와 펜을 들었다.

“일단 국가의 기틀을 먼저 정하고, 국가가 해 줄 수 있는 것과 영지에서 자율권을 가져야 할 것들을 정리한 다음, 세부 사항을 다수결에 따라 정리하도록 하는 건 어떨까요?”

최대한 나긋나긋한 태도를 유지하며 그녀가 조심스레 덧붙였다.

“아메탄에서는 회의가 정말 많이 이루어지는지라……. 그리고 일단은 당장 전쟁으로 황폐해진 민생을 안정시키는 것이 우선인 것 같은데…….”

“그렇게 잘 아는 분이 계셨던 캐넌은 어째서 그렇게 낙후된 곳이었지요?”

딜라나가 빈정거렸지만, 아셰는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저는 가장 체제가 잘 잡힌 국가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가장 가난한 영지에서 오랫동안 살았습니다. 제가 캐넌에서 살면서 가장 갑갑했던 것, 즉 영지에서 스스로 수급이 되지 않아 아메탄처럼 국가에서 관리해 줬으면 했던 것들 위주로 말씀드리면, 사병이나 세금보다…….”

그녀가 가장 먼저 ‘의료’라는 단어를 썼다. 모두가 그것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는지 조용해졌다. 그다음으로 그녀가 쓴 단어는 ‘교육’과 ‘행정’이었는데, 모두가 그동안의 회의에서 한 번도 나오지 않은 단어들이었다.

“캐넌이 왜 낙후되었냐고요?”

아셰가 차분하게 말했다.

“금광이나 곡창 지대가 없는 것은 둘째로 하고, 캐넌 영지에는 의원이 한 명뿐이었는데 그나마도 실력이 좋지 않았습니다. 어디 가서 배워 오지 못했으니까요. 학교도 몇 개 있었지만 가르치는 수준이 형편없었습니다. 어디 가서 배워 오지 못했으니까요. 그 ‘어디’를 마련해 주는 것이 국가의 역할 아닐까요?”

그녀는 마지막으로 최대한 공손하게 말했다. 무조건 납작 엎드려야 할 때라는 건 그녀가 가장 잘 알았다.

“주제넘었다면 죄송합니다. 모든 회의에는 보조가 필요합니다. 여러 가지 사안에 대한 결정은 영주님들이 현명하게 해 주세요. 저는 그저 안건을 정리해 오고 집행을 돕는 보조의 역할만을 하겠습니다.”

그녀는 영리하게 ‘국가가 관리하여 그 수준을 체계적으로 높여야 하는 다섯 가지의 항목’을 정하고 이에 관해 안건을 정리해 올 테니 수정 사항을 가지고 다음 날에 마저 진행하자며 그 날의 회의를 끝냈다.

“이렇게 중구난방으로 난상 토론을 하면 아무것도 정하지 못해. 기획안이 먼저 있고, 그다음에 세부적인 것을 가지고 토론을 해야지.”

방에 들어와 의자에 앉은 아셰가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그녀는 자신의 위치를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아메탄과의 교역을 끌어와 회의실에 앉아 있을 수 있다고 해도 그녀가 마음대로 휘저을 수 있는 자리는 아니었다. ‘결정’이 아닌 ‘뒤처리’를 자진한 그녀는 오랜 회의가 피곤한 듯 기지개를 켰다. 이단이 문을 닫고 물었다.

“그 기획안은 누가 쓰는데?”

“내가 써야지, 뭐. 원래는 산하기관 직원들이 해 주는 거지만.”

그녀가 펜과 잉크를 꺼내며 싱긋 웃었다. 안건을 내일까지 정리하려면 한시라도 바삐 움직여야 했다. 그의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았지만, 끝까지 이유를 물으며 달래 줄 여유가 없었다. 대신 발랄하게 물었다.

“제국에서는 회의가 없었나 봐요, 황자님?”

“딱히. 적어도 선황제의 시대에는 없었지. 제국은 그동안 굴러갔던 대로 굴러가는 것이고, 황제는 아랫것들에게 명령만 하면 되던 시절이었으니까. 그리고 우리는 군사 회의 말고는 제대로 해 본 것이 없어.”

장난스레 물었는데도 그의 표정이 부드러워지지 않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대화 몇 마디로 풀릴 기분이 아닌 것 같았다. 그가 긴 다리로 그녀에게 다가오자, 그녀는 그를 이끌어 테이블에 앉혔다. 살짝 놀란 표정의 그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그녀가 일어서서 웃으며 속삭였다.

“그랬다면 다른 여자가 회의 내내 당신을 그런 눈으로 바라보는 일도 없었을 텐데.”

“딜라나는 너무 오랫동안 날 좋아했으니 표정 관리가 힘들 수 있어.”

“캐시 발메이글? 그 여자도…….”

“어차피 내게 말도 못 붙이는 여자야.”

“좋아하면 눈도 못 마주치는 여자들이 있지.”

“……여전히 못 마주치기는 하지.”

이단은 나른하게 웃으며 그녀의 허리를 두 손으로 잡았다. 그녀가 질투를 표현하니 그제야 웃을 기분이 생긴 모양이었다.

“몇 년간 매일같이 함께 싸우던 전우들이라면 내가 갑자기 나타났다고 해서 며칠 만에 마음이 접히지는 않겠지……. 매일같이 널 유혹했겠네.”

“아니라고는 말 못 하겠군. 그리고 질투하는 것 같은 네 모습이 귀여워 더 말하고 싶은데.”

그가 그녀의 코에 입 맞추며 말했다.

“딜라나는 거의 헐벗은 채로 내 막사에 홀로 들어온 적이 있었고…….”

그녀의 파란 눈이 가늘어졌다.

“캐시는 사브르가 청혼을 하러 갈 때 하루 종일 울었다고 하던데.”

그녀가 천천히 그의 목에 팔을 감고, 목덜미를 깊숙이 물었다. 이단은 통증에 살짝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피식 웃었다. 아셰가 연달아 잘 보이는 위치에 붉은 자국을 만들며 속삭였다.

“이 남자가 누구 것인지 알려 줘야 할 필요가 있겠네.”

그의 목덜미가 얼룩덜룩해지자 이단은 어쩔 수 없이 기분이 좋아져 그녀의 허리를 감았다. 회의에서 ‘캐넌’이 나올 때부터 그는 언짢기 그지없었다. 폴라리아의 이브나? 그녀는 아메탄에서도 그런 소리를 한 적이 없었다. 결국 그가 예상할 수 없는 그녀의 이상한 행보가 캐넌의 흔적이었다니……. 무조건적인 거부감이 몰려왔다. 그에게 캐넌은 결국 그 남자를 떠올리게 했기 때문에.

그러나 그녀가 위태로운 그의 분위기를 눈치채고 일부러 소유욕을 표현해 화제를 돌렸다고 할지라도 그대로 넘어가고 싶은 달콤한 분위기였다. 이 눈치 빠른 여자는 자신이 결국엔 그녀에게 휘둘릴 것을 알고 있었다. 이단은 기꺼이 그녀의 의도대로 휘둘려 주기로 했다.

“역시 가르친 건 잘 배우는군.”

그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며 그대로 입을 맞추려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그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노크 소리를 무시한 채 그녀의 아랫입술을 무는데 또다시 연달아 노크 소리가 방 전체에 울렸다. 아셰가 재미있다는 듯이 웃으며 그를 밀어 내고 천천히 문을 열었다. 사브르였다. 이단이 테이블에서 내려와 창가에 기대며 그에게 못마땅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사브르는 그 시선을 견디며 아셰의 앞에 앉았다.

“미리 생각해 두신 겁니까?”

그의 얼굴에는 당혹감마저 서려 있었다. 그녀가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캐넌에서 생활하면서 느낀 것들이죠. 아메탄에는 있으나 리스에는 없는 것들.”

그녀는 테이블에 앉아 펜에 잉크를 적시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거침없이 기획안을 써 내려가며 말을 이었다.

“이브나 왕비는 평민 출신이었어요. 그래서 누구보다도 민생에 필요한 체계를 잘 알았고, 산하기관으로 실현한 거죠. 그걸 캐넌에 가서야 알았어요.”

이단이 가만히 창밖을 바라보고 있을 때, 아셰는 조용히 종이에 글을 써서 사브르에게 보여 주었다.

[제 능력을 증명하라고 하셨죠?]

사브르는 가만히 그 종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기서 제자리를 스스로 찾아보려고요. 혁명을 함께 이루지 않았어도, 공화주의자가 아니어도.]

그녀가 싱긋 웃었다. 사브르가 이단의 뒷모습을 흘끗 보고 난 뒤 그녀의 필담을 눈으로 쫓았다.

[그 누구도 약소국의 왕녀라거나, 낙후된 영지의 여자라며 저를 무시하지 않도록.]

그녀의 눈이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당신에게 협조하겠어요. 나는 이 황궁에서 내 가치를 증명해 보일 테니까. 날 버렸던 아메탄 왕국에 복수라도 하는 심정으로, 이단의 연임을 돕죠.]

그 때, 이단이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셰.”

그의 목소리가 너무 다급해서, 아셰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밝게 비치는 햇살에 그의 검붉은 머리가 빛났고, 짙은 눈썹 아래에 위치한 그의 눈이 불안하게 웃고 있었다.

“……날이 좋은데, 산책을 갈까.”

내일까지 기획안을 써야 해서 거절하고 싶었지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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