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네 밤뿐만이 아닌 너의 낮을 함께 하고 싶거든.’
이단의 그 말은 아셰에게는 나름 상징적이어서 아주 오랫동안 기억할 수밖에 없었다.
‘네 궁의 닫힌 천장이 아니라, 푸른 하늘과 넓은 잔디를 함께 보고 싶어.’
넓은 황궁은 대다수가 비어 있었지만, 그만큼 넓게 펼쳐진 아름다운 정원은 여전했다. 그리고 이단은 미로처럼 복잡한 황궁의 구조를 알고 있는 단 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아메탄 왕궁의 구조를 기억해 내며 밝게 말했다.
“이단, 오른쪽 길로 가면 아메탄에서는 내 궁이 나오는 구조야. 맞지?”
“맞아. 황제의 네 번째 자식의 궁이지.”
“가 보고 싶어. 가 보자.”
그녀는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는 잠시 머뭇거렸는데, 그제야 아셰는 그가 죽은 자신의 동생을 생각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렇지만 대놓고 그 사실을 말하는 것은 더 분위기를 무겁게 만들 것 같아, 그녀가 생긋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제국의 나무는 확실히 이국적이야. 이파리가 굉장히 커. 이렇게 큰 잎을 가진 나무는 처음 봐.”
“그래서 5일 동안 숨어 있기에 나쁘지 않았지.”
아셰는 할 말을 잃었다. 이 황궁에는 어디에나 그의 끔찍한 기억이 묻어 있었다. 그가 온몸으로 냉기를 내뿜고 있는 것이 이해가 되었다. 자연스럽게 길을 돌리려는데 그가 힘주어 그녀의 손목을 당겼다.
“왜 길을 돌려?”
“응?”
“가고 싶다며.”
“어…….”
“가자. 네가 처음으로 내게 함께 가자고 한 곳인데.”
그녀는 불안하게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침묵에 그가 피식 웃었다.
“네가 있으면 황궁에서도 잠을 자는데, 고작 제이스의 궁에 가는 것쯤이야. 네가 있으니 난 어디든 괜찮아.”
그의 음울한 말에 아셰는 그의 손을 깍지 껴서 잡았다. 제국의 4황녀 이름은 제이스구나. 이단이 황제의 암살에 실패한 후 그대로 황제의 손에 죽었겠지. 후계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믿지 않았을 테니까. 그때, 그들을 만나게 했던 생일 연회의 주인공 5황자 류트도 죽었을 것이다. 이곳에서 이단이 미치지 않는 건 기적이었다. 그녀라면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는 그를 따라가며 또다시 화제를 돌렸다.
“이단, 그런데 왜 일하는 사람을 이렇게 많이 줄였어? 신분제를 폐지해서? 혹시 국고가 넉넉지 않아?”
“황궁에 사람이 많이 돌아다니는 것이 싫어서. 왜? 불편해?”
“아니…… 캐넌에서 가져온 내 짐들이 아직도 오지 않았거든. 마차에 두고 내렸는데, 대체 누구한테 말해야 하는지도 모르겠어.”
“……꼭 필요한 게 있어? 여기서 부족한 건 없을 텐데.”
“음…… 그래도.”
“알아볼게.”
이단이 햇빛에 반짝이는 그녀의 금빛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감으며 화제를 돌렸다.
“환한 불빛 아래에서 너를 본 건 단 한 번.”
“언제?”
“너를 처음 만나고, 네가 그토록 빠르게 도망간 이후 네 뒤를 쫓았는데 이미 연회장에서 네 오라비를 만나 떠나려는 중이더군.”
그녀가 웃음이 어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전혀 모르던 사실이었다. 그 계단을 황급히 내려올 때만 해도 이단을 다시는 보지 못할 줄 알았다.
“그 이후에는 어둡고 캄캄한 곳에서만 너를 봤지.”
“이제는 산책을 하고…….”
아셰는 눈웃음을 치며 그의 팔에 매달렸다. 이야기를 하는 새에 4황녀의 궁에 도착했던 것이다.
“함께 식사를 하고 같은 방을 쓰잖아. 사실 난 사냥을 별로 좋아하지는 않아. 나들이를 좋아하는 거지. 네가 원하던 건 모두 이루어졌어.”
“……네가 원하는 건?”
그가 그녀의 눈에 입을 맞추고 낮게 물었다. 그녀가 웃으며 대답했다.
“모두 이루어질 거야. 내가 그렇게 만들 거니까.”
이단이 더 묻기 전에, 그녀는 팔짝 뛰어 4황녀의 궁을 한 바퀴 돌았다. 그녀가 생긋 웃었다. 여기서 고인을 추모한다거나 하면 이단은 더 우울해질 것이다. 그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그녀의 명랑함이었고 그래서 그녀는 그대로 행동했다.
“이단, 처음 보는 곳이지만 아메탄에서 내가 쓰던 궁과 너무 닮았어. 나 가끔 여기 있어도 돼? 정원도 너무 아름답고, 옛날 생각도 많이 나.”
“네가 여기서 못 할 게 뭐가 있을까.”
그가 4황녀의 궁 안에 들어가는 아셰를 천천히 따라가며 말했다. 그녀의 궁보다 훨씬 더 크고 화려한 곳이었지만 오랫동안 비어 있어 황량했다. 응접실에 앉은 그녀가 씩 웃었다. 이단이 자연스럽게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아주 오래 전, 그들은 아셰의 궁에서 이렇게 조우했었다. 그녀는 그의 손을 맞잡고 말했다.
“이단, 오랫동안 말하지 않았지만…….”
그가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네가 나를 찾아와 주던 그 시절, 그때가 내 삶의 가장 밑바닥이었어.”
너무나 당연하던 말이라 나눠야겠다는 생각도 못했었다. 아셰는 푸른 눈으로 그를 천천히 바라보았다. 맨 처음 비밀 통로를 통해 들어왔던 그 청년이 이제는 남편의 이름으로 앉아 있었다.
“매일 밤마다 잠을 잘 이루지 못하고, 갇혀 있는 갑갑함을 풀 방법은 맛있고 달콤한 것들뿐이고, 죽을 날은 너무 멀고, 그러면서도 가깝고.”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의 손에 깍지를 낀 채 가만히 그녀의 말을 들었다.
“친오라비를 죽인 살인자라고 모두 다 나를 욕했지만, 나는 사실…… 후회하지 않았어. 그런 내가 나조차도 괴물처럼 느껴지고, 내 궁에 차를 마시러 오던 모든 손님들의 발길이 뚝 끊겼지. 단 하나 내가 우린 차를 마셔 주는 친구는 나를 고발한 죄책감에 오던 애였고…….”
그녀는 이곳에서 다기를 찾지조차 않았다. 캐넌은 차를 마시지 않는 곳이라고 했다. 이단은 그 변화 또한 인지하고 있었다.
“다니엘이 찾아왔어도, 우리 사이에는 항상 미묘한 감정이 섞여 있었어. 가장 좋아하던 형을 내가 죽였으니까. 아마 5년이 지나면 내게 사형 선고를 내렸을 거야. 로즈리 집안의 압박도 있을 거고, 친형을 죽인 나를 살려 주는 건 기준에 맞지 않으니까. 하지만 나 역시 다니엘에게 소중한 존재였다는 건 알아.”
“그를 믿지 마.”
그가 차분하게 말했다.
“그 남자는 우유부단하지만 그것으로 스스로를 방어할 줄 아는 사람이야. 예전부터 그렇게 생각했어. 제국에 공물을 보내면서 나의 보호 요청을 받아들이고, 도움이 된다 생각하자 하루아침에 밀수꾼들의 수배를 풀어 스타람의 기술을 훔쳤지. 신념과 주관이 없는 자가 중도를 걷겠다 다짐하면 파악이 너무 어려워져. 오직 네 오라비이기 때문에 선택하는 그 중간의 길이 모두를 혼란스럽게 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 같긴 해.”
“우리의 결혼식 때, 불참할 수도 있었겠지. 그는 공화국의 건국을 몹시 부담스러워하고, 당연히 우리의 결합을 반기지 않았을 테니까. 그러나 그의 선택을 봤겠지.”
“리한 카드민을 끌고 왔잖아. 너의 전우라는 사람에게 축가를 시키고.”
그녀가 한숨을 쉬었다.
“이 결혼을 반대하지는 않지만, 공화정에 휘둘릴 생각은 없다, 뭐 이런 것의 표현 아닐까.”
“그 역시 동족 살해를 무서워하지 않는 왕족이지. 네가 공화국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너를 해칠까 무서워. 이제 너는 그냥 그의 여동생이 아니라, 공화국의 안주인이야. 그를 조심해.”
“아메탄에 갈 일이 뭐가 있겠어. 내 발로 자진해서 그곳에 갈 일은 없어. 말했잖아. 잠이 안 온다고.”
그녀는 불안함을 누르며 웃었다.
“그렇게 치면 나보다 위험한 사람이 있겠니? 아까 말했듯이 친오빠를 죽이고, 아무렇지도 않게 그게 밝혀질 때까지 새언니와 조카의 얼굴에 대고 웃었어.”
그녀가 그의 손을 붙잡고 조심스레 입을 맞췄다. 그녀의 푸른 눈이 그를 가만히 응시했다.
“나는 더한 것도 숨기고, 더한 시간들도 기다리고, 더한 짓도 할 수 있어. 순진하지도 믿을 만하지도 않고, 진실하지도 선량하지도 않아. 그런데도 넌 날 계속 곁에 둘 수 있니?”
“말했잖아. 그 어느 아셰 아메탄이라고 해도 나는 너를 사랑해.”
그가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의 손을 잡고 다시 주인 없는 궁을 나섰다. 사람이 없는 궁은 고요했다. 그녀가 정원을 살펴보며 알 수 없는 공허감에 휩싸였다. 예전에는 이곳에도 시녀들이 온갖 심부름을 하면서 뛰어다녔을 것이다. 그녀가 예전에 부렸던 시녀들이 떠올라 아셰는 살짝 쓸쓸해졌다.
생전 처음 온 궁이지만, 예전 생각이 나서 그녀는 그곳을 떠나지 못하고 정원을 천천히 거닐었다. 그녀가 그의 팔을 쓸며 말했다.
“너는 내 인생의 밑바닥에 나를 찾아와서…… 로즈리 앞에서 그 누구도 하지 않았던 나의 변호를 해 주고…… 누구도 이해해 주지 않았던 나를 다독여 준 사람이야.”
그는 천천히 아셰를 궁의 벽에 기대게 한 뒤 깊게 입을 맞췄다. 달뜬 숨결 사이로 그녀가 그를 꼭 끌어안고 말했다.
“그 시절에 네가 나를 찾아와 줘서 나는 외롭지 않았어. 네가 그 시절 내게 준 것은, 단순히 남자가 줄 수 있는 쾌락뿐이 아니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정의할 수 없는 복잡 미묘한 것들…… 나는 너를 어디서나 사랑할 수밖에 없어. 그런데…….”
그녀가 피식 웃으며 그를 살짝 밀어냈다.
“여기서 이러지 마.”
“많이 참았어.”
그는 그녀의 귀를 핥으며 급하게 그녀의 드레스 자락을 끌어 올렸다. 햇빛이 쏟아지는 궁의 정원에서, 그녀는 고개를 살짝 저으며 말했다.
“청소가 다 되어 있던데, 누가 오면 어떡해.”
“안 올 수도 있지. 많이 참았다니까. 아까 회의실 테이블에서 하지 않은 걸 다행으로 생각해.”
그와 함께 햇살 아래에서 푸른 정원을 보고 싶다고 말한 건 사실이지만, 이렇게 대낮에 푸른 들판에서 몸을 섞겠다는 말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가 볼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이 묘한 흥분을 자아내는 것은 사실이어서, 그녀는 그의 목에 팔을 걸치고 눈을 감았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