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뭐, 그렇다고요.”
이단은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고 잠을 잘 자지 못해 충혈된 눈으로 허공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황궁에서 지내는 시간이 흐르며 술도 끊었다. 점점 더 정신적으로 약해지면서 잘못했다가는 술에 잠식될 수 있을 것 같다고 판단한 까닭이었다.
‘별로 관심 없는 것에 대해 무심한 건 당연한 것 아냐?’
그녀의 악의 없는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그는 사브르와 달랐다. 사브르는 그녀의 표정을 읽지 못하지만 이단은 본능적으로 그녀가 지금 전혀 행복하지 않다는 걸 알았다. 폴라리아의 이브나? 말 같지도 않은 핑계다. 그녀는 공익 따위에 전혀 관심이 없다. 정말로 그토록 민생에 신경을 썼다면 황궁 밖에 자발적으로 한 번도 나가지 않을 리가 없었다. 이 모든 것이 진심이라면 그녀가 신경 쓰고 있는 국민들에 대해서 한 번은 보고 싶지 않겠는가.
사브르는 그녀가 권력욕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물론 그녀의 배경에 따르면 그렇게 여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단은 그녀와 권력욕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그녀가 소박해서가 아니라, 그저 위험한 자리에서 신경 쓰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그는 그녀와 켄에 대해서 홀로 생각하다가, 그가 정말로 미쳐 가고 있음을 알았다.
그 때, 계단을 내려가던 아셰가 순간 발을 헛디뎌서 그대로 넘어졌다. 계단 몇 개를 구를 정도로 크게 넘어졌는데도 아셰가 비명 소리조차도 크게 지르지 않고 발목을 감싸 쥐는 것이 보였다. 아래층에서 쓰러지다시피 한 그녀를 발견하고 이단은 멀리서 곧장 그녀에게로 향했다.
“아셰!”
멀리 있었던 이단과는 달리 그녀의 곁에 있었던 사람들은 충분히 그녀를 잡아 주거나 적어도 쓰러졌을 때 달려올 수라도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녀를 붙잡아 주지 않았고, 먼저 괜찮으냐고 다가와 주지도 않은 채 가만히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홀로 바닥에 엎어진 아셰와, 그런 그녀를 보고 그저 가만히 있는 영주들의 기괴한 모습이 이단의 눈에 그대로 박혔다. 곁으로 온 그가 떨리는 아셰의 몸을 끌어안고 공격적인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국민들이 새로운 공화국의 체제에 만족하며 별 불만 없이 잘 살고 있는 게 지금 누구 덕인 줄도 모르고……. 이단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굴러떨어지는 그녀를 잡아 줄 생각도 하지 않는 나머지 영주들의 오만함에 분노가 솟았다.
그녀의 자리라고? 지금 이 상황이?
아무리 그녀의 유능함을 모두 알고 있다 하더라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녀를 필요로 하면서도 아껴 주지 않는다. 아무리 회의에서 대화를 주고받는다고 해도 넘어질 때 손 한번 내밀지 않는다. 아셰는 혁명에 참여하지 않은 외국인이고 그저 혼인과 핏줄의 힘으로 ‘뒤처리’나 해 주는 여자니까.
캐넌에서, 그 많은 사람들은 아셰가 양아들과 부정한 짓을 저질렀어도 괜찮다며 감싸주었다. 이곳에서는 그녀가 캐넌보다 훨씬 더 바쁘게 일하는데도 넘어질 때에 도와주는 사람 하나 없다. 순간 불안감이 이단을 엄습했다. 이곳이 정말 아셰의 자리가 맞을까? 정녕 그녀는 자의로 그의 곁에 머물고 있는 것일까?
이단의 살기 어린 시선에 얼어붙은 듯 영주들은 그대로 서서 침묵을 지켰다. 그들 사이의 공기가 위태로웠다. 아셰가 이단의 팔을 잡고 간절히 속삭였다.
“나, 방으로 가고 싶어. 방으로…… 데려다줘, 제발.”
“…….”
“제발,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응? 의원을 바로 불러야 할 것 같아. 지금, 당장. 엄청 아파.”
이단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안아 들고 벌떡 일어섰다.
며칠간은 걷지 않는 게 좋겠다며 의원은 간단한 처방을 내리고 떠났다. 의원이 나간 뒤, 아셰는 왠지 발의 각도가 불편해서 자꾸만 몸을 뒤척였다. 아셰가 침대에서 진료를 받을 동안 침대 머리맡에 앉아 있던 이단이 일어나 그녀의 발을 쓰다듬었다.
“왜? 불편해?”
“응. 아, 그렇게 들어 주니까 좀 나아.”
그녀의 말에 이단은 아예 침대 위로 올라와 그녀의 발을 그의 무릎 위에 살짝 올렸다. 그가 무릎을 조금씩 세우며 가장 편안한 각도를 물었고, 아셰는 어정쩡하게 굽힌 무릎에 발목의 오목한 곳을 올려놓으며 이제야 좀 편안하다는 표정을 짓고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이러면 네가 불편할 테니까, 조금만 있다가 내려놔. 알았지?”
이미 해가 지고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어젯밤도 무리해서 일했기 때문에 아셰는 문득 몸이 노곤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자신의 발목을 착잡하게 바라보고 있는 이단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조금 안도했다. 아까 그녀를 다치게 그냥 두었다고 온몸으로 주변의 영주들에게 분노를 뿜어 댈 때 자신조차도 몸이 덜덜 떨렸던 것이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의 발에 조용히 입을 맞췄다. 뜨겁고 부드러운 그의 입술이 그대로 느껴졌다. 나름대로 그 자신을 가라앉히는 의식과도 같은 몸짓에 그녀는 가만히 숨을 죽였다. 그의 입술이 발의 오목한 곳과 발등을 천천히 쓸었다. 그의 입김이 간지럽기도 하고 따뜻하기도 해서 그녀는 살짝 눈을 감았다.
“아셰.”
그가 입술을 댄 채 천천히 말했다.
“농담 하나만 할까.”
“으응…….”
“저이들을 다 죽이고 내가 황제에 오르면, 그리고 네가 조금이라도 다칠 때마다 네 시중을 드는 사람들을 몇 배로 벌하면.”
고작 넘어질 때 잡아 주지 않은 것을 가지고
아셰는 무거운 속눈썹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지금 그는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걸까? 고작 넘어질 때 잡아 주지 않은 것을 가지고 ‘전부 죽이겠다’는 소리를 하고 있다.
“이곳이 네게 덜 외로울 수 있을까.”
이단이 새까맣게 번득이는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네가 영리하고 유능한 걸 알아. 그런 건 예전부터 알았어.”
그가 마치 짐승처럼 그녀의 다친 발목을 섬세하게 핥다가 살짝 입술로 물었다.
“누군가는 그 모습이 좋아 보인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저 네가 영원히 나를 벗어나지 못하게 하고 싶을 뿐이야. 네 모든 걸 알고 싶고, 갖고 싶고, 받고 싶어.”
아셰는 나른하고 몽롱한 기분이 들어 어깨를 살짝 움찔거렸다.
“나의 황폐한 세상에는 예전부터 너뿐이었으니까.”
다시 눈을 감아 버렸지만 핏발이 선 그의 눈이 잔상으로 남아 머리가 멍했다. 저건 사랑일까, 광기 어린 소유욕일까.
“네 세상을 나처럼 황폐하게 만들어서라도 나만 담게 하고 싶어. 이 밤, 이 넓고 화려한 황궁이 망령으로 휩싸이고 죽은 황족들이 내 목을 졸라 와도 이 어둠 속에 너만 있다면 나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데. 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모든 일들이 결국 네 날개를 꺾는 일이지.”
어두운 밤, 그는 그녀의 다친 발을 붙들고 어딘가를 바라보며 그동안 하지 않았던 수많은 말을 ‘농담’이라는 핑계로 이어 가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아셰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의 목소리가 점점 더 낮아지고, 점점 더 느려졌다.
“내가 황제가 되었다면, 끔찍한 지옥이라도 너와 나, 단둘만 남도록…… 너를 눈에 담았던 사람들을 죽이고, 네 온기를 한 번이라도 받았던 사람들을 죽이고, 내가 모르는 네 얼굴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을 죽이고, 네가 나를 떠나 몸을 의탁할 수 있는 사람들을 모두 죽여서…….”
무슨 미친 말이야, 라고 말하기도 전에 아셰는 밀려오는 피로에 까무룩 잠이 들었다.
“너는 여전히, 네가 나를 완전히 지배한다는 게 무슨 뜻인지 조금도 몰라.”
캄캄한 밤이 내려앉았을 무렵, 아셰가 비몽사몽간에 눈을 떴을 때에도 이단은 그 자세 그대로 그녀의 발목을 받치고 앉아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내가 네게 얼마나 미친 것 같은지, 네가 내게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지.”
그렇게 무릎을 오랫동안 애매한 각도로 세우고 있는 건 힘든 일일 텐데. 가늘게 눈을 뜬 아셰를 눈치챘는지 이단이 살며시 눈을 맞추며 웃음을 띠고 말했다.
“……다 농담이야.”
그녀는 입술을 달싹이다 다시 잠들었다.
“나는 아무도 안 죽이고, 네가 하고 싶은 건 다 하게 두고, 가만히 기다릴 테니까.”
새벽녘, 다시 그녀가 잠에서 깨었을 때에도 여전히 이단은 그 자세 그대로 그녀의 발목을 받치고 있었다. 밤새 이렇게 있었냐며, 다리가 저리지 않았냐며 동그란 눈을 깜빡이는 아셰의 발에, 그가 다시 한 번 입을 맞추었다.
* * *
폴라리아 공화국이 설립된 지 2년 반 만에 선전포고가 들어왔다.
“당연히 일어날 일일 줄 알았어.”
이단은 전혀 놀라지 않고 태연하게 말했다. 아셰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온갖 곡창 지대와 금광을 가졌으니 당연한 일이지. 건국의 자유는 줬지만 모두 산맥으로 쫓아냈잖아.”
“아니, 그것 때문에 일어나는 전쟁은 아니야.”
맨 처음, 이단은 공화정을 원치 않는 사람들에게 알아서 국가를 이뤄서 살라며 자신의 밑에 들어올 필요가 없다 공언했다. 그러나 국경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었으므로, 몇 군데의 땅은 무력으로 정복한 뒤 실질적으로는 쫓아 보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각각 흩어져 작은 왕국을 이루었던 옛 제국군들이 연합하여 다시 이단을 향해 선전포고를 해 온 것이다.
선전포고의 내용은 뻔한 것이었다. 아버지와 형제를 죽이고 제국의 천 년 역사를 무너트렸으며 엔리히 신의 마지막 축복마저 끊어버린 이단을 처단하여 옛 제국의 설욕을 갚아야 한다는 말에 이단은 별로 분노하지도 않았다.
“이 전쟁의 이유는 우리가 대륙의 가장 좋은 곳을 가져서가 아니라…….”
그는 오만하게 눈을 내리깔고 말했다.
“그들을 살려 주었기 때문이지.”
그녀는 그의 눈에 비치는 냉정함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별달리 어려운 상대들은 아니었다. 안정되고 있는 공화국은 크고 단단했으며 넉넉한 군대와 자원을 보유하고 있었다. 방금 전 회의에서 그 선전포고에 대하여 논의하고 오는 길이었는데, 워낙에 규모가 작고 산발적이어서 단순한 국지전의 규모라 당연히 영주들조차도 직접 출전할 생각이 없었다. 근처의 영지에서 해결이 가능하지 않겠느냐는 의견까지 있었다.
아셰 역시 심각한 사안이라고는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방에 들어와 무심결에 화제를 돌렸다. 며칠 전에 황궁에서 일하는 하인에게 들었던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 이단. 그리고…… 묻고 싶은 게 있어.”
“뭔데?”
“니아에게 들었는데, 내가 캐넌에서 왔을 때의 짐들을 네가 가져갔다고 하더라고. 어떻게 된 거야?”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