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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자리-87화 (87/112)

87화.

그 질문을 할 때까지만 해도 아셰는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이단은 1년 전 켄에 대해 물었던 이후 캐넌을 언급한 적이 거의 없었다. 물론 처음에야 켄이 신경 쓰였을 수 있겠지만 벌써 2년이 흘렀다. 캐시와 딜라나를 매일같이 보는 그녀조차도 이단의 옛 시절에 대해 아무런 신경을 쓰지 않는데, 이단 역시 당연히 자유로워졌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게다가 켄의 이름이라면 몰라도 캐넌을 말하지 않는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

그러나 이단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표정을 굳히자,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이단? 내 물건들을 어떻게 한 거야?”

돌아서는 그의 팔을 아셰가 붙잡았다. 처음엔 가볍게 물었지만 그의 번득이는 눈과 가라앉은 분위기를 보고 심상치 않은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없앴어?”

“…….”

“내 허락도 없이?”

“대단히 귀한 물건은 없어 보이던데.”

“에곤 숙부님의 유품도 있었어.”

“네 첫 번째 남편?”

“……무슨 소리야?”

여기서 그에게 안겨 그런 물건들은 다 필요 없다고 웃어 버리면 모든 갈등이 끝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아셰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점차 냉랭해지는 그의 기분을 맞춰 주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가 그녀를 존중할 때였다. 이렇게 그녀의 허락도 받지 않고 그녀의 물건들을 다 버린 뒤 그 사실을 숨긴 것까지 감싸주고 싶지는 않았다. 게다가 에곤에게 남편이라니? 하다못해 캐넌의 사람들도 그녀의 앞에서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그만하자. 미안하다.”

그가 고개를 돌렸다. 뒤에 따라붙는 말을 짐작할 수 있었다. 네게 실수할까 봐. 그러나 그가 끔찍한 생각이라도 하고 있다면 바꿔 주어야 했다. 아셰는 그의 팔을 놓지 않았다.

“뭘 그만해? 내 허락도 없이 내 물건을 없앤 건 비상식적인 일이야. 더 설명해.”

“넌 꼭 캐넌이 껴 있을 때에만 내게 화를 내지. 그 조잡한 물건들 속에 켄 카세튼이 준 물건도 있었나?”

그녀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이 서늘하게 빛났다. 아셰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가 숨을 몰아쉬었다.

“널 행복하게 해 주고 싶어. 마음 편하게 해 주고 싶다고. 근데 그게 왜 이렇게 어렵지? 대체 내가 어떻게 하면 되지? 어떻게 해야 네가 내 곁에서 편안하게 웃을 수 있을까?”

“나, 네 곁에서 행복…….”

“거짓말하지 마. 넌 아메탄의 궁에 갇혀 있을 때와 똑같아. 장소가 황궁이고, 네 오라비가 나인 것만 다르지. 진심은 없고 적절히 선을 지켜 달래기만 해. 대체 왜 그놈에게 남기고 온 표정의 한 자락마저도 내게 주지 않는 거지?”

“켄 얘기가 왜 나와? 캐넌에서 평화롭게 잘 지내는 사람이야. 왜 상관없는 사람을 자꾸만 언급해? 내가 언제 네 과거에 대해 뭐라고 한 적 있어? 나 이전의 사람에 대해 묻지도 않고, 딜라나와 캐시에게 매일같이 웃어 주기까지 해.”

“……그래.”

그가 피곤한 듯 두 눈을 문질렀다.

“내가 미쳐 가서 그래. 미안하다, 실수했어.”

“…….”

“네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아셰는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나 직접 출정하고 싶어.”

“이단.”

그녀는 눈을 내리깔았다. 말릴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안 가도 돼. 그렇게 어려운 상대도 아니잖아.”

“공화국의 전쟁이 아니야.”

이단은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고 천천히 대답했다.

“선전포고에는 온통 내 이름이니까. 황제의 망령이야. 내가 가야 해. 나는 이 대륙의 마지막 황족으로서 더 이상 엔리히 황조에 대한 말이 나오지 않도록 모든 것을 마무리 지을 의무가 있어.”

“널 또 싸움터에 보내라고?”

“미안하게도…….”

그는 검은 눈을 빛내면서 씩 웃었다. 아셰는 문득, 그가 황궁을 떠나고 싶어하는 것만큼이나 자신과 조금 떨어져 있고 싶어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통치보다는 정복이 어울리는 사람이야. 그걸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내가 이 자리에 미련이 없는 거지. 당장 전쟁터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너를 홀로 두고 싶지 않아 참은 거야.”

아마 내일 회의에서 그가 직접 출정하겠다고 하면 그렇게 싸워 대던 딜라나와 시튼도 의견을 모을 것이다. 예전처럼 대단한 마법을 쓸 수는 없어도 그는 여전히 전투에 가장 능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끝까지 제국군을 전멸시키지 않은 것은 통령의 자비심이었지.”

그가 눈썹을 치켜 올리며 말했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언제나 황제를 실망시키지 않는 건 자비심이 아니라 잔혹함이었어. 내가 이 빌어먹을 윗자리에 있는 한 나는 황제에게서 자유로울 수 없어. 너도 알겠지만 나는 ‘나의 공화주의’ 따위가 아니라 군주학을 배우며 자랐으니까.”

아셰는 그가 직접 출정하기 전날 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주 조금 울었다. 이제 그는 예전처럼 남들보다 탁월한 마력을 가진 사람이 아닌 그저 훌륭한 일반인일 뿐이었다. 둘 다 그 점을 이야기하지는 않았어도, 그가 예전처럼 대륙을 건너 혈혈단신으로 그녀를 보러 올 수 없다는 걸 알았다. 그녀가 그를 다시 보게 될 날은 그가 정말로 승리하여 군대와 함께 돌아올 때였다. 모두가 그의 승리를 확신하더라도 그녀는 슬펐다.

그 언젠가 켄의 방문 앞에서 리트와를 벌하지 않았던 이유를 설명하고 두려움과 자비심에 대해 간단히 얘기했던 것이 떠올랐다. 이 남자는 그녀와 정확히 똑같은 철학을 갖고 있었다. 배신을 예감하고 베풀었던 자비였기 때문에, 두 번째 자비는 없다. 아마 그가 자비를 베풀었던 것은 진심이 아니라 역사에 남을 명분을 의식해서였을 것이다. 이제 그는 아마 옛 제국군들을 마지막 한 명까지 전멸시키고 올 것이다. 대륙은 넓었고, 시간은 오래 걸릴 수밖에 없었다.

“영주들의 의견을 듣고 조율하는 것은 네가 나보다 훨씬 잘하는 일이니 네게 내 대리권을 넘기고 갈게. 역설적이게도 공화국은 네가 필요해. 다들 인정하기 싫어하지만 네 ‘보조’가 없었다면 훨씬 더 처리가 느렸을 거야.”

그녀는 그날 밤 그의 품 안에서, 지난 2년간 그녀를 지켜봐 왔던 것은 영주들뿐만이 아니었다는 것을 눈치챘다. 이단은 2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를 관찰한 것이었다.

“네가 캐넌에서의 삶에 너무 영향을 받아, 이브나 왕비의 흉내를 내보고 싶었다면 어쩔 수 없지. 믿을 수 없지만 정말로…… 너는 캐넌이 좋았나 봐. 네게 그만한 영향력을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 끼쳤다는 사실이 끔찍하지만 받아들여야겠지.”

그가 어떤 오해를 하고 있건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어떻게든 아이의 복수를 해야만 했다. 그에게 말할 수 없는 그녀만의 바람이 있다면, 다시 한 번 그의 아이를 품고 싶었다. 그렇다면 그녀 스스로 몰아치고 있는 삶의 방향이 조금은 달라질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가 아이를 갖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하던 올리타의 진단처럼, 아이는 2년이 지나도 생기지 않았다.

“기대하지 않았지만 너는 내 예상보다 이곳에 필요한 사람이야. 너를 남겨 두고 가는 것이 아니라, 네게 맡기고 가는 거야.”

이성적으로 이런 말을 할 수 있을 때까지 그가 얼마나 많이 연습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가 얼마나 캐넌을 싫어하는지 지난번 언쟁으로 눈치챘기 때문이다.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이곳을 부탁해.”

그가 당연히 이길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폴라리아의 군대는 남은 제국군들보다 압도적으로 많았고, 지리적으로나 재정적으로나 밀릴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물이 나는 것은 오로지 이별 때문이었다. 그가 끈적한 정사의 내음 안에서 속삭였다.

“말해.”

“사랑해…….”

그녀가 그의 목에 팔을 걸며 말했다.

“늘 네 곁에 있을 거야.”

그는 신음 소리를 흘리며 그녀의 목에 이를 박았다.

“내게는 너뿐이야.”

“아셰.”

그녀는 연달아 온몸에 느껴지는 통증 때문에 침대 시트를 붙잡았다.

“지난 2년은 내게 축복 같은 시간이었어. 네가 행복하지 않았어도, 내가 그 사실 때문에 괴로울지라도, 그래도 내 삶에서 가장 행복했어.”

그녀의 온몸에 붉은 자국이 새겨질 동안, 그녀는 신음 소리를 꾹 참고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 내 임기는 정확히 2년 반이 남았어. 하고 싶은 게 있다면 그 안에 해. 네가 아무리 이곳에 어울리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네 손을 이끌고 나갈 거야.”

“알아. 네가 이곳이 얼마나 싫은지…….”

그녀가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요즈음 그는 그녀의 곁에서도 점점 더 잠을 이루지 못해 새벽마다 깨는 것 같았고, 눈빛은 더 불안정해졌으며 방 안에 홀로 앉아 무언가를 참는 모습을 많이 보였다. 눈을 뜨면 어디론가 사라져 있기도 했다.

그는 늘 위태로워 보였다. 설령 모든 계획을 실패하고 결국 이단에게 사실을 말하게 되는 날이 오더라도, 그는 그녀처럼 냉정하게 계산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대로 그 말을 듣자마자 사브르를 죽이러 뛰쳐나간다면…… 혹시나 사브르가 본능적으로 달려드는 그를 총으로 쏜다면…… 그런 일은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지난번, 넘어지는 그녀를 잡아 주지 않았다고 영주들에게 쏟아 내던 분노의 기운을 생각하면 여전히 끔찍했다.

캐넌의 물건들조차 그녀의 의사에 상관없이 없애고 그 사실을 숨긴 것은 충격적이었다. 그는 남의 의사에 반하는 건 하지 않는다고 선언한 통령이었는데…… 그는 누구에게나 부탁형의 어조를 썼지만 단 한 명, 그녀에게만은 여전히 명령형의 어조를 쓰곤 했다. 잠자리에서만이었지만 그녀는 그의 유일한 예외였다. 그리고 그것이 그녀는 두려웠다.

만일 아셰에게 윌리엄의 궁에서 몇 년 동안 머물라고 했다면 그녀 역시 제정신이기 힘들었을 것이다. 옳고 그름을 떠나 친족을 죽인 사람만이 아는 끈적끈적한 괴로움을 그녀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 전쟁터로 가는 것이 어느 정도는 달갑다는 것도.”

“네 곁을 떠나는 것 하나만 슬플 뿐, 나머지는 전혀 미련이 없지. 그리고…….”

그가 뒷말을 잇지 못하고 음울하게 웃었다. 아셰는 그가 말을 줄일 때에는 언제나 무슨 말이 생략되어 있는지 알고 있었다. 네게 실수할까 봐. 그 사실이 두려워 떠날 정도로 이 황궁에서 그의 광증은 더 심해지는 것일까? 그녀는 그의 몸을 꼭 끌어안았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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