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그는 군대를 이끌고 수도 엔리히를 떠나 국경으로 향했고, 아셰는 담담하게 그에게 마지막으로 입을 맞춘 뒤 통령의 집행권을 모두 넘겨받았다. 아셰가 지난 2년간 아무런 정치적 행보를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 누구도 반대하지 않았다. 이단조차도 그녀가 그 어떤 것에도 의견을 내지 않을 거라 믿었기 때문이다.
“통령 대리인을 괜히 욕심냈다가 시튼 쪽에 뺏기는 것보다 나아. 내가 대리인을 하겠다고 하면 분명히 반대가 극심할 테고, 괜히 사브르나 캐시의 반감만 살 수도 있지.”
딜라나는 자신의 편에 선 영주들에게 흡족한 듯 말했다.
“그 여자가 공화국에 필요한 건 사실이야. 적어도 우리가 국민들의 불만을 마주할 일은 없으니까. 알아서 뒤처리를 해 주니 굳이 생각할 필요 없어.”
물론 웃으며 이단을 보낸 시튼 역시 자신의 편에 선 영주들에게 비밀리에 말했다.
“이단이 수도를 비웠을 때 무조건 중립에 있는 사람들을 끌어들여야 해. 영부인은 우리의 싸움에 이단만큼이나 관심이 없어. 그저 대리인일 뿐이라면 괜한 야심을 드러내느니 그 캐넌의 대변인한테 주는 게 낫지.”
차기 통령 선거까지 2년 반이었다. 2년 반은 정치를 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긴 시간이 아니었다. 시튼은 눈을 빛내며 속삭였다.
“이단이 없는 사이, 사브르와 캐시를 반드시 이쪽으로 끌어들여야 해. 이단을 우리 편으로 끌지 못한 건 안타깝지만 외국인 여자와 결혼할 줄 알았나…….”
화려한 출정식이 끝나고, 황궁에 이단의 뒷모습조차 보이지 않게 되자 아셰는 단숨에 돌아서며 옆에 있던 사브르에게 속삭였다.
“남들 눈을 피해 내 방으로 오세요.”
“……예?”
사브르는 의외라는 듯이 놀라서 반문했다.
“2년을 기다렸어요.”
그녀가 방금 남편을 전쟁터에 보낸 얼굴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무심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제 시작이지요.”
“……네?”
“제가 통령 대리인입니다. 2년이 아닌 3년, 4년이라도 기다릴 수 있었지만 기회가 빠르게 왔네요.”
“선전포고가 들어올 줄 예상하셨다는 겁니까?”
“이렇게 커다란 전쟁일 줄은 몰랐죠.”
그녀의 금발 머리가 바람에 살짝 날렸다.
“하지만 모든 곡창 지대를 품고 있으니, 국경에 약탈 문제 정도는 벌어질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 많은 제국군의 끄나풀들이 산맥에서 갑자기 양을 치며 살 수는 없는 것 아니겠어요? 그리고 황궁을 나가고 싶어 하는 이단이 한 번은 출정할 줄 알았어요. 이렇게 연합군이 일어나 시간이 길어질 줄은 몰랐지만.”
항상 이단의 곁에서 황궁을 거닐던 그녀는, 고고하게 혼자서 턱을 당당하게 들고 드레스 자락을 끌며 황궁 안으로 향했다.
“이제는 이단도 없고, 아무도 나를 경계하지 않으니…….”
사브르는 숨을 죽이고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당신의 우정을 받을 만한 일을 시작할 때가 되었지요.”
그녀의 모습은 미끄러지듯 사라졌다. 사브르는 지난 2년간 그녀가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녀는 그동안 혁명 동지가 아니라는 이유로 아무 의견도 내지 않았고, 가장 체계가 잘 잡힌 아메탄 왕국 출신이라는 명분으로 뒤처리 일만 도맡아 하면서 모두의 의심을 빗겨 갔다. 그녀의 곁에 있었던 이단마저도 그 모습에 순순히 대리권을 넘기고 떠났다.
태어날 때부터 형제들과 함께 제왕교육을 받았으나 배경이 워낙에 없어 야심조차 꿈꿔 보지 못한 여자였다. 장기말로 쓰이느니 형제를 죽이는 편을 선택하고, 외국의 시골에 처박혀서 몸을 움츠리고 있던 영악한 왕녀. 사브르는 역시 자신이 사람을 잘 판단했다 생각하여 살짝 미소를 지었다.
“이단이 없는 새에, 연임안을 통과시키죠.”
홀로 남은 넓은 방에서, 그녀는 사브르를 앉혀 두고 당당히 말했다. 예전에 사브르가 그녀에게 제안했던 말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 이단과 저는 전혀 이 위치에 미련이 없으니 지금이 적기잖아요? 제가 먼저 말을 꺼낼 수 없으니 당신이 밑 작업을 하여 연임안을 올리세요.”
“……제가요?”
“저는 이단과 떠날 것을 계속해서 시사하고 있잖아요. 하루도 쉬지 않고 정치와 관계없는 일을 하는 것도, 5년 안에 국가의 체계를 모두 잡아 놓고 싶어서 그런 것으로 보이겠지요. 딜라나와 시튼이 장래 통령을 꿈꾼다면 연임안은 매력적인 미끼고. 아, 그래도 의심을 피하려면…… 그때 당신이 말한 것처럼 추천을 받으면 기권은 못 한다고 해요.”
“……제가 이단을 추천하면 되겠군요.”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아셰는 이단이 없는 새에 많은 일을 진행해야 한다며 말을 이었다.
“연임안을 통과시킨 뒤에는 통령에게 감당할 수 없는 많은 권위를 주세요. 상대에게 자칫해서 선거가 졌다가는 몰살당할 것 같은 불안함을 느낄 수 있게요. 그래야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되면 중립에게 표를 주겠죠. 일단은 다음 선거를 기다릴 심산으로.”
“좋은 전략이군요.”
“신중하게 움직여야 해요. 자신이 통령이 되었다는 가정하에 탐욕으로 눈을 빛내며 찬성하게 해 놓고, 정신을 차려 보면 그 모든 것들이 위험하도록 느껴지게. 중립인 당신의 힘이 가장 필요하지요. 캐시는 어차피 이단의 뜻에 따를 테니까.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잘해 보겠습니다.”
사브르는 신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캐시’라는 말이 나오자 말소리를 낮춰 물었다.
“……캐시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는 아시죠?”
“정확하지는 않아요. 말해 봐요.”
“그녀는 누구보다도 통령님을 사랑합니다. 통령님의 뜻이라면 뭐든지 따라 줄 겁니다.”
아셰는 기가 막혀서 잠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지금 그의 아내인 자신을 앞에 두고, 다른 여자가 누구보다도 그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이 정상인가? 과거에 그녀가 이단을 좋아한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당당하게 현재 시점의 발언을 들을 줄은 몰랐다. 사브르가 말을 이었다.
“통령님의 자식이 없다는 것에 희망을 갖고 있습니다. 게다가 당신과 이단의 사이가 생각보다 돈독하지 않다는 것까지도.”
그녀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정작 이단은 전혀 자신의 자식을 바라지 않았지만, 남들의 시선에는 2년 동안 후계가 없는 그들의 사이가 어떻게 비춰질지 뻔했다. 그러나 생각보다 돈독하게 보이지 않는다는 점은 조금 의외긴 했다. 이단과 자신은 언제나 황궁에서 함께 다녔는데?
“끝까지 그 희망을 이용할 수 있겠지요. 저는 사실 캐시에게 늘 거짓 정보를 흘렸습니다. 통령님이 자식을 원한다고요.”
“그래서 그 눈빛이 계속 변하지 않는 거군요.”
“마지막에 통령님의 뜻대로 무조건 표를 줄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저와 영부인님만으로는 부족하지요. 5대 5가 갈라진 이 판에 이단에게 순정을 바치고 있는 조용한 여자의 표는 커다란 변수입니다.”
그녀는 눈을 내리깔고 한동안 숨을 몰아쉬었다. 그들의 자식이 없는 것은 다 눈 앞에 앉아 있는 이 남자 때문이었다. 딸인지 아들인지도 알 수 없는, 그 아이는 누구를 닮았는지도 이제 영원히 알지 못한다.
“사브르.”
그녀가 차분히 말했다.
“당신은 왜 결혼을 하지 않죠?”
그는 옅은 갈색 눈을 굴리며 대답했다.
“소중한 것이 생기는 건 제겐 약점입니다. 후계가 생긴 자들이 얼마나 끔찍해지는지 저는 스타람에서 보았습니다.”
“…….”
그녀는 조용히 웃고 있었지만, 지난 몇 년간 품고 있었던 분노가 조용히 물결치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당신이 그토록 통령으로 세우고 싶었던 이단에게 후계가 생길 것 같으니 내 아이를 죽였나? 그녀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공화주의자였던 아카날 총통이 변한 것은 아들을 보고 나서입니다.”
“그럼 이단도 후계가 생기면 안 되겠네요.”
“글쎄요, 그는 생각보다 이 황궁을 너무 끔찍해해서요. 영부인님이 오시기 전 그의 상태는 끔찍했습니다. 당신이 오셔서 많이 안정된 거예요. 뭐, 지금은 또 그 시절로 점차 돌아가고 계신 것 같지만.”
사브르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잠을 자지 못해 충혈된 눈으로, 마치 시체처럼 방을 떠나지 못하셨습니다. 황제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는 곳에는 발걸음도 못 하셨죠. 잠을 자지 못해 자꾸만 환청이 들린다고 하셨고요. 그러니 출정을 하면서 그리 홀가분한 얼굴이셨겠죠.”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시선이 사브르의 허리춤에 단단히 매달려 있는 총으로 향했다. 첫날밤, 이단에게 총의 이야기를 했던 것은 실수였다. 그 이후로 그 어떤 군인들도 그녀에게 총기를 보여 주지조차 않았기 때문이다. 이단은 총을 두고 ‘어린애조차 이렇게 사람을 쉽게 죽일 수 있는 무기라면 재앙과 같다’라고 평가했다고 했다. 실제로 그가 아셰가 오기도 전에 법제화한 것이 총기의 개별 소지에 대한 금지였다.
“생각했던 것보다…… 공화국에 정녕 필요한 존재셨군요, 영부인님.”
그가 그녀의 손에 입을 맞추며 흐뭇하게 웃었다. 그녀가 도도하게 말했다.
“난 공화국의 그 어떤 것도 결정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국가의 기틀을 누구보다도 잘 다져 놓으셨습니다. 영부인님의 이름을 대중들은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결정하는 사람보다 더 필요한 건 안내하고 시행해 주는 사람이지요.”
“이브나 왕비의 전기를 어렸을 때부터 너무 많이 읽어서요. 그녀의 기준에 따라 움직인 것뿐이에요.”
“……공화국에서 가장 빚을 진 것이 외국인 왕족이라는 사실이 재미있군요.”
“그리고 남들의 눈을 속이기 위해서지요. 딱히 정치적 패는 아니지만, 버리기에는 국가에 너무나도 필요한 사람. 아메탄에서는 산하기관이 딱 그 위치랍니다.”
그녀가 싱긋 웃었다.
“내가 이단의 자식을 낳지 못하는 것도 당신의 마음에 들겠군요.”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