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영리하십니다.”
사브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단의 연임에…… 정말로 협조하시는 겁니까? 그게 그의 뜻에 반하는 것인데도요?”
“아메탄에서 가장 발전이 없었을 때가, 제 두 오라비가 양극단으로 패를 갈라 싸움질을 할 때였어요. 둘로 갈라진 세력은 언제나 서로를 음해하는 데에 정신이 없어 발전을 막아 버리고, 폴라리아는 지금 딱 그 상황을 앞두고 있어요. 그렇다면 아메탄의 내 오라비, 다니엘이 무척 기뻐하겠죠. 그는 나를 캐넌의 노인에게 보냈고, 난 그 원한은 잊지 않아요.”
“이단 통령님은 언제나 영부인님이 목가적인 삶을 꿈꾼다고 했었는데…….”
아셰는 얼굴에서 웃음을 천천히 지우며 말했다.
“남자를 홀리기 위한 수 중 하나에요. 권력에 미친 왕녀보다는 소소한 삶이 좋다며 순진하게 미소 짓는 여자들을 다들 좋아하니까. 더 이상 외국으로 시집을 가기 싫다며 우는 약소국의 왕녀로 잊히긴 싫어요. 처음에 당신이 내게 제안한 대로.”
그녀는 도도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사브르는 처음에 그녀를 보았을 때를 회상하며 빙긋 웃었다. 캐넌의 촌뜨기 여자가, 어느새 아름다운 옷과 화려한 장신구를 걸친 채 새로운 국가를 키우고 있다. 어릴 때부터 회의에 참석하며 내심 오라비들을 부러워했을 텐데 얼마나 지금 자신의 모습이 마음에 들까.
“제가 할 일을 철저히 하겠습니다. 양쪽을 번갈아 가며 다음 선거에 자신을 지지할 것 같다는 느낌을 주죠. 그렇다면 자리를 비운 통령이 가지는 권한이 점점 더 커질 겁니다. 영부인님은 아무런 욕심도 없는 척 승인하세요. 그리고 투표 일시가 다가오면…… 상대에 대한 불안함을 부추겨, 차악으로 이단을 택할 수 있도록 하죠.”
사브르는 눈을 빛내며 말했다.
“저는 원래 정보원이었고, 그런 건 제 특기입니다.”
이단이 없는 새에 연임안을 통과시키는 것은 쉬웠다. 아셰는 어차피 이단이 원치 않으니 이 사안에 대해서는 빠지겠다고 한 발짝 물러섰고, 이미 사브르가 자신의 편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한 두 진영에서는 모두 연임안에 찬성했다. 캐시를 제외한 모두가 연임안에 동의했기 때문에 아셰는 통령 대리인의 권한으로 연임안을 지정했다. 이단이 돌아와 어떻게 하지 못하도록, 한 번 제정된 안건에 대해서는 잦은 수정을 피하기 위해 3년간 건드릴 수 없다는 규칙까지 만들어 놓았다.
이단은 멀리서 승전보를 보내왔다. 한 번의 자비를 베풀고, 이미 그 자비가 자신의 발뒤꿈치를 물 것을 예상했던 그는 그저 승리만으로 멈추지 않았다. 대륙에 남아 있는 제국군의 씨를 말려 종말을 보겠다는 듯이 하나하나 끝까지 추격했던 것이다. 아셰는 그 모습에서 예전 반란군들의 씨를 말리던 황제의 모습이 겹쳐져 승전보를 받고도 마냥 웃을 수만은 없었다. 전쟁터가 더 편하다는 그의 말은 진실이었을 것이다.
그는 낭만적인 서신을 보내는 재주는 없어서, 그녀에게는 담담한 몇 줄의 글만 남겼다. 승리했지만 당장 돌아갈 수 없는 것을 이해해 달라, 그러나 매일 밤마다 여전히 목동자리의 여덟 개 별을 보고 있다는 글이었다. 국가 행정에 대한 그 어떠한 질문도 없어서, 그녀는 그가 완전히 그녀를 믿고 맡겼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단이 없는 새에 숙청권 역시 통과했다. 다수결에 따라 마음에 들지 않는 영주를 폐하고 그 지역으로 새로운 영주를 보낼 수 있게 하는 제도였는데 상당히 위험한 안건이라 아셰와 사브르는 굉장히 신중을 기해야 했다.
“대신 민간인들에 대한 신변 보호 법률을 지정하죠. 그 어떤 일이 있더라도 통령과 영주들은 정치적인 이유로 민간인을 해치면 안 됩니다. 그렇다면 균형이 맞지 않겠어요? 민간인이 영주보다 더 공화국에서 안전할 수 있다면요. 영주에서 물러나면 일단 정치적인 보복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잖아요.”
아셰는 온갖 온화한 단어들을 갖다 붙였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까지 딜라나의 의심을 받아야 했다. 그 모든 것을 구렁이 담 넘듯 두루뭉술하게 통과시키는 것이 사브르의 정치력이었다. 그는 ‘어차피 3년 이후, 통령이 되시면 그때 바꾸십시오.’ 등으로 위험한 상황을 무마시키곤 했다.
이단이 떠난 지 1년이 지난 즈음에는 사브르만이 외줄을 타는 것이 아니라, 아셰마저도 부지런하게 딜라나와 시튼을 만나야 했다. 다들 아셰의 한 표를 의식하고 있었다. 이단은 어차피 향후 정치에 관심이 없고 이미 국경으로 떠난 지 오래여서 아셰의 의견을 따를 것이라고 예상했기 때문이다. 시튼과 아침에 비밀리에 만난 뒤 홀로 점심을 먹던 어느 날, 사브르가 심각한 얼굴로 아셰의 방에 찾아왔다.
그녀는 그 때, 이단이 보낸 짧은 서신을 몇 번이나 읽고 있었다. 그녀를 사랑하지만 제국군의 끝을 보는 것은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요지의 글이었다. 그의 임기는 절반이 훌쩍 지나 있었고, 다음 통령의 임기에까지 자신의 그림자로 인해 국경이 시끄럽게 만들 수는 없다는 글은 설득력이 있었다.
게다가 그 서신에는 없는 말이었지만, 그는 황궁으로 돌아오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 마음을 그녀는 누구보다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가 아메탄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이유와 같았다. 차라리 이후에 공화국을 위협할 수 있는 세력을 끝까지 뿌리 뽑는 것이 그가 훨씬 더 잘할 수 있고, 그에게 더 편한 일이었다.
“무슨 일이시죠?”
아셰는 이미 내용을 외운 서신을 무릎에 내려놓으며 사브르를 바라보았다. 그가 표정 관리를 하지 못하며 고개를 숙였다.
“……비보를 전하게 되어 유감입니다.”
그녀는 천천히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아메탄에 계시는 어머님께서 위독하시다는 서신입니다.”
아메탄의 샤틴, 그녀의 친모. 그녀는 눈을 감았다. 아무리 그녀에게는 좋은 엄마가 아니었을지라도, 그녀와는 혈연으로 연결된 천륜이었다. 그녀는 제대로 된 서신 한 번 보낸 적 없었고 에곤과 결혼이 결정된 그 순간부터 얼굴도 보지 못했다. 그들의 사이를 이미 알고 있는 아메탄 왕궁에서 이런 서신을 보냈을 때에는 정말로 샤틴이 죽기 직전이라는 뜻이었다.
“당장…… 가 보셔야 할 것 같다는 연락인데.”
사브르의 목소리가 떨렸다. 아셰는 조용히 일어섰다.
“할 일을 최대한 빠르게 마무리 짓고 가겠습니다. 저희 어머니는 원래부터 엄살이 심하신 분이니 조금 더 기다려 주실 겁니다.”
“……예?”
“계획보다 조금 더 빠르게 일을 진행시켜야겠습니다. 사브르, 다음 우리의 안건이 무엇이었지요?”
“제명권입니다. 영주에 한해서 통령의 권한으로 즉시 처형이 가능한…….”
“빠르게 통과시키고……. 아시겠지만…….”
그녀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저와 이단이 없는 새에, 통령 대리인은 사브르 당신입니다.”
“싫습니다.”
그가 고개를 저었다.
“차라리 캐시가 어떻겠습니까? 캐시는 아마 이단이 없으니 아무런 일도 안 할 겁니다. 중립적인 입장이니 딜라나와 시튼도 동의할 것이고요. 우리의 뜻대로 제가 조종하죠.”
아셰는 한숨을 쉬었다.
“……그대 뜻이 그렇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지요.”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뒤, 싸늘한 눈으로 그에게 말했다.
“그대는 정보원이고, 여전히 대륙의 모든 정보를 수집하고 있습니다. 제 어머니가 병을 앓아서 위독하다는 것쯤은 공식 서신 이전에 알았겠지요?”
“…….”
“제가 이렇게까지 이단을 황궁에 붙잡아 놓기 위한 계획을 차근차근 세우고 있는데, 여전히 제게 우정을 약속하지 않는 이유는 뭐죠?”
“저희는 지금…… 너무나 중요한 시기고, 영부인님이 아메탄에 갈까 봐 걱정되어서였습니다.”
사브르는 천천히 대답했다. 그가 아셰에게 샤틴의 병환을 숨긴 것은 시기도 시기였지만, 이단이 마지막으로 그에게 남기고 간 말 때문이기도 했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아셰를 황궁 밖으로 내보내지 마.’
아마 아셰가 2년 내내 황궁 안에 틀어박혀서 그 어디에도 가지 않는 모습을 보여 주지 않았더라면, 이단은 이렇게 긴 정벌 전쟁을 떠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특히 캐넌은 절대 안 돼.’
이단은 아메탄에도 그녀를 보내고 싶어 하지 않는 눈치였지만, 친모가 위급하다는 서신이 공식적으로 왔는데 아셰를 보내지 않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사브르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황궁에 온 뒤 한 번도 아메탄 왕국에 관심을 보인 적이 없었으므로, 별일 없이 모친의 임종만 지키고 즉시 돌아오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렇다면…….”
아셰가 턱을 들고 말했다. 그녀의 말에 조급함과 답답함이 섞였다.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공식 서신이 왔는데도, 이토록 일을 마무리하려고 애쓰는 것을 보여 주었으니, 당신에게 제 가치는 입증한 셈인가요?”
“…….”
“이단이 오면 개인적으로 부탁도 해 보지요. 연임안이 통과된 김에, 5년만 더 참아 달라고. 제 부탁이라면 들어줄 수도 있을 겁니다. 그는 저를 많이 사랑해요.”
사브르는 가만히 아셰를 바라보았다. 아셰는 이단과도 다른 사람이었다. 기다릴 줄 알고, 속마음을 숨길 줄 알고, 누구보다도 정치적이었다. 마치 아메탄에 있는 그녀의 오라비, 다니엘 국왕처럼. 그녀에게 정보를 준다는 것은 이단의 옆에서 정보원으로 활약하는 것보다 훨씬 더 위험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셰는 그의 뜻대로 끝까지 움직여 주었다. 게다가 지금 그녀가 협상에 올린 것은 친모의 임종이기까지 했다.
그가 옅은 갈색 눈을 천천히 깜빡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시고, 아메탄에서 돌아오시면…….”
아셰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속이 울렁이는 것 같았다.
“우정의 증거를 드리죠.”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몰아쉬었다. 이제 정말로 한 발자국이 남았다.
“……그 대가로, 총을 하나 준비해 놓겠습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