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너는 폴라리아 공화국의 안주인이야.”
다니엘은 굳이 궁에서 지내지 않아도 된다는 아셰를 붙잡으며 말했다.
“샤틴은 언제 숨이 넘어갈지 몰라. 네가 네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고 싶다면 궁에 머물러. 네 궁은 여전히 비어 있으니까.”
아셰는 사틴이 위독하다는 서신을 받고 나서 한 달 만에 아메탄 왕국에 도달했다. 적어도 그녀의 어머니에 대한 판단은 정확해서, 위독하다고 해도 바로 숨이 넘어갈 지경은 아니었다. 다만 샤틴이 매일같이 자신은 오늘 죽을 것 같다고 히스테리를 부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 한 달 동안, 그녀는 사력을 다해 통령의 제명권을 통과시켰다. 시튼과 딜라나는 차기 통령이 되면 상대를 날려 버릴 수 있다는 욕심에 일단은 제명권에 동의했으나, 막상 통과되고 나니 주춤하는 모습을 보였다. 뒤처리는 사브르에게 맡기고 나서, 그녀는 일단 아메탄으로 향했다.
“널 아메니티의 여관에 두는 것은 공화국에 대한 모욕이야. 난 이단 엔리히에게 그 어떤 트집도 잡히고 싶지 않아.”
아셰도 자신이 예전처럼 아메니티의 여관에서 묵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녀는 오랜만에 궁을 돌다가 로즈리를 마주쳤는데, 로즈리는 예전처럼 그녀에게 날을 세우며 덤벼들지 못했다. 그녀를 잘못 건드렸다가는 외교적 문제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폴라리아 공화국은 대륙에서 가장 큰 땅덩이와 가장 많은 인구를 지녔고, 전쟁보상금으로 인해 국고가 넘쳐 나고 있었으며, 통령인 이단은 지금 그 어느 때보다 커다란 규모의 군대를 이끌고 국경 정벌에 나선 뒤 모든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있었다.
‘거절하면 후환이 두렵게 만들면 돼. 그게 내 사람이든, 네 사람이든.’
이단이 예전에 그녀에게 했던 말은 사실이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그를 거스르면 후환이 두렵게 만드는 권력을 쥐고 있었다. 그녀는 검지에 아직도 자리 잡은 그의 반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 반지를 자신의 궁에서 받았고, 결국에 그는 자신을 곁에 두었다. 이제 그의 반지가 그녀가 지닌 가장 오래된 물건이었다.
그녀는 불과 10년 전만 해도 이 궁에서 갇혀 있었으며, 로즈리에게 매일 굴욕을 당해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단의 부인이 되면서 그녀는 국빈 대우를 받으며 궁에 돌아왔고, 로즈리와 지젤은 오히려 그녀를 피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샤틴은 숨이 넘어갈 듯 넘어갈 듯 하루하루를 꾸준히 연명했다.
“엄마는 여전해.”
아셰는 턱을 괴고 정원을 바라보며 그녀의 유일한 친구, 리젠에게 푸념했다.
“나는 공화국에서 할 일이 많아. 그런데 한 달이 넘게, 아니, 한 달이 뭐야, 두 달 가까이 발이 묶여 있잖아.”
“하지만 위독하신 건 사실이에요.”
리젠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삶에 대한 의지가 강하신 것뿐이지요.”
“우리 엄마는…… 내가 어린 시절부터 살기 싫다고 투덜거렸어. 자살 소동도 정말 많이 일으켰지만…… 정작 치사량은 절대 먹지 않았지.”
아셰는 자신의 궁에 앉아 한숨을 쉬었다. 리젠이 그녀의 손을 토닥이며 말했다.
“그래도 어머님이세요. 아셰를 낳아 주신 분이잖아요. 음, 차마 길러 주신 분이라고 말은 못하겠지만…… 그래도 임종을 지키는 건 맞아요. 엄마의 얼굴도 모르는 저는, 그나마도 부러워요.”
“나도 알아. 아니까 지금 이대로 이 끔찍한 곳에서 버티고 있잖아. 궁에 돌아오니 매일 수면제를 털어 넣어도 잠이 잘 오지 않아. 게다가 이대로 공화국에 돌아가면 그대로 복수할 수 있는데…….”
리젠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녀를 보았다. 아셰는 나른하게 턱을 괴며 말했다.
“내겐 이제 매일 품고 다니던 비상이 없어. 너처럼 체술이 뛰어나 성인 남자를 제압하여 죽일 수도 없지.”
“…….”
“그 와중에, 누르기만 하면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총이라는 무기는 얼마나 매력적인지.”
“총은 위험해요, 왕녀님.”
리젠이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다니엘 전하께서도 몇 번 써 보고는 바로 일반인에게 배급을 금지시켰어요. 요즈음은 밀수보다도 총기 단속이 훨씬 더 엄격해요. 게다가 소리가 커서 몰래 죽일 수도 없어요. 왕녀님, 비상과 총은 달라요.”
그녀는 이미 총기를 본 적이 있는 모양이었다.
“왕녀님은 바로 붙잡힐 거고, 그렇게 되면…… 이단이라고 해서 법의 테두리 안에서 왕녀님을 보호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아니, 그러면 다행이지요. 이단은 그곳의 사람들을 다 죽이고 제 스스로 황제에 오르더라도 왕녀님을 보호할 거예요. 그 사람의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었어요.”
“……리젠.”
아셰는 피식 웃으며 차분히 대답했다.
“나는 내 아이의 복수를 할 거야. 그럴 마음이 없었다면 나는 애초에 캐넌으로 가지도 않았을 거고, 또 캐넌에서 공화국으로 다시 돌아오지도 않았을지 몰라.”
“이단 통령을 사랑하잖아요, 왕녀님.”
“나는 왕족이야. 하나를 받으면 하나를 줘야 해. 내 아이의 목숨값은 받아 내고 말 거야.”
“……그 목숨값이 얼마나 무거운지는 아세요?”
리젠이 거세게 고개를 저었다.
“왕녀님은 또다시 누구나 아는 살인자가 되고, 이단이 법의 심판에 왕녀님을 세울 리가 없잖아요. 왕녀님에 대해서는 전혀 이성적이지 않다면서요.”
“난 이단에게 그런 무게를 쥐여 줄 생각이 없어. 그가 통령에서 명예롭게 물러난 뒤에, 두 발이면 모든 게 끝나. 총은 간단히 사람을 죽일 수 있고…… 그건 나도 포함되는 것 아냐? 이미 윌리엄이 내게 제국행을 명령했을 때부터, 비상을 사용했을 때부터 내 인생은 행복이나 평화 같은 것과 멀어졌어. 누군가를 죽일 때에는 내 목숨도 거는 거야.”
“아셰!”
리젠은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벌떡 일어났다. 대학 시절 때 이후 리젠이 그녀의 이름을 직접 부른 것은 처음이었다. 리젠이 아셰의 앞에 서서 똑바로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정신 차려. 네 아이가 그걸 바랄 것 같아? 세상에 원하는 대로 다 하고 사는 사람이 어디 있어? 지금 네가 하는 말들이 얼마나 끔찍한지 알기나 해? 포기할 건 포기해. 행복을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이 눈감아야 할 것들이 있는 법이야. 복수를 위해 삶을 놓는다고? 말이 돼?”
그녀가 아셰에게 반말을 쓴다는 것은, 정말로 정신을 놓았거나 아니면 목숨을 걸고 진실 된 말을 하고 싶다는 뜻이었다. 아셰는 빙그레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리젠이 기가 차다는 듯이 낮게 말을 이었다.
“네 아이를 죽인 사브르를 죽이고, 그다음 너도 죽겠다고? 그럼 이단은? 너 이단을 사랑하지 않아? 네 머릿속에는 죽은 네 아이뿐이야? 그렇게 허무하게 죽어 버리려고, 그 모든 시간을 살아온 게 말이 돼? 너 정말 제정신이야?”
“다른 방법을 더 생각해 보긴 할 거야. 아직 내가 총기에 대한 이해가 떨어지거든. 하지만 너를 다음에 보지 못할까 봐 그저 최악의 상황을 말해 주는 것뿐이야.”
아셰 역시 리젠의 반응을 모르고 한 말은 아니었기 때문에, 전혀 동요하지 않고 담담하게 대답했다.
“너는 나를 이해하지 못해. 난 내게 해를 입힌 사람을 그냥 두지 않아, 절대로. 그렇게 배웠어.”
“…….”
“내 아이가 죽고, 나는 차가운 바닷물 가운데에서 눈을 맞으며 생각했어. 내가 직접 복수해 주겠다고.”
“아셰, 제발. 지금까지는 사랑과 복수가 같은 길이었기 때문에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거야. 복수는 복수를 낳고, 그 끊임없는 고리는 피해자를 너무 많이 만들어. 사람을 극단으로 몰아가기 쉬운 시대고, 그 모든 복수가 이루어져야 한다면 넌…… 지젤의 손에 죽어야 해. 슬프지만 어디에선가는 멈춰야 하잖아.”
“나도 내가 싫어. 나라고 이런 내가 좋을 것 같아? 이단과 나의 공통점이 뭔지 알아? 둘 다 우리를 닮은 자식을 낳기 싫어한다는 점이야.”
그녀가 리젠의 두 뺨을 감싸며 말했다.
“내 아이가 아들이었으면 켄을 닮았으면 했고, 딸이라면 너를 닮게 하고 싶었어. 이단이 미친 사람처럼 전쟁터를 누비는 것처럼, 나는 어떻게든 복수를 완료해야 해. 너 같은 사람은 이해하지 못해.”
리젠은 흔들리는 눈으로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왕녀님, 생긴 대로만 살 수는 없어요. 저는 사람을 죽인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았지만, 왕녀님을 위해 황궁에 가면서 비상을 챙겼어요. 저는, 다른 사람을 위해 생각을 바꿀 수 있다는 걸 믿어요. 왕녀님도 이단을 위해서 왕녀님의 무언가를 바꾸실 수 있을 거예요.”
아셰의 표정이 변하지 않자, 리젠은 체념한 듯 털썩 주저앉았다. 아셰를 설득할 수 있는 온갖 말들을 고르고 있는 것 같았다.
“……켄 카세튼…… 그 영주님을 저는 아주 옛날에 본 적이 있지요.”
그녀는 예전에 한 번 캐넌의 영지로 놀러 온 적이 있었고, 그때 켄과 마주한 뒤 단번에 그가 기본적으로 선량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그 사람도 왕녀님을 몹시 사랑했어요. 알고 있지요? 켄 영주님 역시 아셰가 이렇게 허무하게 죽는 걸 바라지 않을 거예요. 그저 이단과 행복하세요. 이단의 임기는 얼마 남지 않았고, 그냥 다 훌훌 털어 버리고 황궁과 사브르를 떠나세요. 왕녀님은 이단을 조금 더 생각해 줄 필요가 있어요.”
“너라면 그랬겠지만 난 아냐.”
“차라리 이단에게 솔직하게 말하지 그래요?”
“……사랑하기 때문에 나는 그의 모든 것을 지켜 주고 싶어. 그가 명예롭게 통령 자리를 지키고 미련 없이 황궁을 떠나길 바라. 어쩌면 그의 행복이나 사랑보다 그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 그는 이 시대에서 정말 중요한 남자고, 오랫동안 기록에 남을 테니까. 상태가 점점 더 안 좋아지는데도 불구하고 억지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람이야. 마지막에 자극해서 모든 걸 망칠 순 없어.”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