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01화 과학고? (1)
“나는 성공했다!”
눈 앞에 펼쳐진, 구름이 자욱한 하늘과 땅을 향해 손강우는 환호성을 질렀다.
이곳은 설악산 대청봉. 한겨울의 눈 덮인 봉우리가 겹겹이 둘러싸고 있는 해발 1700 m의 고지다.
주위를 둘러봐도 지금 그가 서 있는 곳보다 더 높은 곳은 없다. 천하를 굽어보며 함성을 지르는 순간 지금까지 억눌리고 암울했던 심정이 말끔히 씻겼다.
“으하하! 드디어 인정받았어!”
손강우는 득의의 웃음을 터트렸다. 그의 호쾌한 웃음소리가 메아리가 되어 들려왔다.
손강우의 나이는 35세. 좌충우돌하던 청년기를 지나 안정감 있는 중년기로 접어드는 시점이다.
그는 지방대인 한설대학교의 교수이자 물리학자다. 어릴 때부터 천재라고 소문이 났고 무난하게 국내 최고 대학인 한국대학교 물리학과에 입학하여 대학원 진학 후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자신이 최고의 천재이자 이 나라의 과학기술을 짊어질 주역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때부터 가시밭길이 시작됐다. 그는 수도권 주요 대학교의 교수직에 지원했으나 원서를 내는 족족 떨어졌다.
그렇다고 실적이 부족하지도 않았다. 그는 SCI급 국제학술지에 여러 편의 논문을 기재한, 상온 핵융합 기술에서 세계적인 권위자였다. 실력으로 따지면 여러 대학에서 앞다투어 모셔가야 할 판인데 이상하게도 일이 꼬였다.
- 죄송하지만 이번에는 교수 충원을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 윗선에서 이미 내정된 분이 계십니다.
- 학과 내에 임용을 반대하는 분이 있습니다.
- 최근 학교 재정이…….
지원서를 내면 기이하게도 떨어지고 또 떨어졌다. 그렇게 밀리고 밀려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시골의 지방사립대에 간신히 적을 두게 됐다.
이공계의 연구는 여러 명이 협업하는 랩 체제이며 막대한 연구비가 필요하다. 하지만 유명 대학 교수와 달리 지방의 이름 모를 대학의 교수인 그에게는 연구를 도와줄 대학원생이 없었다. 게다가 연구비를 마련하고자 국가 기초 연구 과제 사업을 신청하는 족족 떨어졌다.
정말 이상할 만큼 인생이 풀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는 더욱 발버둥 쳤고 결국은 해내고 말았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했던가. 꼬이기만 하던 그의 인생에 갑자기 서광이 비치기 시작했다. 미국 거대 방산업체에서 그의 상온 핵융합 기술을 군사 무기에 적용하고 싶다는 연락을 해왔다.
심지어 조건도 대단히 좋았다. 그 계약 한 건이면 향후 몇 년간 연구에 필요한 자금을 충분히 감당할 정도였다.
그게 어제의 일이다.
지금까지의 고통을 모두 털어버리고 새로운 기분으로 출발하고자 그는 오늘 설악산에 올랐다. 한겨울이고 날씨도 그닥 좋지 않았다. 하지만 무슨 상관인가. 수십 번 등반했던 곳인 데다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는 시점 아닌가.
온통 구름에 덮인 하늘 아래로 멀리 굽이친 산들이 보였다. 자연이 연출하는 장엄한 광경은 충분히 가슴을 트이게 했다.
이 높은 산봉우리에 홀로 서서 천하를 굽어보면 기분이 웅장해지기는…… 개뿔!
후두둑-
바람이 불고 눈보라가 휘몰아쳤다.
하늘을 덮었던 구름이 어느새 시커먼 먹구름으로 변했고 순식간에 안개가 피어올랐다.
“젠장! 어째 오늘 등산객이 안 보이더라니!”
흥분해서 날씨도 확인하지 않고 산행을 강행한 것이 실수였나?
하지만 설악산이 험하긴 해도 설악산이 익숙한 그에게는 젖은 산길이 그다지 문제 되지 않았다. 내리는 눈을 빼면 다른 날과 다를 것이 없으니까.
그렇게 대청봉 정상과 작별을 고하고 몸을 돌렸을 때였다.
“강우야!”
그의 앞으로 두 남자가 걸어왔다.
손강우는 갑작스러운 불청객의 등장에 미간을 찌푸렸다. 한 사람은 눈에 익은, 그것도 아주 잘 아는 사람이고 다른 한 사람은 모르는 사람이었다. 매끈하고 지적인 미남자와 어딘지 모르게 투박하고 험상궂은 인상이 묘한 대조를 보였다.
“네가 여기에 무슨 일로?”
“나는 등산하면 안 되나?”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그래도 너무 뜻밖이잖아……?”
매끈한 미남자는 마도환. 국내 최고 대학인 한국대 물리학과 교수다. 그와는 한국대 물리학과를 학부 때부터 대학원까지 함께 다녔다. 그 덕분에 알고 지낸 지 10년이 넘었다.
공교롭게도 세부 전공도 그와 같았다. 상온 핵융합 소형 원자로 연구.
외부에서는 두 사람을 라이벌로 보지만 손강우는 단 한 번도 마도환을 라이벌로 여긴 적이 없었다. 그가 보기엔 마도환은 변변찮은 실력으로 단지 아버지의 후광을 업고 잘 나가는 놈에 불과했으니까.
마도환은 주위 동료의 도움으로 간신히 한국대를 졸업했고 연구 실적을 쌓았다. 하지만 그와 달리 마도환은 쉽게 위로 올라갔다.
박사 학위를 받은 후에도 손쉽게 모교 교수직을 꿰찼다. 그의 아버지인 마국성이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을 지낸 유력 정치인이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국내에서는 마국성은 과학기술계의 원로 인사로 그 영향력이 지대했다.
“표정이 좋아 보이네. 좋은 일 있어?”
마도환이 손강우의 앞으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평소에 서로 벌레 보듯 하는 사이인데 갑자기 친근하게 들이대는 행동이 의심스러웠다.
“좋은 일? 그런 건 없는데.”
“설마. 미국에서 연락 오지 않았어?”
“미국? 네가 그걸 어떻게……?”
“다 아는 수가 있지.”
펑- 펑-
눈이 점점 거세져서 머리에 쌓이기 시작했다.
이런 날씨에 산꼭대기에서 친구이자 적인 마도환과 얼굴을 마주하고 있으니 이보다 더 기괴한 일이 없었다.
“강우야, 넌 이제 떠나줘야겠다.”
“응? 무슨 말이야?”
“그동안 내 앞을 가로막았잖아? 지겹지도 않아?”
말을 잇는 마도환의 입가에 섬뜩한 미소가 드리워졌다. 순간 모골이 송연해지는 기분이 가슴을 콱 막았다.
손강우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마도환을 쳐다봤다.
“대학 시절부터 너는 나의 앞길을 방해했어. 너만 없었어도 내 인생은 지금보다 백 배는 더 잘 나갔을 거야. 너와 비교되는 바람에 나는 항상 둔재로 취급받았지. 같이 연구해도 네놈 때문에 묻혔고. 지금도 그래, 상온 핵융합? 그거 나도 잘하거든? 그런데 왜 너에게만 미국에서 제안이 오냐고! 정작 한국대 교수인 나를 제쳐 두고!”
무슨 헛소리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한국대 교수란 작자가 잘나가지 못했다니? 게다가 간신히 지방대에 자리 잡은 그가 앞을 막았다니! 정작 실력도 없으면서 잘 나간 인간이 누구인데!
솔직히 말해서 마도환 저놈은 천재가 아닌 둔재가 맞지 않나? 적어도 손강우가 보기엔 그러했다.
“무슨 소리야?”
“내가 생각해봤는데 네가 있으면 내 앞길이 계속 막히겠더라고. 지금도 그런데, 네가 앞으로 미국에서 연구비를 투자받으면 더 잘 나가겠지?”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이야?”
“상관있지, 네가 없었더라면 내가 받았을 거니까.”
순간 벼락처럼 머리를 치는 기억들이 있었다.
“설마…… 그동안 내 인생을 방해했던 게 너였어?”
학위 과정을 밟으면서 꼬였던 사건들, 운이 나빴으면 학위는커녕 졸업도 제대로 하지 못할뻔했던 사고들, 그리고 교수 임용지원서를 낼 때마다 이어지던 불운……. 설마?
“크크, 이제 눈치챘냐? 난 처음부터 네놈이 미웠어. 천재라서 노력이 없어도 연구 실적을 만들어내는 너의 잘난 재능이 부러웠다. 알아? 그 자괴감을? 내가 아무리 고생해도 풀지 못하는 문제를 네놈은 하룻밤 사이에 해결하잖아.”
“……그게 왜 내 탓이야?”
“이 세상에 네놈 같은 천재는 없는 게 나아. 그래야 내 앞길이 뚫리거든.”
그를 노려보는 마도환의 눈빛에 살기가 어렸다. 손강우는 본능적으로 위기를 직감하고 뒤로 한발 물러섰다.
미끈-
발이 미끄러지며 몸이 휘청거렸다.
마도환의 옆에서 잠자코 있던 녀석이 앞으로 나왔다. 녀석의 험상궂은 얼굴에서 잔인함이 엿보였다.
“무, 무슨 짓을 하려고…….”
“강우야, 미안하지만 그만 가라. 훗날 저세상에서 보자.”
손강우는 마도환의 잔인한 눈빛에 몸서리를 쳤다. 인간이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저런 놈과 십여 년을 같이 보냈다니!
아니, 지금 마도환의 인간성을 욕할 때가 아니었다. 이곳은 아무도 없는 산꼭대기이고 눈앞의 두 사람은 그를 죽이려 하고 있었다. 빠져나갈 방법은 없었다. 여기에 하필 눈이 와장창 쏟아져 저승길 반주를 넣고 있으니…….
“흐흐, 아무도 모를 거야. 넌 그저 눈이 쌓인 미끄러운 절벽에서 실족사한 거지.”
마도환의 비웃음이 그의 귀를 스치는 순간 험상궂은 녀석이 가슴을 밀었다. 그리고 손강우는 그대로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
“잘 가라! 네가 남긴 연구 자료는 내가 잘 쓸게!”
“으아아악!”
안면을 스치는 눈송이와 귀를 가르는 바람 소리. 이제 막 꽃을 피우려던 한 인생이 마감하는 순간이었다. 어쩌면 이 나라의 과학기술 미래를 바꿀 수 있었던 상온 핵융합 전문가가 이렇게 사라졌다.
* * *
“으아아악!”
손강우는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뭔가 답답한 게 얼굴에 씌워져 있었다. 그래도 한참 숨을 헐떡이자 막혔던 가슴이 점차 편안해졌다.
간신히 눈을 뜨자 흐릿한 사물이 눈에 서서히 들어왔다.
“우야! 우야!”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 힘들었다. 갑자기 여인의 음성이 왜 들리는 걸까?
“강우 학생! 강우 학생! 들립니까?”
“눈을 깜박여보세요. 눈!”
손강우는 무의식적으로 눈을 깜박였다. 그러자 점차 모든 감각이 또렷해졌다.
“체온 정상, 맥박 정상. 산소포화도 정상, 바이탈 상태 양호…….”
소란스러운 목소리가 귀를 자극하는 가운데 그는 점차 뚜렷해지는 광경에 화들짝 놀랐다.
낯선 곳에 자신이 누워 있었다. 얼핏 병원 같기는 한데……. 대청봉에서 떨어진 후 구조된 건가? 설마 그 까마득히 높은 곳에서? 그것도 눈이 내리는 악천후 속에서?
“깨어났네요. 무려 일주일 만입니다.”
흰 가운을 입은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일주일 동안 병원에 누워 있었다는 뜻이겠지? 의식을 잃은 채로.’
손강우는 어렵지 않게 상황을 이해했다. 어떻게 살아났는지 모르겠으나 그 높이에서 떨어졌다면 일주일쯤 의식불명이었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우야…….”
옆에서 중년의 여인이 그의 손을 붙잡고 울고 있었다. 손강우는 몇 번이고 눈을 부릅떴으나 누구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누, 누구세요?”
“응? 누구라니? 엄마도 몰라보니?”
“예?”
분명히 그의 어머니는 오래전 돌아가셨는데? 게다가 지금 옆에 있는 얼굴은 그가 기억하는 어머니가 아니었다.
“얘가 기억을 제대로 못 하나? 네 이름은 아니?”
“강우잖아요.”
“그래, 강. 우.”
“손강우.”
“손? 손이 왜 붙어? 강 씨인데.”
“예?”
언제 손 씨에서 강 씨로 호적이 바뀌었지? 어리둥절한 그에게 어머니가 속사포로 말을 퍼부었다.
“삼 일 남았어. 학교 가야지! 그때까지도 못 깨어나나 얼마나 걱정했었는데.”
“무슨 학교요?”
“고려 과학영재고. 너 거기 입학하려고 얼마나 열심히 했었는데, 기억하니?”
고등학교? 대학을 졸업하고 박사 학위까지 받은 후 교수가 된 사람에게 고등학교라니? 대체 무슨 말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게다가 낯선 여인이 어머니를 자처하다니.
“저…… 거울 좀 볼 수 있어요?”
답답해진 손강우는 거울을 찾았다. 뭔가 이상한 일이 발생했음이 분명했다.
옆에서 간호사가 손거울을 건넸다. 거울을 들여다본 손강우는 입이 쩍 벌어졌다. 거울 속에는 그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어린 학생의 얼굴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는 이제 손강우가 아닌 강우로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