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과학고 천재-2화 (2/325)

제02화 과학고? (2)

옆에서 어머니가 기억을 되살려주려고 쉴 새 없이 상황을 설명했다. 덕분에 손강우는 어렵지 않게 상황을 이해했다. 무엇보다 취미 삼아 읽었던 판타지 소설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지금 자신에게 일어난 일은 소설에서 보던 사건과 많이 닮아 있었다.

자신이 빙의한 소년의 이름은 강우. 무슨 인연인지 이름이 아주 비슷했다. 어쩌면 하늘의 계시일지도 모른다.

인구 1만의 외진 시골,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나이는 이제 막 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직전. 중학교 때 공부를 잘해서 고려 과학영재고에 지원했다.

천재를 육성하는 학교라지만 지금의 과학고는 대부분 학원에서 다년간 선행학습을 준비한 학생들이 입학하는 곳이다.

안타깝게도 강우는 집안이 가난했고, 시골인 관계로 학원을 제대로 다니지 못했다. 하지만 과학에 놀라운 재능을 보인 그를 눈여겨본 중학교 과학 선생님이 적극적으로 추천서를 써 주어 과학영재고에 입학원서를 냈다.

정상적인 입학시험 과정을 거쳤다면 그는 당연히 떨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한부모 가정인 강우는 사회배려자 전형을 통해 턱걸이로 입학 관문을 뚫었다. 이 마을에서는 처음 맞는 경사였다.

그러나 지금부터 일주일 전, 눈 덮인 뒷산에 올랐다가 미끄러졌고 강우는 의식을 잃었다. 별달리 몸에 이상은 없었으나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덕분에 강우의 어머니는 일주일 내내 병상에 붙어서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하늘이 도우셨어. 울 아들이 건강하게 돌아오다니.”

“죄송합니다.”

어쨌든 지금은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이유야 어찌 되었건 이제는 손강우가 아닌 강우로 살아갈 수밖에.

강우는 누운 채 손발을 꼼지락거렸다. 다행히 특별히 아픈 곳은 없었다. 오히려 예전보다 젊고 건강해졌다. 그때는 연구에 지치고 삶에 찌들어 건강과는 담을 쌓고 살았었는데. 그는 젊어진 몸이 마음에 들었다.

원래 이 몸의 주인인 강우는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가 대청봉에서 실족하고 이 학생이 뒷산에서 죽으면서 이 몸에 빙의한 것 같았다.

어쨌든 죽었어야 할 손강우가 다시 강우로 살게 되었으니 특별히 나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침대 옆에 핸드폰이 놓여 있었다. 아마도 강우의 것인 모양이다. 그는 핸드폰을 켜고 날짜를 비롯하여 뉴스를 확인했다.

오늘은 정확히 그가 대청봉에서 떨어진 후 일주일이 지난 시점이었다.

지금 무엇보다 궁금한 것은 떨어진 손강우의 행방이었다. 비록 그가 유명한 인물은 아니지만 뉴스를 검색해보니 짤막한 기사가 나 있었다.

- 손강우 한설대학교 물리학과 교수 실족사. 한국대 마도환 교수와 함께 눈 내리는 설악산 대청봉에 올랐다가 미끄러져 숨져.

- 상온 핵융합 기술의 권위자였던 고인의 죽음으로 관련 분야에서 심각한 타격이 예상돼.

- 동료 마도환 교수는 고인의 죽음을 기리며 사흘 내내 빈소를 지켜.

핸드폰을 보는 순간 분노가 치솟고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알고 있다. 그는 죽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마음은 아니었나 보다. 이제는 이 세상에서 존재가 지워진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무엇보다 분한 것은, 지금 현 상황이었다.

그동안 과학기술계에서는 알게 모르게 그를 배척했었다. 그날 대청봉에서 확인한 사실이지만 이 모두가 마도환의 계략이었다. 그동안 마도환이 그를 질시하고 사사건건 방해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가 죽고 나니 사람들은 그제야 과학기술계의 별이 떨어졌다며 슬퍼했고, 그를 죽인 살인자 마도환은 선인으로 둔갑하여 그의 죽음을 기렸다니.

‘그래놓고 속으로 잘 죽었다고 비웃었겠지.’

동료의 죽음을 기린 마도환에게 주변 사람들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을 것이다. 그럴수록 마도환의 이미지는 더욱 좋아졌을 테고.

‘정치인 아들이랍시고 정치를 하고 있네. 나쁜 자식.’

강우는 지금까지 과학기술 분야에서는 정치가 필요 없다고 생각했었다. 오로지 실력만이 중요하다고, 유명 학술지에 실린 논문과 거대 프로젝트 수행 실적이 전부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마도환은 실력도 없으면서 오로지 정치만으로 한국대 교수가 되었고 과학기술 분야에서 굳건하게 입지를 다졌다. 놈의 나이를 생각하면 앞으로 얼마나 더 확고한 입지를 다질지 확연하게 보였다.

머리가 복잡했다.

“무, 물 좀 주세요.”

강우가 종이컵에 물을 가득 담고 마시려던 찰나였다.

그때 병실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들리고 몇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들어온 사람을 확인한 순간 강우의 눈이 더 뜰 수 없을 만큼 크게 떠졌다.

“강우 학생?”

누군가 그에게 말을 걸었지만, 놀란 강우는 바로 반응할 수 없었다. 멍하니 상대방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우야, 인사하렴. 우리의 안타까운 사연을 듣고 후원해주신 고마운 분이란다. 한국대 교수님이라던데…… 유명하신 분이래. 이분께서 병원비를 모두 내주기로 하셨어.”

어머니의 말씀이 도무지 머리로 들어오지 않았다.

지금 강우의 앞에 있는 사람은 바로 마도환이었다! 그는 말끔한 정장을 입고 평소처럼 고상한 표정을 지으면서 점잖게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마도환의 뒤로는 기자로 보이는 두 사람이 소형 녹음기를 들고 취재하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 깨닫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강우는 양의 탈을 쓴 늑대, 마도환을 노려보았다. 정말 공교로운 일이었다. 강우로 빙의한 후에도 마도환과 엮이다니. 저놈과 자신은 정말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가?

가난한 영재 중학생을 돕는 선량한 교수라는 타이틀을 얻고자 거짓 웃음을 짓는 마도환의 얼굴에 침을 뱉고 싶었다.

“하하, 의식이 돌아왔다는 연락을 받고 찾아왔습니다.”

“관심을 주셔서 고맙습니다. 우야, 인사드려야지.”

강우의 앞으로 마도환이 다가왔다.

젠장! 지금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원수의 얼굴을 이런 상황에서 또 봐야 한다니. 물론 마도환은 그가 손강우임을 전혀 모르겠지만 말이다.

“하하, 저는 국가의 미래를 짊어질 영재들에게 관심이 많습니다. 이 학생이야말로 진정한 대한민국의 앞날 아니겠습니까? 병원비뿐만 아니라 앞으로 강우 학생이 영재고에 입학해서 학습에 어려움이 있다면 꼭 도움을 주고 싶습니다.”

마도환의 기름진 멘트에 강우는 눈을 질끈 감았다. 어떻게 처리하지? 이놈을? 하지만 지금 자신은 고등학교 입학 예정인, 그것도 갓 회복한 환자일 뿐이다.

그러니까 그냥 조용히 있는 편이…….

하지만 마지막으로 마도환이 던진 말이 떠오른 순간 강우는 미친 듯이 발작하며 손에 쥔 종이컵을 마도환에게 확 던졌다.

철벅!

물이 마도환의 얼굴에 쏟아지면서 주변이 엉망이 됐다.

“이, 이게 뭐야?”

놀란 마도환이 황당한 표정으로 강우를 노려보는 사이 강우는 계속해서 미친 사람처럼 길길이 날뛰었다.

“으아!”

“우야!”

놀란 어머니가 그를 진정시키며 팔을 붙잡았다.

“서, 선생님, 아이가 아직 제정신이 아니라서…….”

당황한 어머니의 사과에 머쓱해진 마도환은 얼굴이 시뻘게진 상태로 몸을 홱 돌렸다.

* * *

삼 일 후, 강우는 고려 과학영재고(KOSHS) 앞에 서 있었다.

몸이 완전해질 때까지 입원하라는 의사의 말을 뿌리치고 다음 날 바로 퇴원했다. 몸에 별다른 문제가 없다는 것도 있지만, 마도환이 준 병원비로 병원에 머무르고 싶지 않은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서울 외곽에 있는 고려 과학영재고는 영재교육진흥법에 의해 세워진 영재학교로 과학고와 달리 전국에서 우수학생을 선발한다.

엄밀히 분류하면 과학고가 아니지만, 사람들은 과학고와 영재고를 구분하지 못한다. 실제로 교과 과정도 비슷하고 이름도 과학영재고니까.

그래서 고려 과학영재고는 때로는 고려 영재고, 때로는 고려 과학고라고도 불리며 학생들은 그마저 귀찮다고 ‘고곽’이라고 불렀다.

고등학교답지 않은 넓은 부지와 신축 건물에 체육관 겸 강당, 기숙사까지. 확실히 일반 고등학교와는 차별화된 외양이다. 멀리서 보이는, 건물 옥상의 둥근 플라네타리움 돔은 이 학교의 상징이자 트레이드 마크였다.

강우는 바삐 걸음을 옮기는 학생들을 살피며 미소를 머금었다.

오늘은 신입생 예비소집일. 지금은 겨울방학이고 재학생들은 앞으로 2주 뒤가 개학이다. 신입생들은 오늘부터 예비입학기간을 보낸 다음 2주 후인 3월 초에 정식으로 입학한다.

지금 주변에 보이는 학생들은 올해 1학년으로 입학할 꿈나무들이었다. 부모와 같이 온 학생이 절반, 혼자 또는 친구들과 함께 온 학생이 절반이었다.

강우 어머니도 함께 오겠다고 했으나 강우가 만류했다. 바쁘신 어머니는 그가 입원해 있는 동안 일이 밀렸기에 오늘마저 그를 따라올 수 없었다.

시골에서 서울까지는 먼 길이고 중학생이라면 쉽지 않은 여정이지만 전생에서 삼십 대였던 강우에겐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학생들의 얼굴에는 환한 웃음이 가득했다.

“쯧쯧, 이제부터 지옥이 펼쳐질 텐데…….”

과학영재고가 어떤 곳인가. 전국에서 천재라고 소문난 학생들이 모이는 곳이다. 지금까지 이 학생들은 전교 1등을 밥 먹듯이 하며 천재라는 자부심으로 살았지만, 이 학교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자신이 천재가 아닌 범재임을 깨닫게 된다.

어쨌든 이런 충격을 방지하고자 예비입학 기간이 필요했다.

가슴이 뛴다. 천재들과 함께하는 시간이라니!

핸드폰 시계를 보며 발길을 재촉하던 강우는 학교 정문 앞에서 번듯한 카페를 발견했다. 이름마저 과학고 앞이라고 가우스 카페다. 그렇다면 커피를 생략할 수 없다.

정신적인 여유도 필요하고 마침 어머니께서 준 용돈도 있다. 사실 병원에서 깨어난 후로 커피 한잔이 고파서 죽을 지경이기도 했고.

강우는 가우스 카페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신입생이 몰린 관계로 카운터 앞에는 줄이 길었다.

줄을 서 있자니 바로 앞에 선 두 여학생의 대화가 들려왔다.

“오늘 시험 친다고 했지?”

“응, 진단평가.”

“자신 있어?”

“학원에서 대비용 문제집 준 건 다 풀어봤지.”

“그래? 난 아직 못 풀었는데…….”

이야기를 들어보니 학원 출신인 모양이다. 대충 어디인지 감이 왔다.

영재고 입시에서 강남 대치동의 한 유명학원이 전체 입학생의 거의 절반을 점유하고 있다는 사실은 새삼스러운 비밀이 아니었다. 그 학원은 전국에서 뛰어난 중학생을 선점하고 선행학습으로 중무장해서 영재고 입시를 뚫었다.

물론 시골 출신이자 새로운 생을 사는 강우에겐 해당하지 않는 일이다.

강우는 줄을 선 채 두 여학생을 유심히 관찰했다.

‘아!’

한 여학생은 예쁘장하면서도 차갑고 반듯한 얼굴이었다. 어깨너머까지 머리카락이 제법 길게 내려왔다.

얼굴만 봐도 똑똑한 학생이라고 이마에 팍 적혀있었다. 지기 싫어하고 남들과 차별화된 고고한 학과 같은 존재처럼 보였다. 쉽게 다가가기 어려운 분위기였다.

다른 학생은 꽤 귀엽게 생겼다. 단정한 단발에 동그란 은테 안경을 썼는데 공부에 찌들어 있는 얼굴과 달리 눈에서는 반짝반짝 활기가 느껴졌다.

그런데 두 여학생의 대화에서 강우는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오늘 시험을 친다고?’

하기야 뭔 상관인가. 학생들은 고민하겠지만 현재의 강우는 잘 치겠다는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지금은 적응이 우선이니까. 단지 시험시간이 지겨울까 봐 걱정일 뿐.

“차희야, 문제 하나 풀어줄래?”

안경 낀, 귀엽게 생긴 여학생이 가방을 내리고 문제집을 꺼냈다. 학원 이름이 적힌 두툼한 과학 문제집이었다.

강우도 저절로 문제집으로 시선이 향했다.

“내가 어제 이 문제에 콱 막혀서…….”

차가운 인상의 여학생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문제를 풀지 못해서가 아니라 풀어주기 싫다는 표정이다.

“수아야, 여기까지 와서 공부하려고?”

“원래 카페에서 공부가 잘되는 법이야.”

“……그렇긴 한데.”

“아직 시간 있잖아?”

두 여학생이 커피를 받아 테이블로 옮겨갔다. 그다음 차례인 강우는 호주머니에서 돈을 꺼냈다.

“아메리카노 하나 주세요.”

겨울이니 따뜻한 커피다.

커피를 받아들고 강우는 잠시 고민했다. 바로 학교로 올라갈까 아니면 카페에서 쉬다가 갈까?

그런데 마침 창가에 빈자리가 보였다. 마침 방금 앞에 있던 그 두 여학생의 옆자리였다.

강우는 자리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면서 느긋하게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역시 아침 커피는 진리다. 갓 중학교를 졸업한 녀석이 폼을 재는 모습이 우습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폼생폼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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