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과학고 천재-3화 (3/325)

제03화 과학고? (3)

한잔 쭉 들이켠 커피의 맛이 괜찮았다.

강우는 커피를 마시면서 며칠 간의 일을 돌이켜보았다.

처음에는 어색하고 적응이 힘들었으나 모든 것을 포기하니 수월했다. 어차피 그가 강우가 아닌 손강우라고 주장해도 믿을 사람이 없다. 그렇다면 앞으로는 이대로, 즉 고등학생 강우로 살아가야 한다.

그리고 다시 만난 마도환. 마음 같아서는 당장 얼굴을 한 대 치고 싶었지만 마도환에 비하면 지금의 그는 너무 미약한 존재였다. 사회적인 지위 면에서는 비교가 불가능했다. 그렇기에 복수를 먼 훗날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언젠가는 이 나라 최고의 석학으로 올라서서 녀석의 만행을 모두 까발려 줄 것이다. 복수를 위해 그는 이 나라, 아니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과학자가 되어야 한다. 어린 강우로 빙의한 그가 다시 과학고에 다니게 되었으니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그리고 다른 과목은 몰라도 적어도 물리학에서만큼은 이 나라 최고가 될 자신이 있었다. 지금은 성공을 위해 노력하고, 복수는 일단 접어둘 생각이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다시 사는 이번 생에는 더 먼 곳까지 날아봐야겠다고 결심했다. 손강우를 뛰어넘어 전 세계에 이름을 떨치는 핵융합 물리학자로 거듭날 생각이었다.

날아보자! 더 멀리!

그가 내린 결론이자 삶의 목표였다.

그 전에 먼저, 성공하려면 일단 고등학교 생활에 잘 적응해야 한다.

그가 커피를 마시며 생각을 정리하는데, 옆자리에 앉은 두 여학생의 대화가 들려왔다.

“이건 말이야, 이렇게 공식을 적용하면…….”

차갑게 생긴 여학생이 샤프를 들고 문제집 위에 쓱쓱 답을 쓰기 시작했다.

“꼭 공식을 써야 해?”

안경 낀, 귀여운 여학생의 질문에 그녀가 눈을 찌푸리며 고민에 잠겼다.

학생들은 저런 토론과정을 거치면서 배우고 성장한다. 문제를 놓고 함께 고민하며 답을 찾는 광경이 보기 좋았다. 한때 강우도 대학원에서 저렇게 머리를 싸매며 공부했었는데.

지금 고민과 토론을 거듭하는 두 학생을 보니 뭔가 뜨거운 것이 속에서 치밀어올랐다. 오래전 그에게서 꺼져버린 풋풋한 열정이 보였다.

한때는 그도 머리를 싸매고 문제집을 훑으며 공부에 매진하던 때가 있었다. 그때를 생각하니 처음으로 고등학교 생활을 다시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시험해보고 싶었다.

요즘 학생들은 어떻게 공부할까? 얼마나 우수할까? 앞으로 학생들과 자주 만나겠지만 당장 호기심을 주체하기 어려웠다.

‘그래, 궁금한 건 못 참지.’

강우는 슬그머니 몸을 일으켜 두 여학생에게 다가갔다. 그를 힐끔 본 두 여학생이 신경 쓰지 않고 다시 문제에 매달렸다.

두 학생이 고민하는 문제는 물리였다. 그가 모를 수 없는 분야였다.

그의 관심을 눈치챈 차가운 인상의 여학생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걸었다.

“누구세요? 신입생?”

“그렇긴 한데…….”

“물리 잘해요?”

“관심만 많아요.”

강우가 고개를 끄덕이자 여학생이 그의 눈앞으로 문제집을 내밀었다.

“그럼 이 문제 풀어봤어?”

여학생은 조금의 거리낌도 없었다. 어느새 말마저 놓고 있었다.

강우도 두 사람에게 장단을 맞추어주기로 했다. 어차피 학교에서 친구를 사귀어야 할 처지였고 이 학생들도 그 후보가 될 수 있으니까.

문제를 확인한 강우의 표정이 단번에 찌푸려졌다.

‘이거 왜 이리 어려워?’

미끄럼틀 위에서 질량이 같은, 속이 찬 원통과 속이 빈 원통을 굴리는 문제다.

위치에너지를 운동에너지와 회전운동에너지로 변환하는 문제이고 이 문제를 풀려면 관성모멘트 개념을 이해해야 한다.

다만 관성모멘트는 중학교는커녕 고등학교 교과 과정 밖이다. 답이야 공식에 넣으면 바로 나오지만, 과연 학생들이 그 개념을 제대로 이해할까? 이건 완전히 학원 입시 교육의 폐해였다.

“역시 선행 학원은 어쩔 수 없나…….”

“응? 뭔 말이야?”

두 여학생이 강우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강우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부터 이 두 학생이 얼마나 똑똑한지 확인해봐야겠다.

“학원에서 준 문제집이야?”

“요즘에는 다 학원 다니잖아. 넌 안 다니니?”

“흐음, 잘 풀었는데?”

“그야 공식에 대입하면…….”

“그럼 이 공식이 의미하는 바는 알아?”

차가운 인상의 여학생이 그 물음에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가 푼 답은 정확하다. 하지만 그녀는 그 공식을 전혀 설명하지 못했다.

관성모멘트라는 개념이 어렵기도 하고, 그 공식을 유도하려면 적분이 필요하기에 쉽지 않다.

그녀는 그저 알고 있는 공식에 대입해서 답을 구했을 뿐, 그걸 진짜로 안다고 할 수 없다. 시험에서는 점수를 받을지라도 그 내용을 모르는 것이다.

“관성모멘트가 뭔지 알아?”

“대충은……. 넌 알아?”

목소리에 자신감이 없다. 아마 학원에서 간략하게 다루기는 했겠지. 과학고 입시를 준비하면서 한 번쯤 훑었을 테니까. 하지만 기본 개념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공식만 암기하는 이런 방식은 오히려 공부를 어렵게 한다.

사실 오늘 진단평가에서 이런 문제는 출제되지 않는다. 오로지 선행에 얽매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강우는 간략한 설명을 시작했다.

의외로 쉬운 강우의 설명에 두 여학생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 잘 알잖아?”

두 여학생이 고개를 끄덕이며 되물었다. 단번에 알아듣는 것을 보면 확실히 똑똑하긴 하다.

“그런데…… 학원에서 이런 것도 가르쳐? 무작정 외워서는 도움이 되지 않아.”

강우의 반응에 차가운 인상의 여학생이 입술을 깨물고 반박했다.

“학원에서는 다르게 이야기하던데? 모르면 일단 공식부터 외우고 풀다 보면 저절로 알게 된다고.”

“물론 그 말도 맞아. 모든 문제를 일일이 공식까지 유도하면서 풀 수는 없으니까. 또 시험을 잘 치려면 때로는 암기가 필요하지.”

“너, 공부 잘해?”

차가운 인상의 여학생이 툴툴대며 경계하는 기색을 띠었다.

“응? 딱히 그런 건 아닌데…….”

그러자 여학생이 미간을 확 구기며 다시 물었다.

“이름이 뭐야?”

“나? 강우. 넌?”

“난 손차희. 이쪽은 윤수아.”

머리가 긴, 차가운 인상의 여학생이 손차희고 단발머리에 안경 낀, 귀엽게 생긴 여학생은 윤수아였다.

강우가 두 여학생의 이름을 기억하려는 순간이었다. 두 여학생의 머리 위에 흐릿한 글씨가 보였다. 순간 강우는 눈을 비비며 멍하니 허공을 바라봤다.

‘헉! 이게 뭐야?’

손차희의 머리 위에는…….

- 손차희, 수학 B, 물리 A, 화학 A, 생물 B, 지구과학 B.

윤수아의 머리 위에는,

- 윤수아, 수학 C, 물리 B, 화학 B, 생물 B, 지구과학 C.

마치 팻말처럼 글자가 걸려 있었다.

“왜? 이상한 거 있어?”

멍하니 쳐다보는 눈길에 손차희가 기분 나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두 여학생의 머리 위에서 보이던 글씨가 서서히 사라졌다. 하지만 고개를 갸웃거리던 강우가 다시 그 장면을 떠올리며 손차희를 빤히 쳐다보자 글씨가 뚜렷해졌다.

사실 글씨가 왜 보이는지보다 저 글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궁금했다.

‘손차희의 물리가 A 등급이라고? A라면 거의 최상 아닌가?’

그런데 지금 손차희의 물리 능력은 절대 A라고 할 수 없다. 대학 일반물리 과정에서 배우는 관성모멘트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니까.

강우가 혼자만의 고민에 잠겼을 때였다. 한 남학생이 그들의 테이블로 다가왔다. 훤칠한 키에 오만한 표정이 어린 남학생이었다. 그 학생은 세상을 내려다보며 제멋에 사는, 거들먹거리는 태도로 일회용 컵에 담긴 주스를 빨대로 쪽쪽 빨고 있었다.

“이야! 차희! 오랜만!”

“어? 이민찬? 여기 웬일이야?”

“웬 녀석이 찝쩍대나 보지? 내가 구해줄까?”

주스를 한 모금 삼킨 이민찬이 강우를 힐끔 살폈다. 표정을 보면 반농담임을 알 수 있었다. 졸지에 예쁜 여학생에게 침 흘리는 녀석으로 오인당한 강우는 헛웃음을 들이켰다.

“그게 아냐. 모르는 문제가 있어서…….”

손차희가 재빨리 문제집을 덮을 때 이민찬이 책을 가로챘다.

그사이 강우는 갑자기 등장한 이민찬에게 정신이 팔려있었다.

- 이민찬, 수학 A, 물리 A, 화학 B, 생물 A, 지구과학 A

녀석의 머리 위에도 글씨가 똑똑히 보였다.

화려하긴 하다. 이민찬은 손차희보다 조금 더 우수했다. 이 숫자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지만, 무언가 의미가 있다면 이민찬이 손차희보다 뛰어나다고 짐작할 수 있었다.

“큭큭, 차희도 한물갔네. 이런 녀석한테 물어보다니!”

손차희와 윤수아의 얼굴이 팍 일그러졌다. 문제집을 쓱 살핀 이민찬이 혀를 찼다.

“우와, 이걸 다 풀어봤어? 작정하고 공부했네? 흐음, 이 문제야?”

“아냐.”

윤수아가 문제집을 빼앗으려고 옥신각신했다.

“이런 거는 안 나와. 이거 교과 과정 밖이잖아? 굳이 출제한다면 그 개념만 묻겠지.”

손차희의 표정이 더욱 일그러졌다. 이민찬이 으스대며 피식 웃었다.

“시험에 나오면 난 이렇게 대답할 거야. 두 원통이 똑같이 내려온다고. 갈릴레이가 피사의 사탑 실험에서 증명했잖아?”

“정답이 아닌데?”

“중학교 수준에서는 마찰력을 고려하지 않거든. 마찰력 없으면 원기둥이 구르지 않으니까 관성모멘트고 뭐고 다 필요 없지. 하하!”

손차희는 반박하지 못했다. 문제 의도를 교묘히 피해간 것을 보니 이민찬은 아마도 관성모멘트를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안다는 거야? 모른다는 거야?”

“그건 중요하지 않다니까.”

“난 중요하거든! 모르는 것 같은데 내가 설명해줘?”

손차희가 눈을 부라리며 방금 들었던 개념을 쭉 읊었다. 이민찬의 눈빛이 확 흔들렸다.

“우와! 정말 열심히 했잖아? 나를 이기고 싶어서?”

“야! 내가 널 왜 이겨?”

“낄낄, 빼기는.”

이민찬이 주스를 빨대로 쭉쭉 빨면서 카페를 떠났다.

윤수아가 씩씩대는 손차희에게 넌지시 물었다.

“하! 밥맛이네. 민찬이가 수석 입학이지?”

“그럴걸?”

“그럼 네가 이등이야?”

“그렇다고 들었어. 앞으로는 내가 꼭 이길 거야!”

손차희의 표정이 매우 어두웠다.

강우는 이 학생들이 모두 같은 학원 출신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눈앞의 여학생 손차희가 입학시험에서 경쟁자에게 밀린 상황인 것 같았다.

뭔가 위로를 해줘야 할 것 같은데 이런 일에 익숙지 않은 강우는 할 말이 없었다.

앞에 놓인 커피를 신경질적으로 벌컥 들이키던 손차희의 화풀이가 강우에게 옮겨졌다.

“그런데 넌 뭐야? 내가 차석 입학인데 어떻게 나보다 더 잘 풀어?”

요즘 애들은 사납다. 강우는 할 말이 없어 손바닥만 내보였다.

* * *

“하아!”

허리를 펴고 천장을 한번 본 다음 다시 작업을 시작했다.

넓은 강당에 백여 개의 간이의자가 줄을 맞춰 깔렸다.

“학생! 거기 줄 틀렸어.”

저쪽에서 어떤 선생님이 강우의 앞에 놓인 의자를 손가락으로 지적했다.

“아예, 압니다, 알아요.”

신경질을 부릴 수도 없고, 도망칠 수도 없고. 오늘은 재수가 오지게 없는 날인가 보다.

강우는 지금 체육관 겸 강당에서 열심히 의자를 줄 맞추고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하면, 카페에서 나와서 느지막이 강당으로 들어오자마자 어떤 선생님에게 잡히고 말았다.

“거기 학생! 손 좀 빌리자.”

“예?”

“의자가 필요하니까 의자 가져와라.”

그렇게 강우는 주변 몇몇 학생과 함께 끌려와서 간이의자를 나르고 줄을 맞추게 되었다.

원래 체육관으로 사용하는 강당이었기에 지하 창고에서 간이의자를 꺼내와야 했다. 강우는 다시 허리를 쭉 펴고 천장을 바라봤다. 옹달샘에서 물을 마시는 토끼 신세가 된 것 같았다.

정작 그와 같이 들어온 두 여학생은 저쪽에서 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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