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과학고 천재-4화 (4/325)

제04화 예비 입학일 (1)

“지금 가지고 온 의자가 총 몇 개지?”

“그, 그게…… 딱 백 개인데요.”

“신입생이 백이십사 명이니 스물네 개가 부족해. 더 가져와.”

선생님의 명령에 강우와 남학생들은 찍소리도 못하고 조용히 강당 지하로 내려갔다.

강우와 학생들은 한 손에 간이의자 세 개씩 모두 여섯 개를 팔에 걸고 다시 강당으로 올라오면서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하아, 죽겠네.”

첫날부터 이게 무슨 고생인지.

“나이가 깡패야. 아! 계급이 깡팬가…….”

이런 일은 대학교 입학과 동시에 졸업했는데……. 아, 앞으로 고생길이 훤히 보였다.

물론 그보다 더 고생하는 학생이 있긴 했다. 바로 앞에서 그보다 두 개나 많은 여덟 개의 의자를 한꺼번에 나르는 체격 좋은 학생.

펑퍼짐하고 인상 좋은 이 학생 덕분에 그나마 고생이 줄었다.

“힘내라, 힘!”

그때까지 강우는 이 학생이 자신과 한 반이 되리란 사실을 꿈에도 몰랐다.

* * *

“신입생 여러분, 고려 과학영재고의 입학을 환영합니다. 이 학교가 어떤 곳인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앞으로 이 학교를 빛낼 영재이자 국가의 미래를 짊어질 인재로서…….”

단상 위에서 나이가 제법 든 중년의 선생님이 학교를 소개하고 있다. 그 선생님은 자신을 일학년 학년 주임이자 물리 부장인 김윤택이라고 밝혔다.

단상 아래 열을 맞추고 앉은 신입생들의 눈빛이 초롱초롱했다. 강우는 신입생을 위해 마련한 의자에 앉아 조용히 환영사를 들었다. 국가를 빛낼 인재라는 말에 조금은 심기가 뒤틀리면서도 한편으로는 뿌듯했다.

그런데 김윤택이라고 이름을 듣는 순간에도 선생님의 머리 위에는 아무런 글자가 보이지 않았다. 학생들은 상대의 이름을 알면 정보가 떴었는데 선생님에게는 소용없나 보다.

‘그 등급, 학생에게만 적용되는 거였어?’

여전히 허공에 글자가 나타나는 시스템의 원리를 잘 모르겠다.

“무엇보다 여러분은 이 학교에 들어온 순간부터 새로운 환경에 놓이게 됩니다. 안타깝게도 각 중학교에서 1등만 모인 이곳에서도 우열은 정해집니다. 여러분 가운데 누구는 계속 1등을 하지만 누구는 꼴찌를 하게 되겠죠. 그 때문에 절반 이상의 학생들이 학교 적응을 힘들어합니다.”

긴장한 학생들의 얼굴에 먹구름이 드리워졌다. 그 꼴찌가 자신이 될 수 있다는 두려움이 엄습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학교에 적응할 수 있도록 예비입학 기간을 두기로 했습니다. 앞으로 2주 동안 여러분은 입학 후의 학교생활을 맛보기로 경험하게 됩니다. 중학교 때와 달리 교실을 옮겨 다니면서 수업을 듣게 되고 저녁에는 기숙사 생활을 할 겁니다. 토론 형식의 수업과 과학고 특유의 시험까지.”

시험 이야기가 나오자 학생들이 안절부절못했다.

“적응이 힘들면 얼른 담당 선생님께 도움을 요청하길 바랍니다. 그래도 견디기 힘들다면 일반고로 전학을 선택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때로는 과학고의 꼴찌보다 일반고의 일등이 더 나을 수 있으니까 심사숙고해서 생각하길 바랍니다.”

실제로 이런 특수목적고에서는 적응하지 못하고 자퇴하거나 전학 가는 학생이 다수 있었다. 적응할 수 없다면 전학은 빠를수록 좋기에 그런 학생에게도 예비입학 기간이 큰 도움이 되어주었다.

앞으로 지켜야 할 사항을 주절주절 늘어놓던 김윤택의 잔소리가 겨우 끝을 맺었다.

“자, 그러면 지금부터 일학년을 맡아줄 선생님을 소개하겠습니다. 그리고, 지금부터 말을 편하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자, 다시 나를 소개하지. 나는 한국대 물리교육과를 졸업한 김윤택이다. 일학년 학년 주임 겸 물리학 교과부장을 맡고 있다.”

선생님의 소개가 끝나자 학생들이 요란하게 박수로 환영했다. 한국대란 말에 학생들의 눈빛이 초롱초롱해졌다.

김윤택은 이어 선생님들을 소개했다. 이름이 호명될 때마다 일학년 담임을 맡은 선생님들이 차례로 단상에 올랐다. 역시 과학고라 그런지 선생님들의 이력이 하나 같이 범상치 않았다.

강우는 선생님 이름을 외우지 않았다. 앞으로 천천히 알아가면 되니까.

다른 학생에게는 뛰어난 선생님이겠지만 강우는 전혀 감흥이 없었다. 한국대에서 학부부터 박사과정까지 졸업한 그에게 한국대란 타이틀은 그냥 평범하다는 말과 다르지 않았으니까.

선생님 소개를 끝낸 김윤택이 학생들에게 알렸다.

“자, 지금부터 여러분들은 진단 고사를 치른다. 배정된 강의실로 모두 이동해라! 선생님들께선 맡은 학생들을 인솔해 주시고…….”

학생들이 배정된 강의실을 찾느라 벽보 앞에 몰려들었을 때 강우는 느지막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첫날부터 시험이다. 설마 새로운 삶을 시험으로 도배하는 것은 아닌가 걱정이 되었다.

* * *

강우가 도착한 곳은 물리 강의실이었다. 그는 임시 3반이었고, 그를 포함해 임시 3반 학생은 모두 열여섯 명이었다.

강의실을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같은 3반이 된 학생들을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도착해 있었다. 그런데 반에 낯익은 학생이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아침에 카페에서 만났던 그 두 여학생이 앞쪽에 앉아 있었다. 의외로 인연이 있는 모양이었다. 8개 반이니 쉽지 않은 확률인데.

진단 고사에 별 의미를 두지 않았기에 강우는 가장 뒤쪽에 앉았다.

잠시 후 서류 뭉치를 든 여선생님이 나타났다. 강당에서 인사할 때도 유난히 눈에 뜨이던 선생님이었다.

그녀를 보는 순간 강우는 눈을 번쩍 떴다.

“3반의 임시담임을 맡은 차도도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앞으로 일학년의 물리 수업을 맡을 거예요. 여러분을 만나게 되어 반가워요.”

막 대학을 졸업한 듯한 꽤 젊은 선생님이었다.

차도도는 이름처럼 차갑고 도도한 도시녀를 연상케 했다. 피부가 하얗고 눈매가 고왔다. 그리고 커다란 눈에 반듯한 코와 부드러운 턱선이 전형적인 미인형이었다. 꽤 큰 키와 정장을 입은 늘씬한 몸매에 넋을 놓고 있자니 옆에서 쑥덕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국대 물리교육과 나오셨대.”

“우와, 탤런트 저리 가라다.”

“고곽 여신이래.”

강우도 놀라는 중이었다. 방송국에서 마주칠 법한 미녀가 담임이란다.

지금은 비록 고등학생이지만 손강우일 적에도 여러 여자를 보았었다. 하지만 그 시간을 모두 되새겨봐도 이만큼 아름다운 사람을 본 기억이 없다.

그런데 저런 미인이 담임이라니! 갑자기 학교의 인상이 확 바뀌고 의욕이 솟구친다. 역시 본능은 어쩔 수 없나 보다.

이번에도 차도도의 머리 위에는 아무 글자도 보이지 않았다. 역시 학생에게만 적용되는 시스템인 모양이었다.

차도도가 교탁을 벗어나 미소를 지은 채 강의실을 한 바퀴 빙 돌았다. 마치 런웨이 위의 모델 같은 분위기에 학생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이끌렸다.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별문제가 없음을 확인하던 차도도는 시험지를 꺼내는 순간부터 차가운 마녀로 바뀌었다.

“시험시간은 세 시간, 수학 한 시간에 과학 두 시간이에요. 객관식, 주관식이 섞여 있고 수학시험 후 10분간 휴식이 있어요. 자, 그럼 수학부터. 모두 파이팅!”

주의사항을 알린 차도도가 시험지와 답지를 배포했다.

시험이 시작되고 학생들의 시험지를 넘기는 소리와 펜 소리가 귓전을 자극했다.

강우는 문제지를 펼쳐 놓고 차도도의 눈치를 봤다. 차도도는 강의실 앞 단상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특별히 시험감독에 신경 쓰는 자세는 아니었다.

‘대충 풀면 되겠네.’

문제지를 쓱 훑어보니 평범한 고등학교 수학 문제가 절반이고, 교과 과정과 무관한, 사고력을 요하는 수학 문제가 절반이다. 객관식과 주관식이 고루 섞여 있었다.

‘이거…… 왜 이리 어려워?’

시간이 충분하게 주어진다면 못 풀 것도 없겠지만 지금 당장 강우가 풀기에는 만만찮다 싶었다.

미적분 문제는 쉽게 풀어도 일부 분야는 고등학교 졸업 후 한 번도 접하지 않았다. 게다가 사고력 문제는 이런 유형의 문제에 익숙하지 않은 그가 짧은 시간에 풀 수준이 아니었다.

당황한 것도 잠시, 강우는 처음 생각한 것처럼 그냥 편하게 치기로 했다.

이 진단 고사가 향후 진로에 큰 영향을 미친다면 어떻게든 잘 쳐보겠지만 기껏해야 반편성을 위해 학생들의 수준을 평가하는 시험일 뿐이다.

“아, 귀찮다…….”

물론 문제를 풀지 않는다고 딱히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오늘은 예술가가 되어볼까.’

강우는 OMR 답지에 S자 형의 지렁이를 그렸다. 제법 멋있게 그려졌다.

‘오! 예!’

그렇게 그림을 그려놓고 강우는 책상에 엎어져 잠이 들었다.

* * *

주어진 한 시간이 금방 지나갔다.

차도도는 읽던 책을 덮고 학생들을 살폈다. 강의실이 넓은 데다 학생 수가 적었기에 간격이 넓었다. 당연히 부정행위가 끼어들 여지는 없었다. 그렇기에 그녀도 편하게 시험을 감독했다.

학생들에게는 이 시험으로 반을 편성한다고 했지만, 실상은 학생들의 수준을 확인하는 용도일 뿐이었다.

입학 때 치렀던 시험으로 학생들의 수준을 확인하기엔 제약이 따른다. 그 시험은 문제가 대외적으로 공개되는 데다 조금만 어렵게 출제하면 사교육을 부추긴다며 언론의 십자포화를 맞으니까. 반면 이 시험은 자유롭다. 출제 범위도 없고 형식도 없다. 그래서 학생들의 수준을 보다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

차도도의 시선이 한 여학생에게로 향했다. 손차희였다.

올해 신입생은 다른 해에 비해 우수하다는 의견이 많았다. 그 중심에 수석으로 입학한 이민찬과 차석인 손차희가 있었다.

두 사람은 수학과 과학 전 과목에서 두루 두각을 드러냈다. 그래서 차도도는 손차희를 자신이 맡은 반으로 기를 쓰고 데려왔다. 수석이 아니라 아쉽지만, 차차 더 성장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오늘 손차희를 보니 어딘지 모르게 분위기가 자신과 닮아 더욱 정겹게 느껴졌다.

‘반드시 손차희를 일등으로 키워야지.’

수석인 이민찬을 맡았다고 뻐기던 주임 선생님이 떠오르자 차도도는 고개를 저었다.

“자, 시간 끝났어요! 답지를 앞에 두고 머리에 손!”

차도도는 학생들 사이를 돌아다니면서 답지를 회수했다.

객관식 문제의 정답은 몰라도, 주관식 답지에 적힌 내용과 양을 보면 대충 짐작이 간다.

손차희의 답지는 예상대로 빽빽했다. 빈칸도 없다. 만족할 성적을 거둘 것 같았다. 기분이 좋아진 차도도는 답지를 회수하며 살피기를 계속했다.

일부는 많이 풀었고 일부는 절반을 풀었다. 잘 풀었는지 안색이 밝은 학생과, 어려웠다고 울상인 학생이 섞여 있었다.

마지막으로 가장 뒤쪽에서 답지를 거둔 차도도의 표정이 확 일그러졌다.

주관식 답 칸은 텅텅 비었고 객관식 칸에는…… 예술적인 그림을 그려놓았다.

‘이 자식은 뭐야? 강우?’

답지에 적힌 이름을 확인하고 학생의 얼굴을 힐끔 봤다.

꽤 멀끔하게 생겼다. 아니, 잘생겼다. 샤프하고 날카로운 미남형은 아니지만 점수를 꽤 줄 수 있는 호남형이다.

그런데 외모는 괜찮은 애가 답지는 왜 이 모양이지? 장난치나?

차도도는 미간을 찌푸리며 강우란 이름을 머릿속에서 열심히 뒤적였다. 안 그래도 반이 결정되었을 때, 담당하는 학생들의 이름이랑 정보를 알아보기 위해 입학지원서를 꼼꼼히 살폈던 것이다.

강우, 강우라…….

“아!”

기억났다. 영재고에선 흔치 않은 사회배려자 전형으로 들어온 학생이었다. 시골의 무슨 중학교였는데…….

그리 인상적인 추천서는 아니었었다. 그리고 입학시험 성적도 바닥을 기었다. 사교육으로 선행한 흔적은 없었다.

물론 선행하지 않았어도 문제는 없다. 입학 후에 열심히 하면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었다. 특히 맹목적인 선행은 학생의 창의력을 오히려 갉아먹으니까.

하지만 시험은 장난이 아닌데…….

답지를 회수한 차도도는 강우를 매서운 눈초리로 노려봤다.

입학성적이 낮다고 자질 없는 학생이라 낙인찍는다면 선생님이 될 자질이 없다. 적어도 그녀는 이런 학생을 잘 보듬으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의욕 없는 학생이 앞으로 이 학교에서 어떻게 적응할지 걱정이었다. 노력하지 않는 자는 성공할 수 없다고 믿는 그녀였다.

아무리 옆에서 도와주려 해도 당사자가 의욕이 없다면 무소용 아닌가. 그녀는 강우를 요주의 학생이자 상담이 필요한 학생으로 머릿속에 등록했다.

정작 강우는 차도도의 생각을 짐작하지 못하고 그녀를 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내 얼굴에 뭐가 묻었나?’

어쨌든 미녀 선생님이 관심을 주니 나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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