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07화 예비 입학일 (4)
한 녀석이 손을 들고 뻔뻔하게 질문했다.
손차희가 일그러졌던 표정을 순식간에 펴고는 바로 대답했다.
“당연히 있어. 김다니엘!”
“우우!”
남학생들이 야유를 퍼붓자 손차희는 재빨리 자기소개를 다음 차례로 넘겼다.
다음 소개 순서는 강우였다.
“나는 강우. 이름이 외자야. 질문 없지?”
강우는 만사가 귀찮은 듯 일어나서 이름만 말하고는 주위를 휙휙 둘러봤다. 질문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표정에 아무도 질문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기선을 제압해서 귀찮음을 방지했다고 희희낙락하는 찰나 손차희가 손을 들었다. 강우가 다소 삐딱한 표정으로 노려보는데도 손차희는 거침없이 입을 열었다.
“오늘 시험 잘 봤어?”
이런 자리에서 절대 나오지 않을 법한 질문이 튀어나오자 학생들의 표정이 뜨악하게 변했다. 옆에 앉은 윤수아가 손차희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완전 못 봤는데?”
그러나 강우는 당연하다는 태도로 대답했다.
“어려웠어?”
“아는 게 없어서……?”
강우의 대답에 손차희의 눈이 찌푸려지며 다시 질문을 퍼부었다.
“학원 안 다녔어?”
“학원? 다니려 했는데…… 못 다녔지.”
그 순간 강의실 내부에 싸한 침묵이 맴돌았다.
영재고에 입학한 학생들은 대부분 초등학교 때부터 선행으로 중무장해서 험난한 입시를 통과했다. 선행 없이 영재고 입시를 통과하는 경우는 사실상 없다고 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지금은 영재고 선생님들도 학생들이 적어도 고등학교 과정까지는 학습하고 입학하는 것을 당연시하고 있었다.
지금 입학생 가운데 절반이 대학교 일반물리와 일반화학까지 공부했다. 그렇기에 학원을 다니지 않았다는 대답에 모두가 놀랐다.
예상 밖의 답변에 손차희가 할 말을 잃고 버벅대다가 간신히 다음 질문을 던졌다.
“오늘 물리 마지막 문제 풀었어?”
“아, 그거? 마침 며칠 전에 심심해서 살핀 책에 있던 문제였거든. 난 주제별로 재미있는 것만 이리저리 찾아봐. 네가 김다니엘 덕질하듯이.”
손차희는 강우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다만 저 녀석이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고, 앞에서 그녀가 했던 소개를 비꼬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하게 알아챘다.
“그렇게 풀 수준의 문제가…….”
“덕후끼리는 통하잖아?”
“그만. 다음으로 넘어가죠.”
질문이 길어지고 과격해지는 느낌이 들자 차도도가 재빨리 막았다.
손차희는 강우에게서 불만 섞인 시선을 떼지 않았다. 하지만 강우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조용히 자리에 앉아 혼자만의 명상에 빠졌다.
우당탕!
의자가 넘어지는 소란과 함께 다음 순서로 지명된, 체구가 크고 푸짐한 학생이 일어났다. 학생은 쑥스러운 듯 급히 의자를 바로 세우고 머리를 긁적였다.
킥킥대는 웃음소리에 눈을 뜬 강우에게 남학생이 왠지 눈에 익었다. 오늘 강당에서 의자를 나르느라 함께 고생했던 동료다.
녀석이 길게 한숨을 내뱉으며 소개를 시작했다.
“하아……. 제 이름은 최대우이고, 저는 울릉중앙중학교를 나왔습니다.”
동지애를 느끼는 강우와 달리 강의실에는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울릉도 출신이라니? 전국 단위로 선발하는 영재고라지만 울릉도에서 온 학생이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했다.
한편 강우도 무척 놀라고 있었다. 최대우의 머리 위에서 빛나는, 처음 보는 글자 때문이었다.
- 최대우, 수학 A, 물리 S, 화학 C, 생물 C, 지구과학 S.
S가 떴다. A가 최고 등급이 아니었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무려 두 과목에서다.
‘이 자식 대체 뭐야?’
강우는 황당한 심정을 느끼며 글자를 다시 확인했다. 역시 S가 분명했다.
‘물리와 지구과학 천재인가?’
지구과학 S의 정체는 어렵지 않게 추측 가능했다.
지구과학은 하나의 과목이라기보다 지질, 대기, 해양, 천문, 네 분야를 모아 놓은 과목이다. 이 넷은 사실상 전혀 연관성이 없다. 물리와 같은 등급이라면 최대우는 아마 물리학의 사촌인 천문학에서 탁월한 재능이 있을 것이다.
강우는 최대우의 S를 눈에 확실히 박아 넣었다.
“울릉도에도 중학교가 있어?”
“하아, 사람 사는 곳이니 당연히 있어.”
“혹시 방학 때 놀러 가면 재워줄 거야?”
“당연하지.”
“와아! 놀러 가자!”
질문을 주고받으며 꿈에 부푼 학생들이 환하게 웃었다.
이번에도 손차희가 질문을 시작했다.
“선행했어?”
모두가 그 질문에 관심을 가졌다.
선행하지 않은 학생이 섞여 있으면 아무래도 곤란한 점이 있다. 수업 진도를 맞추기 쉽지 않았다. 선행하지 않은 한두 학생 때문에 전반적으로 진도가 느려지니까. 그런 학생들은 적응이 더디거나 적응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울릉도에 학원은 있어?”
최대우의 답변이 늦어지자 손차희가 연달아 압박했다.
그러자 최대우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하아, 울릉도에도 당연히 학원이 있어. 하지만 대치동의 유명한 수학과학 학원을 떠올린다면 없는 거나 마찬가지야. 으음, 질문의 요지는 내가 선행을 했느냐 하는 거지? 솔직히 거의 하지 못했어. 아, 가르쳐 주는 사람도 없었고.”
“말 시작할 때…… 왜 자꾸 한숨 쉬어? 한숨 좀 뺄 수 없어?”
“하아? 하아! 노력은 해보겠지만…….”
“푸하하!”
학생들이 최대우를 별종을 보듯 대했고, 손차희는 안색이 어두워졌다. 반에 선행하지 않은 학생이 무려 둘씩이나 있으니 앞날이 걱정되어서였다. 그녀는 다른 학생 때문에 진도가 느려져 자신이 피해 보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 사이 신이 나서 울릉도에 관해서 열심히 질문하는 학생들에게 최대우는 연신 한숨을 곁들이며 대답했다.
최대우는 체구만큼이나 후덕했다. 겉모습만 보면 영재라고 전혀 생각할 수 없을 미련한 곰탱이 같았다. 하지만 성격은 무척 좋아 보였다.
이어서 다음 학생의 소개가 계속됐다. 그때마다 강우는 학생들의 머리에 나타난 글자를 확인했으나 S급은커녕 A급도 발견하기 어려웠다.
학생들 소개가 끝나자 차도도가 박수를 쳐서 학생들의 이목을 끌어모았다.
“자, 모두 잘 들었죠? 그럼 지금부터 얼마나 이름을 외웠는지 테스트해볼까요?”
“예?”
기습이다. 강우는 얼이 빠진 표정으로 주위를 살폈다.
사실 머리가 좋다는 것과 기억력이 좋다는 것은 동의어가 아니다. 천재나 영재일지라도 기억력이 형편없을 수 있다. 서로 친해지라고 이름 암기 게임을 유도하는 차도도를 이해하긴 하지만…….
차도도가 주위를 쓱 훑어보고는 손차희를 제일 먼저 지명했다.
“차희야, 넌 다 기억하지?”
“예.”
“그럼 네가 먼저 학생들의 이름을 말해보렴. 파이팅!”
손차희에게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곳에 있는, 그녀를 제외한 열다섯 명 가운데 같은 학원생만 절반이다. 그들의 이름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나머지 학생의 이름을 외우기는 쉬웠다. 특히 그녀는 암기에 강했다.
손차희는 조금도 머뭇거림 없이 한 명씩 정확하게 이름을 말했다.
“우와, 그걸 어떻게 다 외웠지?”
학생들이 웅성거리며 그녀를 외계인 보듯 했다.
그런 탄성에 손차희는 기분이 좋아지는 것을 느꼈다. 앞으로 3년 동안, 계속 다른 학생들의 찬사를 받으며 앞서가고 싶었다.
“자, 그럼 이번에 도전할 사람……?”
차도도가 다음 지원자를 고르고 있을 때 손차희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이번에는 선생님이 해보세요. 선생님? 파이팅!”
뜻밖의 요구에 차도도는 손차희를 빤히 쳐다보다가 미소를 지었다.
“그럴까?”
차도도는 내심 손차희를 맹랑하다고 여기면서도 기꺼이 도전을 받아줬다. 그러면서 역시 손차희와 자신의 성향이 비슷하다는 것을 느꼈다.
열여섯 학생의 이름을 단번에 외우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그녀는 이런 상황을 예상하고 미리 대비해두었다. 반 편성된 명단을 받자마자 학생들의 생활기록부를 보면서 이름을 외워뒀다.
차도도 또한 한 명도 틀리지 않고 이름을 정확히 호명하자 학생들이 환호했다.
“우왕! 선생님 천재다!”
학생들의 수군거림이 잦아든 후 차도도가 강우를 지목했다.
“이번에는 강우가 도전해볼래?”
강우는 벼락을 맞은 사람처럼 표정을 확 굳혔다.
‘이걸 뭔 재주로 외워? 한두 번 듣고 이름을 다 외우면 그게 사람이냐?’
특히 강우는 사람 이름 암기에 소질이 없었다. 암기 능력이야말로 천재나 영재와 전혀 관련 없다고 여기는 강우였다.
‘치사하긴.’
강우는 자신을 시험하는 차도도의 술책을 알면서도 반항할 수 없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자식들 왜 이리 비슷비슷하게 생겼어?’
강우는 내심 욕을 퍼부으며 한 명씩 호명하다가 네 번째에 포기했다.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니 머리에 떴던 글자도 나타나지 않았다.
“에이.”
그러자 여기저기에서 실망한 눈빛과 탄식이 쏟아졌다.
“자, 한 바퀴 돌고도 못 외우면 벌칙이 있어요. 다음은…….”
차도도가 다음 학생을 지명했다. 그렇게 몇 번 순번이 지나가니 학생들은 서로의 이름을 전부 외우게 됐다.
당연히 강우도 다 외웠다. 물론 게임 직후 바로 잊었지만.
* * *
그렇게 서로 알게 된 학생들과 함께 차도도는 다음 단계를 시작했다.
“앞으로 여러분은 조를 구성해서 활동합니다. 서로 협력해서 학교생활에 쉽게 적응하도록 할 목적이에요. 여러분의 평가는 개인과 조별, 양쪽으로 하게 돼요. 한 조는 네 명씩, 여러분들의 자율에 맡기면 좋겠지만…….”
평가를 좌우한다는 말에 학생들이 서로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차도도는 잠시 말을 끊었다.
그녀는 선생님으로서 명확한 원칙이 있었다. 한 조에 우수학생이 쏠리는 일을 방지하고 이미 안면이 있는 같은 학원 학생들끼리 조를 구성하는 일도 없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차도도는 학생들의 자율과 강제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었다. 특히 그녀를 고민하게 만드는 학생은 여학생 둘과 선행하지 않았다는 두 남학생이었다.
여학생 둘은 성별이 다르고 최우수학생이 포함되어 있다. 그렇기에 모두가 다 이 두 사람과 짝이 되길 원할 것이다. 반면 남학생 둘은 그대로 놓아두면 따돌림을 당할 게 뻔했다.
사실 그냥 이들을 한 조에 엮어주면 최상인데…….
그리고 눈치를 보니 손차희와 윤수아는 떨어질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반면 남학생 둘은 상황파악조차 못 하고 있다.
학생들이 원하는 방향은 분명했다. 바로 손차희가 일등 입학생이니까 그녀와 조를 이루면 유리하다. 또 반대로 오늘 선행하지 않았다고 밝힌 두 학생은 같은 조가 아닌 게 낫다.
이를 해결하려면 강제 편성밖에 없다.
생각을 마친 차도도는 미리 작성한 조 편성표를 들었다.
“자! 조 편성에 앞서 두 여학생에게 우선권을 줄 거예요. 일단 확인을 해보죠.”
그러자 한 남학생이 거들먹거리면서 손차희에게 접근했다.
손차희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이름이 고현성이라 했던가? 그녀에게 뜬금없이 이상형을 질문했던 학생이다.
“어이, 씨스더! 같이 할 사람 있어?”
고현성이 그녀와 윤수아를 쓱 살피면서 물었다.
“뭐래?”
“나랑 어때?”
고현성이 본인을 가리키면서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그 정도면 꽤 큰 키에 얼굴도 나름 준수하다. 건들거리는 태도가 영 미덥지 않긴 하지만, 저 나이 때의 남학생은 대부분 저렇게 겉멋이 잔뜩 들었으니까 못 봐줄 정도는 아니다. 여학생이 꽤 끌릴 타입이라 할 수 있었다.
다만 상대가 손차희라는 점이 문제였다.
예쁜 미모 덕에 손차희에게 사귀자고 제안했던 남학생이 한둘이 아니었다. 하지만 정작 손차희는 이성과 만나기보다 공부를 우선했기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그렇기에 손차희는 눈앞의 녀석을 흡사 제비 보듯 멀리했다.
윤수아가 손차희를 툭 치며 속삭였다.
“이거 우리가 정할 수 있는 거야?”
“정할 수 있다고 해도 저 녀석은 싫어.”
싸늘한 손차희의 반대에 고현성의 몸이 휘청했다.
곧바로 차도도가 끼어들었다.
“차희와 수아는…… 혹시 같이 조를 구성하고 싶은 사람이 있니?”
“우우!”
일부 남학생이 대놓고 야유했지만 차도도와 두 여학생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손차희가 반을 쓱 훑어보자 야유가 바로 수그러들었다.
‘카리스마가…… 장난 아니네.’
강우는 혀를 내두르며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