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08화 예비 입학일 (5)
당연하지만 손차희와 윤수아가 이런 상황에서 특정 학생을 지명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저희는 누구라도 상관없습니다.”
손차희가 똑 부러지게 말했다.
차도도가 의도한 대로였다. 특별히 점 찍어둔 학생이 있지 않은 다음에야 이런 분위기에서 지명하기 어려울 테니.
내심 만족한 차도도는 미리 작성한 편성표를 손에 들었다.
“자, 그럼 조를 발표할게요.”
“쌤! 우리가 구성하면 안 돼요?”
하지만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한 학생들이 하소연했다.
“그러고 싶지만 방금 봤잖아요? 바로 차이는 거.”
“커윽!”
고현성이 좌절하며 책상에 머리를 박았다.
그리고 모두 네 개 조가 호명됐다.
“자, 조별로 다시 앉아보세요.”
강우는 주섬주섬 일어나 여학생 옆으로 갔다.
그의 조원들은 손차희, 윤수아, 최대우다. 여학생 둘에 울릉도에서 왔다는 그 펑퍼짐하고 마음씨 좋아 보이는 녀석이었다.
그는 금방 담임의 의도를 이해했다. 담임은 선행하지 않아 문제가 되리라 예상되는 둘을 이 반에서 가장 우수한 학생과 짝지어준 것이다.
굳이 이런 혜택을 생각해본 적이 없지만 주는 데 마다할 이유가 없다. 그리고 그나마 안면이 있으니 다행이다 싶었다.
강우는 조원들에게 인사했다.
“안녕, 난 강우.”
그런데 어째 돌아오는 눈빛이 싸늘했다.
이 순간 손차희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앞으로 성적을 좌우할지도 모르는 조 편성이니 유불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반 2등인 전상철 같은 학생과 엮이면 최상이겠지만, 생각해보니 꼭 나쁜 상황만은 아니었다.
별반 아는 게 없는 최대우나 강우라면 조에서 주도권을 가지지 못할 것이다. 반면 주도권을 쥐고 흔드는 일에 익숙한 자신은 뜻대로 돋보이는 활약을 펼칠 수 있다.
손차희는 이런 방식도 매우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그녀는 전 과목에 모두 자신이 있었기에 굳이 다른 학생의 도움이 필요 없으니까.
‘그리고 담임에게 밉보이면 안 돼.’
날카롭고 섬세해 보이는 담임이 이렇게 조를 구성해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아마 성적이 바닥을 기어 왕따가 될지도 모르는 두 학생을 잘 보살피라는 뜻이겠지.
이 두 녀석은 선행과 담을 쌓았으니 학습 면에서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나마 실험이나 협력과제에 성실하게 임해주면 다행이긴 한데…….
하지만 풍기는 분위기부터 푸짐한 최대우는 고분고분 말을 잘 들을 타입인데 어딘지 날카로워 보이는 강우는 영 아니게 느껴졌다. 묘하게도 반항기가 풍겨왔다.
‘망한 삘이네…….’
문득 손차희는 아침의 사건이 떠올랐다. 그때 강우는 어려운 문제를 거침없이 설명했었는데. 어쩌면 예상과 달리 번뜩이는 재주가 있으려나?
‘에이, 그럴 리가 없지.’
손차희는 연신 강우를 훑어보다가 한숨을 푹푹 쉬었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전혀 모르는 듯 옆에 앉은 윤수아는 어느새 최대우, 강우와 죽이 맞아 재잘대고 있었다.
* * *
복잡했던 하루가 끝났다.
푸짐한 저녁을 먹고 난 후 강우는 기숙사 배정을 받았다. 사실상 오늘 가장 신경 썼던 부분이었다.
고려 과학고의 기숙사는 2인 1실이 원칙이다. 즉 룸메이트가 있다. 아무리 고등학교 신입생이 되었다지만 전생의 버릇이나 습관이 완전히 사라졌을 리가 없다. 적어도 정신 연령이 한참이나 어린 녀석과 한방을 쓰면 신경 쓸 일이 무척 많을 것이다.
그렇기에 강우는 무엇보다 룸메이트 선정에 특히 신경을 곤두세웠다.
다행히 학교는 학생들의 선택을 존중해서 기숙사를 배정했다.
강우가 아는 사람이라고는 같은 반 학생이 전부였다. 물론 친한 친구는 없지만 그래도 모르는 사람보다는 낫다.
강우가 룸메이트 선택을 고민하고 있자니 울릉도에서 왔다는 최대우가 다가왔다.
“하아, 나랑 같이 방 쓸래?”
강우는 미묘한 눈초리로 최대우를 훑어봤다.
곰 같은 녀석이라 성격이 무던해 보여 방에서 부딪칠 일이 없을 것 같긴 한데……. 다른 녀석은 없나?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강우는 그를 기피하는 다른 학생들의 눈빛과 마주쳤다. 특히 손차희에게 얼쩡거리던 고현성이란 녀석은 그를 대놓고 회피했다.
‘……나 왕따였어?’
아무래도 자기소개 때 뭔가 잘못한 것 같다. 이러다가 다른 고문관과 룸메이트가 되면 더 골치 아파질 것을 우려한 강우는 재빨리 찬성했다.
“좋아, 룸메이트 하자.”
그렇게 강우는 최대우와 같은 방을 쓰게 됐다.
물론 얼떨결에 정하긴 했지만, 최대우의 머리 위에서 반짝이는 S라는 글자 두 개를 볼 때마다 녀석에게 흥미가 동하는 것도 사실이다.
강우는 미리 보냈던 택배를 찾아 기숙사 방에 풀었다. 택배라고 해도 이불과 옷가지에 몇몇 필수 생활용품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그럭저럭 살만한 방이 꾸며졌다.
옆을 힐끔 보니 최대우의 물품도 그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짐작대로 대충 무던하게 사는 놈인 것 같았다.
“어째 우리 둘이 죽이 잘 맞을 것 같지 않냐?”
정돈을 끝내고 침대에 걸터앉은 최대우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응? 무슨 말이야?”
“하아, 난 울릉도가 멀어서 주말에 고향에 못 가거든.”
“그런데?”
“너도 멀잖아? 어쩌면 주말에 우리 둘만 기숙사에 있을 거 같아서.”
일리가 있었다.
고려 과학고는 전교생이 모두 기숙사 생활을 하지만 학생의 절반이 본가가 서울이다. 그래서 대부분 학생은 주말에 집으로 돌아가고 대치동의 학원에 다닌다.
자연히 주말이 되면 학교가 텅텅 빈다. 집이 먼 극히 일부만 머물 뿐이다. 물론 시험 기간에는 학교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고 하지만…….
“크, 시커먼 남자 둘이서 뭐가 재밌을 거 같냐.”
강우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따뜻한 방안 침대에 앉아 있으니 피로가 몰려오고 온몸이 노곤해졌다.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설친 탓이었다.
“하아, 물리 마지막 문제를 풀었다고 했지?”
그때 최대우가 갑자기 화제를 돌렸다.
그 문제가 그렇게 특별한 문제였나? 킬러 문제에 관심을 보이는 것이 이상하진 않지만…….
강우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왜?”
“난 제대로 못 풀었거든. 배운 적이 없어서. 그런데 넌 학원도 안 다녔다면서 어떻게 풀었냐?”
뭐라고 답해야 할까? 자칫하면 자라는 학생의 기를 꺾을 수 있기에 대답을 조심해야 한다. 특히 이 학생은 그가 주목하는 S급 학생 아닌가.
“안 배웠으면 못 푸는 게 당연하지. 배우지 않아서 못 푸는 것은 절대 부끄러운 일이 아니야. 배우고도 모르면 그게 부끄러운 거지.”
“그래?”
“이 학교에 들어올 정도면 머리가 좋잖아?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영재라기보단 수재가 더 많은 것 같아.”
“하아! 영재와 수재가 뭐가 달라?”
“배워서 알면 수재, 안 배워도 알면 영재 또는 천재. 입학 시점에 많이 안다고 꼭 좋은 게 아니라는 뜻이지.”
이것은 강우가 연구에 몰두하면서 학위를 마쳐보고 나서야 알게 된 사실이었다.
어릴 때부터 신동이라거나 천재라거나 그렇게 소문난 학생들이 있다. 하지만 그런 학생 대부분은 만들어진 천재다.
초등생 때 미적분을 가르치면 천재가 아니어도 기계적으로 따라갈 수 있다. 우수한 학생은 분명하지만 국가의 미래를 짊어질 천재는 아니란 뜻이다.
“그래도 미리 배워 온 학생들이 성적이 좋을걸? 오늘…… 대충 말을 들어보니 우리 반 일등인 손차희는 유명 학원에서 선두를 다퉜대. 그런 학생이 여기서도 성적이 좋지 않을까?”
학원에 다니지 않은 최대우는 오늘 학생들의 분위기에서 다소 주눅이 든 모양이었다.
강우는 피식 웃으며 손을 저었다.
“고등학교만 따지면 그럴지도 몰라. 미리 배웠으니 한 번이라도 더 복습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우리나라 교육은 수능이 끝이거든. 미리 앞서나간 학생도 결국 수능에서 만나게 되어 있어. 초등학교 때 수학 정석을 봤어도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똑같이 정석만 보잖아? 더는 발전이 없지.”
“그렇긴 하네.”
“우리나라 학생들은 고등학교 때까지는 평균적으로 공부를 잘하지만, 대학교에서는 역전되고 그 위로 올라가서 선행이 전혀 무관한 때가 되면 오히려 뒤처지잖아? 학원에서 미리 배운 거 금방 뒤집혀. 긴 인생에서 보면 별거 아니다.”
최대우는 이해하기 힘든 듯 고민에 잠겼다.
서로 말문이 트이자 강우는 S급 글자가 생각났다.
“그런데…… 넌 지구과학 잘해?”
“응? 아! 지구과학이라기보다 천문학에 관심 있어. 울릉도에서 별을 자주 봤거든.”
하긴 울릉도라면 서울보다 월등히 밤하늘의 별이 잘 보일 것이다.
“너도 시골이니…… 별 많이 보지 않았어?”
“응? 그, 그렇지.”
별은커녕 가로등만 봤다. 정작 시골에서 산 날이 손에 꼽을 정도인 강우는 별을 볼 일이 거의 없었다.
강우가 추측하기에 최대우는 별을 보다가 천문에 관심을 두게 되었고 그 관심이 점차 물리학과 수학으로 옮겨 간 케이스 같았다.
그렇게 둘이 속닥거리고 있을 때 방에 달린 스피커에서 방송이 나왔다.
“강우 학생, 사감실로 오세요.”
뜻밖에도 강우를 호출하는 소리가 들렸다.
“너잖아?”
“내 이름인데……. 근데 왜 부르지? 겁나게?”
겁난다기보다는 귀찮았다. 찌뿌둥한 표정으로 강우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같이 가줄까?”
최대우의 말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역시 친구는 사귀면 좋은 것이다.
* * *
사감실에 들어갔을 때 강우는 점심때 테이블에서 만났던 선생님을 만날 수 있었다.
그에게 지구과학 마지막 문제를 묻고 과제연구로 지구과학을 선택하라면서 조만간 한번 보자던 그 선생님이었다.
가까이서 보니 전생의 강우와 비슷한 연배인 삼십 대 중반의 꽤 인자한 인상이었다.
최대우와 강우를 본 선생님이 먼저 자신을 소개했다.
“만나서 반갑다. 난 기숙사 사감을 맡고 있어. 수업 과목은 지구과학이고. 음, 구체적으로는 천문학, 아니 천체물리학 전공이지. 이름은 김선호.”
강우는 바로 상황을 이해했다. 그래서 지구과학 마지막 문제 풀이를 물어봤나보다.
옆의 최대우를 슬쩍 살펴보니 얼굴이 확 밝아져 있었다. 천문에 관심이 많은 최대우는 선생님을 아이돌 보듯 혼이 나간 채 집중하고 있었다.
“넌 이름이 강우라 했고…… 그쪽은 이름이?”
“하아, 전 최대우입니다. 천문에 관심이 많아 따라왔습니다.”
최대우가 재빨리 본인을 소개했다.
“그래? 별을 본 적 있나?”
“제 고향이 울릉도이거든요.”
“아하!”
김선호는 바로 누군지 알아챘다. 울릉도에서 이 학교에 온 학생이 처음이었기에 최대우는 학교 선생님들 간에도 화제였었다.
그렇게 간단한 자기소개가 지나가고 김선호가 호출한 용건을 꺼냈다.
“그래서 지구과학 마지막 문제, 어떻게 풀었니?”
“밥 먹을 때 저희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시피…….”
“내가 궁금한 부분은 그게 선행으로 해결할 문제가 아니어서 말이야. 부력이야 물리에서 배운다지만 이를 환경 문제와 연결하려면…….”
강우는 마땅한 답을 찾기 어려웠다.
그 문제는 세부 교과 지식이라기보다 포괄적인 과학 상식을 묻는 문제였다. 물리나 지구과학을 잘해서가 아니라, 그가 다른 학생보다 더 오랜 세월을 살았고 그동안 계속 과학에 몸을 담았기 때문이었다. 자연스럽게 과학이 몸에 밴 결과일 뿐이다.
하지만 그걸 딱히 설명하기 쉽지 않았다. 이십여 년을 연구하며 산 결과라고 털어놓을 수도 없고.
“그런 경우를 배우지 않고도 안다고 하지. 천재의 특성이기도 하고.”
강우가 말이 없자 제멋대로 짐작한 건지 김선호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강우를 살폈다.
그 말에 최대우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 어디서 많이 듣던 말인데?’
강우가 방에서 최대우에게 했던 말이 김선호에게서 나왔다.
하지만 정작 강우는 내심을 숨기느라 급급했다.
‘아무래도 이 선생님이 조금 착각한 것 같은데?’
그래도 좋은 인상을 주어서 나쁠 일은 없다.
어떻게 될지 한편으로는 염려가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과 같은 사고방식을 품은 교사가 있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아졌다.
김선호는 다른 선생님과 달리 꽤 자상했다. 덕분에 강우는 연구주제로 물리가 아닌 지구과학을 선택해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고민을 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