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화 첫 수업 (2)
“들어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학생들의 표정에서 자신감이 사라졌다.
위인전에서 흔히 접하는 천재 과학자가 아니어서다. 그리고 대부분의 학생들은 초등 고학년 이후 진학에 관련되지 않은 내용을 거의 공부하지 않았다.
“난 베셀이야말로 진정한 천재라고 생각한다.”
김선호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여러분들은 베셀을 모르겠지만 그는 대단한 과학자였다. 독학으로 문제를 해결한 그 천재성은 놀라울 정도다.”
처음 듣는 흥미로운 이야기에 학생들의 눈빛이 말똥말똥해졌다.
학교에 적응하지 못한 베셀은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중학교를 중퇴했다. 그는 대부분 분야에서 재능이 없었는데 그나마 셈을 잘하여 무역회사에 취직했다.
회사에 다니면서 베셀은 천문학과 수학을 독학했고 핼리혜성의 궤도를 자력으로 계산했다. 베셀의 천재성을 알아본 올베로스는 그를 당대의 대 수학자였던 가우스에게 소개했다.
천재는 천재를 알아보는 법. 이때부터 약 40년간 두 사람은 학문을 교류하였으며 베셀은 가우스를 스승으로, 가우스는 베셀을 천재 천문학자로 서로를 아꼈다.
그리고 베셀은 죽을 때까지 독일 최고의 과학자로 명성을 날렸다.
강우는 베셀 함수를 떠올렸다. 대학교에서 공업수학을 배우면서 술자리에서 한탄했던 기억이 난다. 베셀 때문에 이 청춘이 책과 씨름하면서 망가졌다고. 그 자식이 이렇게 어려운 함수를 만들어서 인생이 수렁에 빠졌다고.
지금 생각해보면 모두 즐거운 추억이었다.
강우는 김선호의 의도를 눈치챘다. 이곳에서 누구는 자신이 천재가 아님에 좌절할 것이고, 누구는 역사 속의 천재를 동경하며 호승심을 불태울 것이다.
학생들은 아직 젊기에 꿈이 있고 꿈을 실현할 의지도 있다.
“천재란 그런 것이다. 가르쳐준 것을 익히는 사람은 천재가 아닌 수재일 뿐이다. 천재는 가르치지 않아도 알고, 하나를 배우면 열을 아는 사람이다.”
“……아!”
“여러분들은 앞으로 고등학교 교과 과정에서 시작하여 대학교 교양 과정까지 배우게 된다. 배운 것을 잘 이해해서 좋은 성적을 받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여러분들이 진정한 천재라면 배우는 것에만 안주해서는 안 된다. 이 세상에는 아직 인간이 이해하지 못하는 많은 자연법칙이 있고 여러분은 그 미지의 법칙 앞에 서 있다. 스스로 호기심을 캐고 또 풀어라. 그 과정에서 여러분의 천재성이 드러날 것이다.”
김선호의 말이 끝나자 강의실이 조용해졌다.
강우는 자신과 유사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김선호를 감명 깊게 바라봤다. 어젯밤에 잠시 만났을 때부터 느꼈지만 어째 이 선생님과는 죽이 잘 맞을 것 같았다.
이곳에 있는 학생들은 지금까지 이런 이야기를 듣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은 분명 학원에서 공식을 암기하고 문제를 잘 풀어야 한다는 말만 반복해서 들었겠지. 교과서에서 다루지 않는 내용을 향한 지적 호기심은 오히려 공부에 방해된다며 멀리했을 것이고.
학생들은 김선호의 말에 가슴에서 끓어오르는 무엇을 느꼈다. 수학과 과학을 깊이 공부하고 풀지 못한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고 싶다는 의욕이 솟았다.
“……베셀이 가우스를 만났을 때가 바로 스무 살이었다. 그때 그는 이미 수학과 천문학에서 천재 가우스를 놀라게 할 수준에 있었다. 그것도 독학으로. 여러분도 할 수 있다. 이 학교를 졸업할 때면 세계적인 석학과 대화하는 그런 수준에 이를 수 있다. 천재라면 그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나?”
짝짝-
한 학생이 손뼉을 쳤다. 그러자 곧바로 모든 학생이 박수를 쳤다.
강우는 반짝이는 학생들의 눈동자를 확인하며 흐뭇한 기분을 만끽했다.
물론 모든 학생이 천재일 필요는 없다. 오늘 김선호의 말을 듣고 각성한 천재가 한 명이라도 나와준다면 이 시간은 충분한 가치가 있다.
지금은 천재 한 명이 수십, 수백만 명을 먹여 살리는 시대이니까.
그리고 그가 볼 때 여기서 그 천재에 가장 근접한 사람은 바로 최대우였다. 최대우는 무려 S급을 두 개 품은 녀석이었다.
* * *
다음 수업은 물리 시간. 담임인 차도도의 수업이다.
강우는 조원들과 함께 물리 강의실로 이동했다. 어제 진단 고사를 쳤던 장소라 손쉽게 찾을 수 있었다.
이제 두 번째 시간인데도 조가 있으니 자연스럽게 조원끼리 몰려다니게 됐다. 강우는 처음에는 조별 활동을 탐탁지 않게 여겼지만 금방 이 시스템의 장점을 깨달았다.
확실히 조별 생활을 하니 학교 적응에 유리한 점이 있었다. 특히 정신적으로 진짜 고등학생이 아닌 그에게는 더 도움이 되는 것 같았다. 또래 학생들과 계속 자연스럽게 어울리니 고등학생 생활에 쉽게 녹아들 수 있었다.
강의실에 들어가자마자 강우는 가장 뒤쪽 테이블을 찾았다. 물리 강의실은 실험실을 겸하고 있어서 커다란 테이블이 띄엄띄엄 놓여 있었다.
그런데 그가 뒤쪽 테이블로 달려가려는 순간 그의 팔을 잡아채는 사람이 있었다.
“어디 가?”
“응?”
손차희가 도끼눈을 뜨고 위협했다. 앞자리에 앉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눈빛에 강우는 바로 손을 들었다.
‘으으, 맨 앞에서 어떻게 자라고!’
그의 소소한 반항은 입 밖에 나오지도 못했다.
조원들과 앞 테이블에 앉아 있자니 차도도가 들어왔다.
오늘 차도도는 검은색 정장 차림이었다. 검정 재킷과 스커트에 하얀 블라우스가 잘 어울렸다. 예전 교수 시절의 그였다면 눈을 떼지 못했겠지만, 고등학생이 되어 버린 지금은 그냥 심드렁했다.
지구과학 수업 때처럼 어젯밤 기숙사에서 불편이 없었는지 확인한 차도도가 수업을 시작했다.
“자, 수업 들어가기 전에 공지사항이 있어요.”
차도도가 핸드폰을 꺼냈다.
핸드폰 화면을 몇 차례 넘기던 차도도는 화면에 앱을 띄워 보여주었다.
“클래스룸이란 앱 들어봤나요?”
“아뇨.”
“우리 학교는 모든 활동에서 클래스룸 앱을 이용해요. 과제를 내고 제출하고, 세미나실 예약에, 외출증 끊기까지. 나중에 과제연구를 하게 되면 담당 선생님의 지도와 소통도 주로 클래스룸을 통해서 해요. 또 클래스룸은 여러분들이 입학 전에 공부해야 할 적응 도움 프로그램과 연동되어서…….”
차도도가 스크린에 앱을 올리고 활용 방법을 설명했다. 강우는 그 설명을 들으면서 입을 쩍 벌렸다.
그는 얼리 어답터는 아니더라도 각종 전자기기 활용에 문외한은 아니었다. 그래도 컴퓨터를 사용하는 이공계 출신 아닌가. 그런데 그도 이 앱은 생소했다.
그런데 황당하게도 주변의 다른 학생들은 전혀 어려움 없이 차도도의 설명을 이해하고 있었다. 역시 어릴수록 빨리 적응한다더니!
‘흐아, 이거 완전히 기계치가 된 기분인데…….’
연구실에 처박혀 연구하던 동안 게임이나 SNS에서 트랜드를 못 따라가고 있다고 생각은 했었지만, 설마 일반 사무용 앱 사용도 고등학생에 못 미치다니.
그의 미묘함을 알아챈 건지 차도도의 미간이 살짝 모였다.
“……강우 학생?”
“예?”
“그래서 리포트를 어떻게 제출하죠?”
“그, 그게요…… 이메일로…….”
“그렇게 하면 점수를 못 받아요.”
망했나? 첫날부터 담임에게 찍힌 기분이다. 그것도 담임이 물리 선생님인데.
‘담임에게서 신뢰를 회복해야 앞으로 1년이 편해질 텐데 어떻게 하지?’
당황한 강우를 같은 조원인 손차희와 윤수아가 측은한 눈으로 쳐다봤다. 두 학생의 표정에는 군대에서 고문관을 대하듯 연민이 가득했다. 심지어 조원에게도 찍혔나?
“자, 다시 알려드리죠. 모두 잘 보세요.”
차도도가 앱 활용법을 반복해서 설명했다. 하지만 정작 강우의 머리에는 남는 게 없었다. 차도도의 목소리는 한쪽 귀로 들어왔다가 다른 쪽 귀로 빠져나갔다.
‘아니, 이 자식들은 어떻게 이걸 다 이해하는 거야?’
학원에 다니면서 공부만 한 줄 알았던 학생들이 처음 보는 앱을 자유자재로 활용했다. 설마 이것들이 하라는 공부는 하지 않고 매일 핸드폰만 들여다보고 있었던 걸까?
옆에 앉은 손차희가 얼이 빠진 강우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너, 지금 표정 좀 이상해.”
“어…… 응?”
“물론 우리 담임쌤이 예쁘긴 한데 그래도 그렇게 넋 놓고 보면…… 너무 티 나지 않아?”
“어?”
강우는 자신도 모르게 입가로 흐르는 침을 쓱 닦았다.
손차희의 표정이 더욱 일그러졌다. 딱 보니 그를 변태 취급하고 있다.
“내, 내가 뭔 말인지 잘 이해하지 못해서…….”
당황한 강우가 다급히 변명했다.
눈을 찌푸리던 손차희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너 시골 출신이었지……?”
거기에서 시골이 왜 나와?
하지만 그런 이유로 사람을 무시하면 안 된다고 항의하기엔 앱 활용 교육 시스템 충격이 너무 컸다.
“저게 말이지…….”
보다 못한 손차희가 자신의 핸드폰에 앱을 띄워주면서 하나하나 알려주는 친절을 베풀었다.
강우는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손차희는 천재였다. 모바일 앱을 기가 막히게 쓴다. 아니, 손차희만이 아니었다. 같은 반 친구들 대부분이 그러했다.
연구실에 처박혀 연구만 하던, 핸드폰으로 기껏 톡이나 주고받고 동영상 감상만 하던 그에게는 완전 신세계나 다름없었다. 이쪽 방면에서는 그가 제일 둔재였다.
강우는 세상을 잃은 기분이 들었다.
* * *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본격적인 물리 수업이 시작됐다.
프린트물을 받아들고 강우는 내용을 쭉 살폈다. 앱 활용은 할 말 없지만 이건 자신 있다.
물리학에서 가장 기본적인 고전 역학. 속도, 가속도……. 중학교 때부터 배웠고 고등학교 물리 교과서에서도 가장 처음에 나오는 내용이다. 당연히 강우에게는 하품만 나올 그런 수준이었다.
물론 그건 강우만 해당하지 않았다. 다른 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기본 공식 몇 개를 적은 후 차도도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이미 다 아는 내용이죠? 눈 감고도 풀 수 있는 기본 법칙이죠. 이걸 다시 설명하면 여러분들이 모두 잠잘 것 같아서……. 어? 저기 벌써 자고 있네. 강우 학생!”
설핏 잠이 들었던 강우는 옆에 앉은 손차희의 옆구리 공격에 후다닥 눈을 떴다.
“예?”
“첫 시간부터 자? 그것도 앞에 앉아서?”
이럴 줄 알고 뒤에 앉으려 했다고!
“어, 어제 잠을 설쳐서…….”
“밤에 잠 안 자고 놀았어?”
최대우랑 늦게까지 잡담을 나누었으니 딱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를 보는 담임의 인식이 점점 시궁창으로 빠지는 느낌이었다.
그를 한차례 노려본 차도도가 다시 수업을 계속했다.
“이번 시간에는 조의 단합을 확인할 조 대항전을 해볼까요? 문제의 답을 조원들이 함께 토론해서 구하세요.”
첫 조 대항전을 맞아 모두 눈동자가 초롱초롱해졌다.
“먼저 문제를 고민할 시간을 10분 드립니다. 그동안 답을 주어진 용지에 조별로 기록하고 시간이 되면 앞으로 나와서 칠판에 적어요. 알겠죠?”
강의실을 쭉 둘러본 후 차도도가 문제를 발표했다.
“오늘은 지구를 구하는 문제예요.”
“정답! 독수리 오형제!”
무심코 대답한 강우를 다른 학생들이 쳐다봤다.
“뭔 소리야?”
‘아! 세대 차가 이렇게!’
낙담한 강우가 입을 다물었다. 그 사이 옆에서 손차희의 눈총이 쏟아졌다. 역시 함부로 나서면 곤란하다는 교훈을 얻었다.
차도도가 칠판에 크게 문제를 썼다.
- 지구의 질량을 구하는 방법을 모두 나열하라.
글씨체가…… 끝내줬다. 당연히 예쁜 쪽으로. 유려한 글씨체가 그녀의 외모를 닮았다.
“제가 저울 놓고 물구나무를 서면…….”
“야! 그건 지구를 드는 방법이지!”
저쪽에서 우스개가 튀어나왔다.
차도도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지금부터 딱 10분 줍니다! 지구의 질량을 구하는 방법을 조별로 용지에 써서 한 사람만 앞으로 나오세요.”
강우는 조원들과 머리를 맞댔다.
당연히 조원을 리드하는 사람은 손차희였다. 아무도 강우를 신경 쓰지 않았다. 강우도 방금 얻은 교훈을 거울삼아 나서기를 거부했다.
“방법을 많이 찾는 조가 이기나 봐.”
“뭔가 숨은 의도가 있겠지.”
강우네 조에서 물리에 자신 있는 사람은 손차희가 단연 선두였고 최대우가 그 다음이었다. 의외로 윤수아는 상대적으로 물리에 약했다.
강우는……, 모두가 그를 선행하지 않은 학생으로 간주했기에 조원들은 강우에게 물어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