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화 첫 수업 (4)
그렇게 수업이 끝나고, 점심시간이 되었다.
“모두 식사하러 가세요.”
선생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학생들이 환호성을 울렸다.
학교에서 가장 즐거운 시간이라면 뭐니 뭐니 해도 밥 먹는 시간이다. 특히 과학고 특유의 수업을 처음 받은 학생들은 밥이란 말에 긴장감이 풀려 본래의 떠들썩한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강우가 책을 챙긴 뒤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였다.
“강우는 나 좀 보자.”
차도도가 그를 붙잡았다.
어제 식당에 늦게 가는 바람에 교사 테이블에 앉아 좌불안석이었던 강우는 바로 표정을 확 일그러트렸다.
혹시 담임은 식사를 방해하는 물귀신이 아닐까?
그가 눈에 힘을 팍 주고 시위하고 있자니 차도도가 피식 웃었다.
“불만 많은 표정인데?”
“밥은 먹어야 하잖아요?”
“누가 밥 안 준다니? 식당에 밥 많아.”
“밥은 많은데 의자가 없으니 그렇죠.”
“아하!”
이제 알겠다는 표정으로 차도도가 의미심장한 눈길을 보냈다.
“선생님이랑 같이 앉아 밥 먹기 싫다는 거네?”
“네.”
차도도가 고운 인상을 찡그렸다.
“흐음, 남자한테 이런 식의 거절을 당하는 건 내 인생 처음인데?”
“예? 그게 왜 그렇게 되죠……?”
학생이 선생님 테이블에 앉아서 밥 먹으면 밥이 제대로 넘어갈 리 있나? 그걸 꼭 알려줘야 아는 건가?
강우는 무언의 시위를 하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차도도가 미소를 띠며 말했다. 물론 표정을 보니 농담이다 싶었다.
“다른 애들은 나랑 같이 밥을 못 먹어서 안달인데 넌 참 특이해. 선생님은 학생들 사이에서 인기 참 많은데…….”
‘아니, 예쁘면 뭐해? 그림의 떡인데.’
강우는 목구멍을 넘어오는 말을 간신히 삼키고, 다른 말을 뱉어냈다.
“다른 선생님들 보기 불편해서요.”
“아, 그렇구나? 알았어. 그럼 가봐. 다음에 이야기하자.”
차도도가 순순히 놓아주자 강우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강우는 인사도 하지 않고 잽싸게 강의실을 나갔다.
그 모습을 보던 차도도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 * *
식당으로 이동하던 손차희는 옆에서 끊임없이 재잘대는 윤수아 때문에 귀가 따가울 지경이었다.
“강우 걔, 대단하지 않아?”
“뭐가?”
“이상한 거 많이 알잖아?”
“그 정도는 나도 알아.”
손차희는 툴툴대며 반박했다.
오늘 강우가 대답한 내용은 참고서를 뒤지면 분명 어딘가에 나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험에 나오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제대로 보지 않았고, 또 제대로 봤다 해도 시험에 나올 일이 없으니 기억하지 않았을 것이다. 출제하지 않는 문제를 기억하면 손해니까.
“그래도 그렇게 설명하진 못하잖아?”
“설마, 내가 강우보다 못하다는 거야?”
갑자기 손차희가 도끼눈을 뜨고 목소리가 뾰족해지자 그녀의 기분을 감지한 윤수아가 바로 입을 닫았다.
저렇게 손차희가 날카롭게 구는 모습을 보일 때는 경쟁자를 만났을 때다. 손차희가 지금까지 저런 반응을 보인 사람은 이민찬 외에 없었다.
윤수아는 손차희와 강우의 사이가 벌어지면 곤란하다는 걸 직감적으로 인식했다. 그들은 같은 조가 아닌가. 조원들의 화합은 중요하다.
이걸 알면 손차희는 성적 때문에라도 강우와 대립하기를 원치 않을 것이다.
윤수아는 걸음을 옮기면서 조원이 함께 어울릴 방법을 고민했다.
“어이, 씨스더!”
뒤에서 두 사람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안정을 찾아가던 손차희의 표정이 확 일그러졌다.
바로 옆 조에 있던 고현성이란 자식이었다. 첫날부터 옆에서 얼쩡거리던 고현성이 오늘도 그녀를 힐끔거리는 장면을 손차희는 수차례 목격했다.
손차희가 환영하거나 말거나 헐레벌떡 뛰어온 고현성이 옆에 붙어서 말을 걸었다.
“오늘 너희 조 잘하더라?”
“그래서 뭐?”
“그 브라더…… 이름이 강우랬나? 그 자식 선행 안 했다고 하지 않았어?”
“그랬지.”
“선행도 안 한 녀석이 무슨 적분을 풀어?”
“그 학교에서는 배우나 보지.”
손차희는 상대하고 싶지 않다는 듯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 고현성은 계속 옆에서 추근거렸다.
“그 자식만 아니었으면 우리 조가 이겼을 건데……. 상철이도 기회를 놓쳤다고 아쉬워하더라.”
오늘 옆 조의 선전이 전상철 때문인지 아니면 고현성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그녀에게는 경계해야 할 적군이다.
종종걸음을 걷던 손차희가 갑자기 걸음을 뚝 멈췄다. 그녀가 고현성을 째려보며 물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밥 같이 먹자고. 상철이도 올 거야.”
손차희는 저쪽에서 다가오는 전상철을 발견하고는 곧바로 눈썹을 모았다.
“됐어. 넌 너희 조랑 먹어. 난 우리 조랑 먹을 테니까.”
“너희 조 그 두 남학생 없잖…….”
자신 있게 들이대던 고현성이 갑자기 드리워진 그림자에 입을 닫았다. 언제 나타났는지 바로 옆에서 최대우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잖아도 덩치가 큰 최대우가 그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으니 어째 오늘따라 더 크게 보이는 것만 같았다.
“아, 알았어.”
고현성이 기겁해서 뒤로 물러났다.
손차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시 걸음을 옮겼고 윤수아는 최대우의 소매를 잡았다.
“강우는?”
“선생님께 붙잡혀서…….”
“강우는 어제도 쌤이랑 같이 밥 먹지 않았어?”
“모르겠는데?”
어제 이 시간까지만 해도 강우는 전혀 존재감이 없었기에 윤수아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었다.
윤수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강우는 이상하게도 선생님과 어울리네. 혹시 이상형이 연상인가?”
“그건 또 뭔 말이야?”
뒤를 홱 돌아보며 손차희가 매서운 눈길을 보냈다.
“아, 아니 그렇다고.”
손차희의 기분이 나쁘다고 판단한 윤수아는 바로 입을 다물었다.
아무래도 조원 화합을 위한 특단의 대책을 강구해야 할 것 같았다. 그녀는 두 사람이 싸우는 장면을 머릿속에서 밀어냈다.
싸우면…… 그날로 이 조는 폭파된다.
* * *
고현성은 멀어지는 손차희를 보며 입을 씰룩이던 차였다. 그런데 그 사이 강우가 식당으로 뛰어가며 그를 스쳐 지나갔다.
급히 식당으로 뛰어가는 강우를 고현성이 재빨리 붙잡았다.
“어이, 브라더! 나 좀 보자.”
“나?”
강우는 짜증을 참으며 그를 돌아보았다.
누군가 했더니, 얼굴을 보니 같은 반 녀석이다. 방금 칠판 앞에 나와서 지구를 구하는 2가지 방법을 더 쓴 녀석이긴 한데……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다.
첫날 간신히 외웠던 이름을 벌써 다 까먹어 버린 탓이었다.
“강우!”
“어, 나 강운데, 넌 누구야?”
강우가 정말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자 고현성의 표정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아니, 이 브라더 녀석이? 라이벌 이름도 몰라?”
“무슨 라이벌?”
“방금 지구 구하는 방법에서…….”
“네가 독수리 오형제냐?”
“무슨 쌍팔년도 개그를…….”
순간 말문이 턱 막혔지만 고현성은 간신히 화를 억눌렀다. 술수에 말려들지 않으려고 고생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래서, 왜 잡았는데? 지금 밥 먹으러 가야 하니까 바쁘거든?”
“나도 마찬가지야.”
“마찬가지는 무슨. 담임 옆에서 밥 먹는 고통을 네 녀석이 아냐?”
강우의 외침에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한 고현성이 다시 울컥한 표정을 지으려다, 간신히 표정을 수습했다.
“그래서 무슨 일인데?”
“브라더! 승부다!”
“갑자기 무슨 승부?”
고현성이 갑자기 왜 이러는지 강우는 정말 이해할 수가 없었다. 갑자기 왜?
“오후 수학 시간에는 무조건 내가 이긴다.”
“그래, 이기든가 말든가.”
강우가 다시 걸음을 옮기려 하자 고현성이 팔을 붙잡았다.
안 그래도 빨리 가고 싶은데 계속 방해를 받자 강우도 슬슬 부아가 치미는 것을 느꼈다. 녀석이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자꾸 건드리고 있다.
“승부? 됐어. 난 생각 없어. 그냥 조용히 말할 때 꺼지는 게 어떻겠냐?”
“이 자식! 피하지 마!”
고현성이 얼굴을 일그러뜨렸지만, 강우는 피식 웃으며 녀석의 손을 팔에서 떼어내고 옷을 툭툭 털었다.
“승부 보려면 뭔가를 걸어.”
“당연하지. 내가 이기면 네 녀석은 우리 씨스더, 차희에게서 손을 떼라.”
이건 또 뭔 소리야? 강우는 황당한 표정으로 녀석을 째려봤다.
“떼긴 뭘 떼?”
붙은 적이 있어야 떼지.
“같은 조라는 둥 그런 핑계는 사절이다. 앞으로는 차희랑 말도 붙이지 마.”
강우는 바로 녀석의 내심을 꿰뚫어 봤다.
하는 것을 보아하니 이 녀석은 분명 손차희에게 관심을 두고 있었다. 딱히 녀석의 청춘사업을 방해할 생각은 없지만……, 상대가 원하는 게 있다면 당연히 그만한 대가를 받아야 하지 않을까?
강우는 녀석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말했다.
“차희라…… 좋아, 그러면 너도 뭔가 걸어야지. 그래서 넌 뭘 걸 건데?”
그 말에 미처 생각지 못한 듯 고현성의 눈이 동그래졌다.
“나도 손을…….”
무심코 자신도 손을 떼겠다고 하려다가, 고현성은 자신은 절대 손차희에게서 손을 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다른 것을 걸어야 한다.
“그, 그게…… 아! 내가 밥 산다! 밖에서!”
“흐음.”
밥을 산다라……? 어차피 손차희에게서 손 떼고 말고 할 것도 없으니까 부담이 없고, 밥은 공짜니까 나쁘진 않다.
다만 시커먼 어린 녀석과 둘이서 밥을 먹는 장면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그래서…….
“좋아. 내가 원하는 곳에서 밥 사. 오케이?”
“좋다, 브라더! 넌 이제 망했다고 복창해라. 오늘 수학 시간에 보자!”
고현성이 서둘러 결론을 짓고는 후다닥 사라졌다.
강우는 그 모습을 보며 혀를 끌끌 찼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밥 한 끼 벌었네.”
* * *
점심을 먹고 난 다음은 수학 시간이었다.
일반 고등학생들이 가장 싫어하는 과목이 수학이라지만, 이 학교에서는 통용되지 않는다. 이곳 학생들이 가장 좋아하고, 또 자신 있는 과목이 바로 수학이다.
이들은 대부분 중학교 때 수학경시대회를 밥 먹듯이 다녔고, 그 일부는 중학생 한국 수학 올림피아드에 입상하기도 했다.
그래서 대부분의 학생들은 수학 시간에는 눈빛이 초롱초롱해졌다.
물론 강우에게는 전혀 해당되지 않는 말이었다.
강우는 가장 뒤에 앉아서 길게 하품을 내쉬었다. 그래도 다행인 게 이번 시간은 조별이 아니라 각자 따로 앉았기에 그는 가장 뒷자리를 사수할 수 있었다.
교탁 바로 아래에는 같은 조인 손차희와 윤수아가 보였다. 최대우는 중간쯤에서 큰 덩치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앞에 앉으면 재밌나? 그러면 잠을 못 자는데.’
교탁 앞에 등장한 선생님은 인상이 강렬했다.
“내 이름은 정명욱이다. 별명은 대머리다.”
“푸하하.”
학생들이 웃음보를 터트렸다.
아닌 게 아니라 정명욱은 스님을 방불케 하는 대머리였다. 이마가 매우 넓고 머리 꼭대기에는 남은 머리카락이 몇 올 없었다. 반들거리는 머리가 천장의 불빛에 반사되어 찬란하게 빛났다.
소림사에서 도를 닦았나? 나이도 젊어 보이는데…….
“올해 1학년 수학을 담당하게 되었다. 앞으로 1년간 잘 지내보자.”
강우는 그렇게 수학 선생님에게서 알 수 없는 포스를 느꼈다. 대머리의 위용일까?
‘뭐, 그래도 어떻게든 되겠지.’
그는 물리 전공이라 수학을 깊게 다뤘다. 솔직히 미적분에 치우친 응용이라면 수학과보다 더 많이 공부했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고등학교 이과 수학은 미적분 중심이기에 그가 아는 수학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우리 고려 과학고에는 역대로 3대 천재가 있었다. 들어봤나?”
정명욱이 그 사이 흥미로운 이야기를 꺼냈다.
학생들은 대부분 자신이 천재 또는 천재에 근접했다는 자부심이 있기에 관심을 집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뛰어난 선배들의 이야기는 학생들의 열정적인 관심을 끌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다.
“아뇨.”
“역사가 그리 길지 않은 학교이지만 역대 선배들 가운데 진정한 천재로 꼽혔던 학생이 세 명 있다. 그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지. 모두 국제 수학 올림피아드 대회에 나가서 금메달을 땄다. 그 세 사람은 최소 두 번 이상 금메달을 땄고, 우리나라를 우승으로 이끌었지.”
국제 올림피아드에서 금메달은 한 사람에게만 주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금메달의 가치가 낮아지는 것은 아니다.
“우와!”
“적어도 우리 학교에는 지금까지 올림피아드에서 금메달을 딴 사람이 발에 밟힐 만큼 많다. 이름이 남을 천재가 되려면 최소한 두 번은 금메달을 따야 할 거다. 어쩌면 여러분 가운데에도 역대급 천재가 등장할지도 모르지.”
정명욱은 이어서 그 세 천재의 특이한 행적을 맛깔나게 늘어놓았다.
학교 다닐 때 그들이 얼마나 우수했는지,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알았고 강연 왔던 한국대 교수를 깜짝 놀라게 했다는 괴담이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