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화 첫 수업 (6)
정명욱이 학생들을 쭉 둘러봤다.
“전상철, 어딨지?”
전상철이 쭈뼛거리면서 일어났다.
“인수분해 공식을 이용해서 잘 풀었다. 어떻게 생각해냈지?”
“그, 그게…….”
전상철의 목소리가 흐려졌다. 자신 없다는 태도다.
“학원에서 배웠었나?”
“그, 그게…… 아주 오래전에 스치듯 배웠습니다.”
“오래전인데?”
“힌트를 보는 순간 떠올랐습니다.”
“좋아.”
요즈음에도 이런 공식을 가르친다는 말에 정명욱은 학원을 얕잡아보았음을 깨달았다.
“흠, 그래도 풀이 과정은 적절했다. 오래전이라더니 모두 기억하나 보네.”
선생님의 칭찬에 전상철의 안색이 밝아졌다.
다시 정명욱의 시선이 다른 학생으로 옮겨갔다.
“고현성과 손차희!”
두 학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희 둘은 답을 쓰긴 했는데…… 어떻게 된 거냐?”
“오래전에 학원에서 외우라고 해서…….”
“이 복잡한 식을 외우다니 대단하군. 그런데 풀이 과정이 이상한데?”
“기억이 안 나서요.”
고현성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고 손차희는 입을 다물었다. 공식을 암기하고 있었기에 답을 적었다는 것은 풀지 못한다는 말과 같다.
사실 손차희는 공식을 기억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전상철이 풀었다고 답하자 학원에서 예전에 배웠던 내용임을 알아챘다. 그다음에는 머리 쥐어짜기였다. 그렇게 해서 기적적으로 생각해냈다.
공식을 대충 적은 후 거꾸로 원식을 만들어 확인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이 과정을 반복하면서 그녀는 답을 완벽하게 짜 맞추었다.
어쨌든 세 사람을 호명한 정명욱이 칠판에 풀이 과정을 적기 시작했다.
“이차방정식 근의 공식 증명은…….”
중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아주 흔한 식이다. 그 증명식을 적어놓고 정명욱은 익숙한 인수분해 삼차식 공식 하나를 나열했다.
“이 두 식을 종이가 뚫어지도록 비교해보면…….”
칠판에 분필 소음이 탁탁 들렸다.
다른 과목 강의실이나 실험실에서는 대형 화이트보드에 마카로 쓴다. 하지만 수학 강의실에는 고전적인 녹색 칠판과 하얀 백묵이 있었다. 이 백묵 소음이 학생들의 잠을 깨우고 정신을 집중하게 하는 효과가 있다나?
“3차 방정식을 푸는 핵심은 2차항의 제거다. 이것만 알면 누구나 풀 수 있다. 이 핵심은 위의 인수분해 공식에서 짐작할 수 있고. 자, x를 이렇게 치환하면…….”
깔끔하게 식이 풀렸다. 이 장면을 보고 있으면 수학이 마술과 비슷하다고 느끼게 된다.
“에이, 별거 아니었네.”
지켜보던 학생들의 푸념이 이어졌다.
정명욱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어떤 문제든 이미 풀린 해법을 확인하고 검토하는 일은 쉽다. 하지만 아무리 단순한 문제라도 남이 가지 않은 길을 최초로 가려면 정말 어렵다.
천재는 남이 닦아놓은 길을 가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새롭게 길을 닦는 사람이다. 바로 500년 전, 처음으로 3차 방정식을 풀었던 타르탈리아처럼.
종이 울리고 수업 시간이 끝났다.
“오늘은 여기까지다.”
답지를 챙겨서 떠나는 정명욱을 손차희가 다급하게 붙잡았다.
“선생님! 모두 네 명이 풀었다고 했잖아요?”
“응, 그런데?”
“한 명은 말씀하지 않으셨는데요?”
“아!”
정명욱의 시선이 학생들을 쓱 훑었다.
“시간이 다 돼서 말이야. 다만 그 학생은 3차식뿐만 아니라 4차식까지 제대로 풀었더라? 완벽하게 푼 유일한 학생이다.”
손차희는 멍한 표정으로 정명욱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이 문제를 정말 제대로 푼 학생이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더구나 그 학생은 이반 1등인 그녀도, 2등인 전상철도 아니다. 누구인지 도무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얼핏 예전에 학원에서 들은 기억이 났다. 4차 방정식 근의 공식은 조건에 따라 달라지고 3차식에 비해 훨씬 복잡해서 계산 과정이 말 그대로 더럽다고 했었나?
사실 요즘에는 어떤 학원도 3차와 4차 방정식 근의 공식을 알려주지 않는다.
‘그걸 푼 학생이 있었다고?’
믿을 수 없는 현실에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던 손차희의 눈에 가장 뒷자리에서 주섬주섬 일어서는 강우가 들어왔다.
‘설마 강우는 아니겠지……?’
하지만 왠지 모르게 강우일 것만 같은 예감이 떠나지 않았다.
* * *
B동 3층에는 1학년 교과 담당 선생님들이 모인 교무실이 있었다.
하루 수업을 모두 끝낸 선생님들이 교무실로 들어왔다.
“선생님들! 잠시 회의 좀 합시다!”
1학년 주임인 김윤택이 선생님들을 소집했다. 그러자 순식간에 십여 명이 회의실에 모였다.
김윤택은 교사들의 면면을 확인한 후 입을 뗐다.
“오늘 첫 수업 들어가 보셨을 텐데 어떻습니까?”
“작년보다는 확실히 수준이 높았습니다.”
선생님들의 평가는 비슷했다.
역시 예상대로 올해 학생들이 우수하다는 말에 김윤택은 기분이 좋아졌다. 입학시험을 치르면서 받았던 첫인상이 첫 수업 때까지 이어지는 경우는 흔치 않은데.
김윤택은 준비한 자료를 돌리며 말했다.
“어제 쳤던 진단 고사 결과입니다. 상위 스무 명 명단은 모두, 나머지는 반별로 드렸습니다. 특히 입학시험에서 두각을 드러냈던 이민찬과 손차희 학생이 예상대로입니다. 두 사람이 꽤 큰 격차로 다른 학생을 따돌리고 1, 2위를 다투고 있습니다.”
차도도는 주어진 자료를 보며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이번에도 손차희는 이민찬에게 조금 밀렸다. 하지만 그 내용은 썩 좋지 않았다. 수학에서는 이민찬보다 떨어졌고 화학과 생물에서는 앞섰다. 게다가 주관식에서 밀려 객관식에서 만회했다.
길게 보면 수학과 물리를 잘하는 학생이 우수하다고 봤을 때 손차희의 앞길은 조금 험난해 보였다. 어째 이민찬의 담임인 김윤택의 표정이 밝더라니.
“학생들의 천재성은 수학, 그것도 주관식 수학 문제에서 드러나는 법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김윤택이 선생님들의 동의를 구했다.
가장 먼저 맞장구를 친 사람은 수학교사인 정명욱이었다.
“이번 학생들 수준이 높습니다. 진단 고사를 채점하면서 확실히 느꼈죠.”
“그렇죠? 이민찬 학생은 물리 주관식 문제도 잘 풀었어요.”
이민찬이 언급되자 차도도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차도도는 반 학생들의 진단 고사 성적을 쭉 살폈다. 반에서 가장 높은 점수의 학생은 역시 손차희였다.
뭔가 애매한, 이상한 학생이라 생각했던 강우의 이름을 발견한 순간 차도도의 얼굴이 확 구겨졌다.
강우의 이름은 가장 끝이었다.
‘객관식을 막 찍었으니 점수가 이 모양이지.’
답지에 그려놓은 예술을 봤을 때 성적이 안 나오리라고 짐작했지만 이 정도면 좀 심했다. 게다가 주관식도 물리와 지구과학 가장 마지막 문제를 빼고는 답을 적은 게 없다. 수학 주관식은 백지 수준.
이 정도면 고의가 분명했다.
‘다 큰 학생을 푸닥거리할 수는 없고…….’
차도도는 한번 강우를 따끔하게 야단을 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옆에 있던 지구과학 선생님, 김선호가 물어왔다.
“혹시 강우 학생과 최대우 학생은 성적이 어떻습니까?”
“강우요? 우리 반 맨 끝이네요. 그리고 최대우는…… 이 학생도 중간 한참 아래인데요?”
“아, 그렇군요.”
“관심 있으세요?”
“마지막 주관식을 풀어서 말이죠.”
김선호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면서 다시 성적표로 시선을 돌렸다.
마침 저쪽에 있던 수학교사 정명욱이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강우 학생요?”
“강우 학생 아세요?”
“아, 오늘 수업 들어갔었는데…….”
강우가 사고를 쳤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차도도는 긴장한 얼굴로, 최대한 자연스럽게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 학생이 좀 특이해요. 학원을 안 다녔다는데…….”
“저도 압니다. 오늘 수업 시간에 계산량이 많은, 특별한 문제로 시험을 쳤는데…….”
“그런데요?”
모두의 시선이 정명욱에게 모였다.
“유일하게 강우 학생만 다 풀었어요.”
“차희는요?”
차도도가 급히 물었다.
“손차희 학생은 사실상 못 풀었어요. 암기했던 답만 간신히 쓰는 수준이었죠. 다른 학생들은 대부분 손도 못 댔고요.”
정명욱의 설명에 차도도는 자신의 수업 시간을 떠올렸다. 강우의 분전으로 손차희네 조가 이겼던가. 강우의 실력은 왜 이리 오락가락인지.
그녀의 혼란스러운 마음과 달리 김선호는 빙그레 웃었다.
“아마 강우 학생은 사실 실력이 보통을 넘을 겁니다.”
“저도 그렇게 보이더군요. 아직 미확인이지만요.”
정명욱이 그 말에 동의했다.
그들의 대화를 듣던 김윤택이 끼어들었다.
“강우라면 어제 점심시간에 식당에서 봤던 그 학생인가요?”
“네, 그 학생 맞아요.”
김윤택은 그때 주관식 문제풀이로 차도도와 벌인 논쟁이 떠올랐다.
진단 고사 성적을 확인하고 별것 아닌 학생이라고 관심을 거두었는데, 수학교사가 또 강우를 언급했다. 그때 강우가 물리 마지막 문제를 풀었었다고 했던가?
자신의 반이 아니란 점이 아쉬웠으나 어쨌든 우수한 학생이 입학했다면 환영할 일이다.
‘물론 정말 우수한 학생이라면…….’
강우가 물리에 관심이 있다면 과제연구로 물리 과목을 선택할 가능성이 크다. 자신이 지도교사가 되어 강우를 가르치면 좋을 것 같다는 욕심이 났다. 그게 차도도 반 학생이라는 점이 더 짜릿했다.
‘손차희보다 이민찬이 우수한 것은 확실하니까…….’
다만 강우의 진단평가 성적이 영 마음에 걸린다. 거기에 학원을 다니지 않은 사회배려자 전형이란 것도. 자칫하면 오히려 골칫덩어리를 떠안을 위험도 있다.
그때 이민찬을 띄우고 강우의 진위를 알아볼 방법이 생각났다.
결심을 굳힌 김윤택이 다시 입을 열었다.
“입학 전에 진단 고사를 한 번 더 치르잖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전의 경우 두 번째 진단 고사에서 분발하여 성적이 뛰는 학생들이 있긴 했습니다.”
정명욱이 대답했다.
김윤택은 회심의 안건을 꺼냈다.
“진단 고사도 치고, 과제연구도 시켜보죠?”
“과제연구요? 학생들 부담이…….”
“처음부터 굴리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그래야 주도적으로 학습하는 분위기가 몸에 배고요. 문제해결력도 길러지죠.”
원래대로라면 과제연구는 입학 후 한 학기 동안 주제를 잡고 행해진다. 때로는 일 년에 걸쳐 연구를 진행하기도 한다.
학생들은 이 시간을 통해 대외 경시대회를 준비하거나 연구 발표를 거치면서 학생부에 넣을 실적을 쌓는다.
“선생님들께서는 굳이 부담가지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디까지나 연습이니까요. 학생들이 도움이나 지도를 요청하면 받아주면 되고요. 모든 것은 학생 자율로. 어떻습니까?”
“이제 갓 중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인데요?”
“조별로 함께하면 괜찮을 겁니다. 이 기회에 협동심도 기르고요.”
“그렇다면 보상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김선호의 주장에 김윤택이 미간을 찌푸렸다.
아직 어리바리한 신입생들이니 그냥 밀어붙여도 군말 없을 텐데. 이왕 말이 나왔으니 없다고 하기에는 양심의 가책이 들었다.
“흠, 그러면 입학식 때 시상하면 어떨까요? 원래는 1등부터 3등까지 입학한 학생들에게 상장과 장학금을 주잖아요? 과제연구에서 일등한 학생에게도 장학금을 지급하기로 합시다.”
과학고는 따로 학비를 내지 않기에 장학금은 말 그대로 현금이 통장에 꽂힌다.
“교장 선생님께서 승인하실까요?”
“승인이야 받아내면 되지요.”
“전 좋다고 봅니다. 학생들에게 일찍부터 연구 자세를 길러줄 수 있잖아요.”
다양한 의견이 종합되어 안건이 통과됐다.
저마다 고민에 잠긴 교사들의 면면을 살피면서 김윤택은 전략을 점검했다.
일등은 이민찬의 조가 확정적이다. 짧은 기간에 제대로 연구를 수행할 학생은 없다. 자신이 이민찬을 조금만 밀어주면 적절한 결과물을 만들어 낼 것이다.
그리고 과제연구 과정을 거치면 강우의 실력이 판가름 날 것이다. 뛰어난 학생이라고 생각되진 않지만, 만일 과제연구를 제대로 해서 가능성이 보이면 자신의 밑으로 끌어들이면 되는 일이었다.
김윤택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