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화 야밤의 천문대 (1)
혼자서 저녁을 먹은 강우는 식당 밖으로 나와 기지개를 켰다.
일과가 끝났으니 이제 기숙사로 들어가서 자면 된다. 자습실에서 공부를 시작하는 학생들과 달리 강우는 아직 무슨 공부를 할지 결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애초에 고등학교 과정을 배울 생각 자체가 없었던 데다 아직은 학교생활이 낯설었다.
“하아, 그래도 지겹군.”
허리를 펴서 하늘을 봤다가 몸을 굽혀 땅을 보기를 반복하면서 찌뿌둥한 몸을 풀고 있자니 누군가가 그의 어깨를 툭 쳤다.
“웬 놈이야?”
“어이, 브라더! 나야! 나!”
몸을 돌려보니 점심 때 시비를 걸었던 고현성이란 놈이었다.
“넌, 또 왜?”
강우는 눈을 찌푸리며 항의했다. 별로 마주치고 싶지 않은 놈인데 왜 자꾸 찝쩍대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브라더, 왕따 됐냐?”
“무슨 말이야?”
“모두 모여서 밥을 먹는데 혼자 먹었잖아?”
“그게 왕따랑 무슨 상관이야?”
강우는 어린 애들이랑 함께 모여 밥 먹는 것 자체가 이상했다.
사실 그에게 식사 시간은 큰 의미를 차지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혼자서 후딱 먹어치우는 것이 오히려 성미에 맞았다.
오늘 저녁 시간에도 손차희를 비롯하여 조원들이 한쪽에 모여 먹는 장면을 봤으나 일부러 근처에 가지 않았다. 괜히 성가실 것 같아서였다.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자 고현성이 오히려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구와 밥을 먹는지에 목숨을 거는 그로서는 강우는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그건 그렇고……. 봤냐?”
“뭘 봐?”
“수학 시간에 내기했잖아? 나는 문제를 풀었고.”
“아, 그거?”
수업을 마치면서 정명욱이 근의 공식을 구한 학생이 모두 네 명이라고 했던가? 거기에 고현성의 이름이 들어가 있었나?
워낙 관심이 없어서 기억이 가물거린다.
“으하하, 내가 이겼으니 앞으로 차희는 찝쩍대지 마라.”
고현성이 뿌듯한 자만의 웃음을 터트렸다.
손차희야 한 트럭을 가져다줘도 사양이다. 사실 한가하게 연애질할 시간도 없고, 생각도 없고.
하지만 진실은 바로 잡아야 할 것 같다. 조용히 그냥 넘어가 주려 했더니. 선의를 몰라보는 놈은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줘야겠다.
“그래서 네가 이겼다고?”
“당연하지. 넌 전혀 못 풀었잖아?”
우쭐대는 고현성의 어깨를 툭툭 치며 강우는 여유롭게 받은 것을 돌려줬다.
“내가 못 풀었다고 누가 그래? 수학쌤한테 가서 물어봐. 네 명이 풀었고 그중 한 사람은 4차까지 다 풀었다는 말 못 들었어?”
“그래! 네 명! 나랑, 상철이랑, 차희랑…….”
“남은 한 명은?”
“어? 한 명이 모자라네?”
고현성이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강우를 쳐다봤다.
“……설마. 그게 너라고?”
“당연하지. 난 4차까지 완벽하게 풀었는데? 그럼 내가 이긴 거냐, 네가 이긴 거냐?”
선생님이 한 사람을 호명하지 않았던 점을 간과했다. 게다가 하필이면 그 한 사람이 강우라니? 이럴 수는 없는 일이다.
“으허허억! 거짓말!”
“확인해봐. 넌 졌으니까 다음에 밥 사!”
“으으.”
“미리 돈 준비해라. 비싸게 먹을 테니.”
“으아! 브라더! 두고 봐!”
부들부들 떨며 혼자서 발길질하던 고현성이 저쪽으로 사라졌다.
“에이, 실없는 놈.”
손을 탁탁 털고 돌아서는데 건너편에 손차희를 비롯하여 윤수아와 최대우가 보였다. 그것도 손차희가 눈을 부릅뜨고 있다.
어째 만나면 깨질 분위기인데……. 도망치기엔 이미 늦었다.
“강우야, 현성이는 왜 왔어?”
윤수아가 눈을 살짝 찡그렸다.
“나랑 상관없지.”
“현성이랑 같이 밥 먹었어?”
“그럴 리 없지.”
“혹시…… 너, 삥뜯는 거야?”
어? 고현성의 어깨를 치는 장면이 그렇게 보였나? 예상치 못한 물음에 오히려 강우가 당황했다. 하긴 밥 한 끼를 뜯긴 했다.
“나도 모르지.”
“그런 것 같은데…….”
불리해진 강우는 기숙사로 가려고 몸을 틀었다. 그런데 그 순간 윤수아가 그의 팔을 붙잡았다.
“강우야, 강우야아! 우린 세미나실로 가야 해!”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한 강우가 한껏 인상을 찡그리며 윤수아에게 되물었다.
“세미나실? 그게 뭐야?”
“하여튼 따라와!”
강우는 윤수아에게 끌려가며 최대우에게 도움을 요청하려 했다. 하지만 도끼눈을 뜬 손차희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바로 꼬리를 내렸다.
* * *
“우와! 여기가 세미나실이야?‘
서너 평가량 되는 공간을 점유한 커다란 탁자 앞에 네 사람이 둘러앉았다.
강우는 고등학교 자습실 내부에 토론이 가능한 이런 장소가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역시 과학고는 뭔가 달랐다.
“내가 이거 예약하느라 고생했거든.”
윤수아가 자랑스럽게 핸드폰을 내보였다.
수업 시간에 배웠던 클래스룸 앱이었다. 앱이라면 버벅대는 강우는 심각한 세대 차를 실감하면서 의자에 쭈그리고 앉았다.
“자, 오늘 여기 모인 이유는…… 당연히 우리 조의 발전을 위해서야. 우리 반에서는 이미 최고의 조이지만 우리 학년에서도 최고의 조가 되려면 서로 마음이 잘 맞아야 해. 그래서 앞으로 공부도 함께, 노는 것도 함께하기로 했어.”
윤수아의 말을 들어보니 앞으로 모든 활동을 조에 속해서 해야 할 모양이었다.
“그, 그거 너무 한…….”
무심코 반박하던 강우는 손차희의 도끼눈을 보고 바로 입을 닫았다. 아무래도 이 모든 일은 손차희가 뒤에서 윤수아를 조종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신이 난 윤수아가 계속해서 설명했다.
“일단 조 이름부터 그럴싸하게 지어볼래? 자, 의견을 내봐.”
이거 무슨 어린애 소꿉장난 같은데? 강우는 내심 투덜거렸으나 불만을 꺼낼 수 없었다.
“차희가 대빵이니까…… 차희네 조?”
눈치를 보던 최대우가 먼저 제안했다. 그러자 손차희가 싫지 않은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더 좋은 이름 있을 거야.”
“무적차희!”
“차희와 바보들!”
“똘마니 사형제!”
“에이 그게 뭐야.”
윤수아와 최대우의 맞장구에 손차희가 푸들푸들 웃었다.
그렇게 무수히 많은 이름이 쏟아졌다.
웃고 떠드는 모습에서 고등학생다운 풋풋함이 엿보였다. 그런데 어째 하나같이 낯간지러운 이름이다.
‘이것들이 이과 천재라 그런가? 작명 센스가 영 바닥인데?’
보다 못한 강우가 한소리를 툭 던졌다.
“어째 천재라면서 이름도 제대로 못 지어?”
“우린 문과 천재가 아니거든?”
윤수아가 볼을 부풀렸다. 강우는 혀를 차며 목소리를 높였다.
“고곽천재들이 할 소리는 아니지. 머리를 써라! 머리를!”
“아, 고곽천재! 어때? 고곽천재?”
고곽천재란 고려 과학고 천재의 준말이다. 외부인은 알아듣지 못해도 이 학교 관계자는 무슨 말인지 다 알아들을 게 분명했다.
“우와! 딱 좋아! 우리 조에 고곽 천재인 손차희가 있잖아?”
비행기를 탄 손차희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녀의 반응을 확인한 윤수아가 최대우와 강우를 쓱 살피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희 둘 상태를 보면 이름이 영 안 어울리긴 한데…….”
“커윽! 대충 정해.”
빨리 기숙사로 돌아가서 잠잘 생각에 강우는 무조건 찬성했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그들은 조 이름을 ‘고곽천재’로 정했다. 물론 강우는 조 이름 따위가 왜 필요한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 다음으로 윤수아가 조 운영에 관련된 기본 사항을 열심히 고지했다.
“이거 차. 희. 가 정한 거야. 앞으로 고곽천재는 운명 공동체니까 무엇이든 함께 해야 해. 공부도 같이하고, 밥도 같이 먹고, 놀기도 같이 놀고, 그러다 보면 서로 죽이 잘 맞아서 성적도 잘 나올 거야.”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으나 행동을 통제하는 것 같다는 생각에 강우는 눈을 찌푸렸다.
“잠깐. 꼭 그래야 해?”
“당연하지! 오늘 혼자 밥 먹은 사람 누구야? 앞으로는 그러면 안 되는 거야. 알았지?”
“하아, 불편한데…….”
“아자! 아자! 고곽천재!”
투정하던 강우는 손차희의 매서운 눈초리에 어깨를 움츠렸다. 아무리 봐도 손차희는 그가 감당하기엔 무리다.
“앞으로 우리 조의 실력 향상은 차희가 힘써 줄 거야. 모르는 거 있으면 차희한테 묻고, 공부도 차희에게 상담하고, 하여튼 모든 건 차희를 중심으로 해결해. 차희가 제일 잘하니까.”
“그럼 넌 뭐 하는데?”
황당해진 강우는 윤수아에게 항의했다.
“나? 고곽천재 조장이지. 원래 조장은 아무것도 안 하는 거야.”
강우는 최대우에게 도움의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최대우가 속삭였다.
“과자 제공해준대.”
어째 최대우가 두 여학생 앞에서 순한 양이더라니. 치사하게 먹는 뇌물에 맥을 못 추나? 물론, 덩치를 보면 놀랍지 않지만.
이렇게 되니 절대적으로 수에서 밀리는 강우는 그저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건 다수결의 횡포다!’
“자, 오늘 공부 시작! 앞으로 저녁 시간에는 기숙사 점호 때까지 무조건 이곳에서 함께 공부할 거야. 어때?”
강우가 대답하기도 전에 손차희가 못을 박았다.
“물론 이의 신청은 받지 않아. 이게 다 너희를 위한 거거든.”
“끙.”
강우는 신음을 터트리며 한숨을 푹푹 쉬었다.
“그럼, 공부해.”
모두가 미리 준비한 책을 꺼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강우는 책이 없었다.
한심하게 바라보는 손차희와 달리 윤수아가 강우에게 프린트물을 넘겼다.
“강우야, 강우야아! 두 번째 진단 고사 준비해야지?”
“시험? 난 그런 거 신경 안 써.”
“안 돼! 우리 조의 명성에 누를 끼치면 안 되지. 이거 학원에서 예습하라고 준 건데 이거라도 보고 있어.”
프린트물을 보니 생물 교재였다.
한 페이지를 보기 전에 강우는 잠이 들었다. 손차희는 그걸 보고 어이가 없어 헛웃음만 삼켰다.
* * *
밤 11시는 기숙사 점호 시간이다.
급히 기숙사로 돌아온 강우와 최대우는 점호를 준비했다.
물론 점호라 해봐야 특별한 것은 없었다. 사감 선생님이 돌아다니면서 인원을 체크하고 주의사항을 고지하는 일이 전부였다. 때로는 그마저 각 층에 임명된 기숙사 층장이 대신하기도 한다.
점호는 방에 돌아와 있기만 하면 아무 문제가 없다. 강우가 편한 잠옷 겸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최대우와 준비를 마쳤을 때 사감인 김선호가 들어왔다.
“강우? 최대우?”
“예!”
마치 군대 막사 신입처럼 요란하게 대답했다.
“오늘 밤에 할 일 있나?”
“무슨 말씀이신지?”
“야밤에 천체 관측할 일이 있는데, 도울 생각 있나?”
당연히 강우는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지만 반발심이 일었다. 잠자기 바쁜데 야밤에 일이라니? 절대 안 될 말이다.
하지만 최대우는 달랐다.
“우와! 쌤! 당연하죠.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강우는 최대우의 옆구리를 꾹 찔렀다.
“야, 잠은 어떡하고?”
“천문대에서 관측하신다잖아! 이건 꿈이라고!”
이 학교에 천문대가 있었나? 교문을 들어오다 보면 B동 옥상에 커다란 흰색 돔이 보이긴 했는데. 그거 플라네타리움 돔 아니었나?
어쨌든 그게 문제가 아니라…… 울릉도 출신이라면 별에 질릴 때도 됐을 텐데?
“강우도 생각 있으면 따라와라.”
김선호가 먼저 나가자 최대우가 급히 강우의 팔을 끌었다.
“같이 가자.”
“우리 학교에 천문대가 있어?”
“B동 옥상, 플라네타리움 돔 옆에.”
하필이면 진짜로 있었다.
결국 강우는 최대우에게 질질 끌려갔다. 이 자식은 덩치도 그렇고, 힘이 장사다. 하여튼 귀찮게 됐다.
바로 김선호를 따라붙은 강우는 최후의 승부수를 던졌다.
“이 시간에 기숙사를 막 나가면 규정 위반이죠?”
“사감이 허락하면 상관없다.”
“어? 그럼 천체관측 동아리에 가입하면 밤에 돌아다닐 수 있어요?”
강우의 속셈을 눈치챈 김선호가 피식 웃었다.
“물론 내가 허락하면 가능하다.”
오! 이런 특혜가! 생각이 바뀐 강우는 적극적으로 최대우를 꾀었다.
“우리 천체관측 동아리 무조건 들자. 없으면 동아리 만들고. 오케이?”
“하아, 당연하지! 난 별 보는 거 엄청 좋아하거든.”
최대우는 울릉도에서 별을 많이 보았다고 했던가? 지금 녀석은 세상을 모두 가진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걸 보자 사심이 잔뜩 들어가 있던 강우는 괜히 머쓱해졌지만, 그러면서도 최대우를 홀로 천문대로 보낼 수 없다는 사명감을 불태웠다.
이러다가 물리에서 지구과학으로 전향하는 것 아닌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