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화 야밤의 천문대 (3)
“어떻게 풀었니? 미리 알고 있던 거니?”
차도도의 질문은 날카로웠다. 강우가 선행하지 않았다고 했기에 물어본 것이다.
강우는 시험 때의 상황을 떠올렸다. 딱히 그 내용을 예전에 공부한 적은 없었다. 다만 고현성과의 내기 때문에 집중해서 풀었을 뿐이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특히 학원에서 암기식 공부에 치중한 학생들에게는 어려운 문제일지 몰라도 그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게다가 힌트마저 주어졌으니 시간이 충분히 주어지면 어떤 식으로든 풀 수 있는 문제였다.
“처음 본 문제인데요.”
“그래? 그런데 어떻게?”
“고민하면 풀리는 문제죠. 특별히 어려운 것도 아니고…….”
강우는 딱히 대답할 말이 없었다.
생각보다 쉽게 문제가 풀려서 그도 의아하긴 했다. 그렇다고 천재가 된 것 같다고, 원인을 모르겠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고개를 갸웃거리던 차도도가 손차희를 잠시 보다가 옆의 책상으로 옮겨 갔다. 그곳에서 그녀는 고현성과 전상철에게 3차 근의 공식을 어떻게 구했는지 묻기 시작했다.
손차희는 기분이 확 나빠졌다.
그녀도 풀긴 했지만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답을 떠올려 역순으로 풀었다. 그녀는 자신이 손을 대지 못한 문제를 푼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했는데 그게 강우라 하니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같은 조원이라 반갑기도 하고 질투가 나기도 하고.
선행은커녕 학원조차 안 다닌 주제에 어떻게 풀 수 있었을까? 그것도 4차까지 푼 유일한 학생이라고? 그녀가 본 강우는 이상한 점투성이였다. 무엇보다 진단 고사 성적이 엉망이잖은가?
게다가 어제 세미나실에서 함께 공부하면서 화학이랑 생물을 물어보았더니 제대로 아는 게 없었다.
그래서 강우를 경쟁자라기보다 깍두기 정도로 치부했었다. 그날 물리 문제를 푼 실력을 인정한다면 물리는 잘하더라도 다른 과목은 영 젬병인 학생이었다.
그 모두가 오판이었나?
과학고에 전해지는 불문율이 있다. 수학을 잘하는 학생은 천재이며 다른 과목도 노력하면 잘할 가능성이 크다.
수학에서 강우가 사고 쳤다는 말에 손차희는 경계심을 확 높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강우를 관찰했다.
정작 강우는 옆 테이블로 간 차도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을 헤벌쭉 벌리고 있었다.
‘저 자식 뭐야?’
딱 정이 떨어지는 모습이다. 감히 학생이 선생님에게 저런 표정이라니.
정작 강우는 차도도와 대화 중인 고현성을 향해 눈을 부라리는 상황이었건만 손차희는 차도도에게 흑심을 품은 무뢰한으로 착각했다.
기분이 나빠진 손차희는 동료인 윤수아에게 공감을 받으려 했다.
그런데…….
‘아니, 얘는 왜 또 이래?’
윤수아가 강우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손차희는 윤수아를 팔꿈치로 툭 건드리며 조용히 물었다.
“너, 뭐해?”
“응? 아! 강우가 풀었다니까 신기해서.”
“그렇지? 풀 수 있는 얼굴이 아니지?”
“아니, 강우가 물리 문제를 잘 풀었잖아? 수학이라고 못 풀 이유가 없지.”
윤수아가 강우를 칭찬하자 손차희의 기분은 더 땅밑으로 파고들었다.
“그래도 전교에서 혼자 완벽하게 풀 실력이라는 건 오버잖아?”
“흐음, 아냐. 그때 관성모멘트 설명할 때 봤잖아? 강우는 관심 분야를 깊게 파고들어. 근의 공식도 관심 분야였을 거야.”
손차희는 딱히 반박할 말이 없어서 허탈했다.
윤수아가 마지막 방점을 찍었다.
“강우는 우리 조의 히든카드야, 엄청 멋있지 않아?”
윤수아의 눈빛에서 엿보이는 하트에 손차희는 한숨을 내쉬었다.
‘얘가 갑자기 남자한테 관심이 생겼나?’
손차희는 급격히 우울해졌다.
* * *
점심시간에 강우는 도망칠 수 없었다.
“강우야, 강우야아!”
연신 강우의 이름을 부르는 윤수아에게 잡혀 조원들과 함께 식당으로 갔다. 편하게 혼자서 먹겠다고 감히 반항할 수 없었다. 입을 열려는 순간 표독스러운 손차희와 표정을 보았기 때문이다.
‘차희는 오늘따라 기분이 별로인가?’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이럴 때일수록 찌그러져 있는 게 신상에 좋다는 처세술 정도는 안다.
오늘 메뉴는 제육볶음. 그날의 돈가스에 비하면 훨씬 그의 입맛에 맞았다.
후다닥 먹어치우고 옆을 보니 최대우는 그보다 훨씬 빨랐다. 그리고 맞은 편의 손차희와 윤수아는 밥알을 세고 있었다. 한참을 기다려야 할 듯했다.
다 먹은 식판을 들고 부근을 지나가던 고현성이 손차희에게 말을 걸었다.
“씨스더! 과제연구 뭐로 정했어?”
“뭘 벌써 정해? 말 나온 지 이제 한 시간 지났는데.”
“그거 마감이 다음 주말이니까 급하지 않나? 시간 없어.”
고현성의 말에 손차희는 미간을 찌푸렸다.
과학고에서 행해지는 과제연구는 짧게는 한 학기, 길게는 일 년짜리인데 오늘 나온 과제연구는 예비기간에 한정되었기에 2주일이 채 되지 못했다.
더구나 이런 유형의 과제연구가 처음이라 막막한 상황이었다.
손차희뿐만 아니라 옆 조인 고현성과 전상철도 마찬가지였다.
“너희는 정했어?”
“당근이지.”
자신 있는 고현성의 말에 손차희는 불안해졌다. 하루라도 빨리 주제를 정해야 연구할 시간이 조금이라도 더 길어진다.
“뭔데?”
고현성이 강우의 눈치를 슬그머니 봤다.
강우는 두 사람의 대화에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손차희의 제육볶음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아, 또 한 개가 사라지는구나.’
관심 없는 강우를 무시하고 고현성이 자랑하듯 손차희에게 말했다.
“음, 수학으로 하기로 했어.”
“수학? 주제가 뭔데?”
“근의 공식! 이번에 시험 쳤던 그 문제를 심층적으로 파보기로 했지.”
고차 방정식의 근의 공식 문제는 근대 수학자들의 관심을 끌었던 문제이긴 했다. 물론 고현성은 세부적인 내용을 전혀 몰랐다.
“그거 누구 생각이야?”
“나랑 상철이랑 같이 생각했지. 대략 일주일 자료 찾고 정리하면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아. 어때?”
“괜찮네.”
수업 시간에 소재를 얻다니. 손차희는 진정으로 부러웠다. 자신은 아직 전혀 감을 잡지 못하고 있는데 경쟁자인 전상철네 조는 벌써 확실한 주제를 결정했다.
“씨스더도 좋은 주제 찾아봐. 괜히 강우 저 자식에게 휘둘리면 망할 거야.”
마지막으로 강우를 험담한 고현성이 식판을 들고 저쪽으로 사라졌다.
손차희는 고현성이 주제를 알려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우리 조는 이만큼 했다고 자랑하고 그녀의 마음을 급하게 하려는 속셈이다.
“우리는 주제를 뭐로 할까?”
손차희는 조원들을 돌아보며 말했지만 대답하는 조원이 없었다.
윤수아를 돌아보니 여전히 먹느라 정신이 없고 맞은 편의 강우와 최대우는 제육볶음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 휘둘리기는커녕 오히려 끌어가야 할 판이다.
“하…….”
한숨을 쉰 손차희는 재차 물었다.
“생각 좀 해봐. 뭐로 할 건지.”
“난 아무 생각 없음.”
“나도.”
최대우와 강우는 바보 형제처럼 나란히 대답했다.
답답해진 손차희는 먹다 만 식판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희들을 믿은 내가 바보지.”
손차희가 식판을 반납하러 움직이자 이미 다 먹은 강우와 최대우가 따라서 움직였다.
한참 먹던 윤수아에게 불똥이 튀었다.
“으아, 차희야, 나 먹는 중!”
혼자 계속 먹기 무안했던 윤수아는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아까운데…….”
* * *
금요일 밤이 되자 대부분 학생이 사라졌다.
기숙사 생활이 처음이었던 학생들은 필요한 물건들을 가지러 집에 갔고 집이 먼 소수의 학생들만 학교에 남았다.
당연히 강우는 집에 갈 생각을 못 했고 어머니에게 전화만 했다. 비록 지금의 그는 강우가 아닌 손강우이지만 그렇다고 강우 어머니에게 불효할 생각은 없었다. 사실 전화 한 통 하는 게 어려운 일도 아니니까.
앞으로 강우로 살아야 한다면 강우의 주변 환경에 익숙해져야만 했다.
학생들이 거의 빠져나간 금요일 밤에 기숙사에서 하릴없이 노닥거리고 있자니 최대우가 벌컥 문을 열고 들어왔다.
“강우야, 오늘도 관측 있대.”
“아, 오늘도 맑나 보네.”
그날 관측을 끝내면서 김선호가 금요일 밤에 추가 관측이 있다고 했다. 강우와 최대우는 집에 갈 계획이 없었기에 흔쾌히 승낙했었다.
천체관측의 가장 큰 변수는 날씨다. 날이 흐리면 별이 보이지 않는다. 겨울철인 2월은 맑은 날이 많았고 오늘 밤도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찾아볼 수 없었다.
둘이서 기숙사를 나와 천문대가 있는 B동으로 이동하고 있자니 앞에서 익숙한 그림자가 나타났다.
“강우야, 강우야아!”
“어? 수아?”
윤수아는 집이 서울인데도 집에 가지 않았던 모양이다.
“넌 집은 어떡하고?”
“그냥 가기 싫어서. 지금까지 혼자서 세미나실에 있었어. 그런데 공부는 잘 안 되더라.”
윤수아가 빙그레 웃으며 두 사람을 훑었다.
최대우가 바로 털어놨다.
“우리는 천문대 가는데…… 같이 갈래?”
“천문대?”
강우는 아직 천체관측을 손차희나 윤수아에게 알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영문을 모르는 윤수아에게 최대우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윤수아가 매서운 눈초리로 강우를 흘겨보았다.
“그런 일 있으면 나도 알려줘야지. 이러기야?”
갑자기 불똥이 튀자 강우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최대우가 윤수아를 달랬다.
“같이 가자. 별 보는 거 엄청 재밌거든.”
“강우, 넌 내가 같이 가는 게 좋아? 안 가는 게 좋아?”
왜 자신에게 묻는 건지 강우는 알 수 없었다.
“내가 어떻게 알아? 그건 선생님께 물어봐야…… 커윽!”
강우는 윤수아의 발길질을 간신히 피했다.
윤수아가 강우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흥! 앞으로 나 모르게 일 벌이면 조에서 쫓아내 버릴 거야. 알았어?”
조에서 쫓겨나도 무서울 건 없지만 윤수아의 매서운 주먹과 싸늘한 눈초리는 살을 떨리게 했다.
“아, 알았어.”
“아자, 아자! 출동!”
“출동? 독수리 오형제야?”
강우와 최대우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윤수아가 한걸음 앞섰다.
친구와 함께하면 즐겁다. 내색하진 않았지만 강우는 윤수아의 합류가 무척 반가웠다.
* * *
지구과학 선생님인 김선호는 이미 천문대에서 관측을 준비하고 있었다.
강우 일행이 인사하자 김선호의 시선이 윤수아에게 옮겨졌다.
“학생은 이름이?”
“전 윤수아고요. 강우랑 같은 조입니다.”
“흠 그렇구나. 별 본 적 있니?”
“아뇨. 이제부터 경험을 쌓으려고요.”
예상외로 뻔뻔한 윤수아의 대답에 강우는 혀를 내둘렀다.
“그래, 열심히 하렴.”
김선호의 승낙에 강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관측은 그날과 비슷하게 진행됐다. 다만 그날보다 시간 여유가 있어서 소행성 아스트리아 외에 여러 천체를 관측했다.
“우와!”
윤수아는 망원경으로 보이는 별무리에 연신 감탄을 터트렸고 강우는 헛웃음을 들이켰다.
“얘는 완전히 시골에서 서울 처음 올라온 촌놈 같은데?”
“그러게.”
강우와 최대우는 못 말리겠다는 표정으로 킥킥대며 웃었다. 어쩌면 그들도 지난 시간에 비슷한 반응을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하늘의 별은 인류를 과학으로 이끌어준 등대였다. 아득한 원시인들은 별을 보면서 과학을 생각해냈고 그 과학이 분화하면서 인류를 발전시켰다.
별은 과학자에게도 문학가에게도 큰 영감을 주는 매개체다. 그들 또한 과학을 추구하는 학생들이기에 지금 밤하늘의 별을 보면서 가슴 뛰는 흥분을 느끼는 건지도 몰랐다.
까만 하늘에 빛나는 별빛! 그것만으로도 환상적이었다.
CCD로 촬영한 소행성 아스트리아의 사진을 모니터에 띄우고 김선호가 설명을 시작했다.
“천재 가우스를 아니?”
“가우스요? 가우스는…… 수학자잖아요?”
“그렇지, 하지만 가우스가 처음으로 명성을 날린 사건은 바로 소행성과 관련이 있다.”
천재 가우스의 행적이 강우를 비롯한 세 사람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베셀의 일대기에서 천재는 천재를 알아본다고 했던 그 가우스였다.
강우와 동료들도 천재가 확실하다면 오래지 않아 가우스나 베셀 같은 천재성을 드러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