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화 천재 가우스 (1)
19세기 초, 천문학자들은 티티우스-보데의 법칙에 주목하고 있었다. 이 법칙에 의하면 화성과 목성 사이에는 새로운 행성이 존재해야 한다. 하지만 고대부터 이 지점의 행성은 알려진 바가 없었다.
이 행성을 찾으려고 노력하던 이탈리아의 천문학자 피아치는 어느 날 지도에 없는 별 하나를 발견했다. 그는 이 별을 혜성이라고 생각했으나 그 움직임이 너무 느렸다.
그 와중에 피아치는 건강악화로 관측을 중지했고 그 새로운 별은 관측이 불가능해져 잃어버린 별이 됐다.
역사적인 순간에 천재 가우스가 등장한다. 불과 24세의 나이였던 가우스는 수학을 이용해 행성 궤도를 추적했다. 미지의 별로 남을 뻔했던 이 행성은 가우스가 계산했던 위치에서 정확하게 재발견되었다. 이 행성이 바로 첫 번째 소행성인 세레스다.
과거 천재들이 남긴 자취는 그들을 좇아가는 오늘날 과학도의 마음을 들뜨게 한다.
강우는 밤하늘을 바라보며 저 별을 놓고 고민했을 천재 가우스를 떠올렸다. 최대우와 윤수아도 먼 옛날의 가우스를 떠올렸다. 소행성의 움직임과 이를 예측하는 수학과 과학! 저 별빛을 통해 천재 가우스와 이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김선호가 나지막이 부연설명을 했다.
“그때 가우스가 사용했던 관측기록은 단 세 개였다. 당연히 기록이 많을수록 더 정확하게 소행성의 위치를 계산할 수 있다. 오늘로 우리가 관측한 소행성 아스트리아의 기록 또한 3개가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도 그때의 가우스처럼 소행성의 궤도를 계산할 수 있나요?”
윤수아가 초롱초롱한 눈동자를 떴다.
“그렇다. 가능하지.”
“해보고 싶어요.”
윤수아와 마찬가지로 강우도 가슴이 끓어오르는 기분을 느꼈다. 지금은 단 1초면 그 당시 가우스가 했던 모든 계산을 컴퓨터로 처리해서 결과가 나오는 시대다. 인터넷에서 관련 프로그램을 뒤져보면 판매하는 프로그램도 허다하다.
하지만 과학을 배우는 그들이 과거의 가우스처럼 도전해보는 것도 의의가 있지 않을까. 그들이 연구한, 발전된 방식으로 오늘 관측한 소행성의 궤도를 계산해 본다면?
그는 최대우와 윤수아의 표정을 확인했다. 두 사람의 눈에서 번뜩이는 열정이 엿보였다. 그들도 그와 똑같은 상상을 하고 있었다.
최대우의 천재성을 확인하는 데 이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을 듯했다.
강우가 욕심을 낼 때 최대우가 먼저 질문했다.
“쌤, 혹시…… 이 내용으로 과제연구를 할 수 있을까요? 담임쌤이 예비입학 기간에 과제연구를 해야 한다고…….”
“가능하다.”
“하아! 그렇다면 소행성 아스트리아의 궤도 계산으로 연구주제를 잡아볼까 합니다.”
최대우가 한숨을 곁들여 주장했고 윤수아도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아자! 아자!”
“좋아, 하다가 모르는 게 있으면 물어봐라. 관련 자료는 내가 제공해주마. 시간이 부족해서 완벽하게 하긴 힘들겠지만 하는 데까지 해봐.”
김선호가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학생들을 격려했다.
그렇게 엉겁결에 연구 주제가 정해졌다.
어떤 주제를 정하든 강우는 이들을 부추겨 상금을 탈 자신이 있었다. 다만…….
“우리끼리 정하면 차희가 화낼 텐데?”
“상관없어. 차희도 아직은 주제를 정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거든. 우리가 정해주면 오히려 좋아할걸?”
윤수아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윤수아는 평소 손차희를 열심히 따라다니더니 정작 중요한 순간에는 확실하게 자신의 의견을 내보였다.
“그래?”
“우리가 셋이니까.”
여기서도 다수결 원칙이 통한다. 손차희의 분노를 윤수아가 온몸으로 받아주겠지.
* * *
과학고 학생들도 학원에 다닌다.
흔히 일반고가 아닌 특목고나 과학고 학생은 학원에 다니지 않고 자기 주도적 학습을 한다고 생각하지만 현실은 절대 그렇지 않다.
사실 어릴 때부터 학원 선행학습에 익숙했던 학생들이 특목고생과 과학고생이기에 그 습성이 고등학교에 진학한다고 하여 바로 바뀌지 않는다. 지금까지 학원 선행에 의존해왔기에 쉽게 벗어나기 힘들고 교과를 미리 학습한 학생이 다수라 학교에서도 기초 부분을 그냥 넘기기 일쑤다.
고려 과학고도 비슷하다. 학생들은 주말을 이용해서 학원에 다닌다.
손차희도 학원에 갔다.
중학교 때 영재고 입시 준비로 오랜 기간 다녔던 학원이고 앞으로도 계속 이 학원 고등부에 다닐 생각이다. 주말에 학교 밖으로 나올 때마다 학원이라도 다니면 마음이 편해지니까. 그렇지 않으면 다른 학생들에게 쫓기는 기분에, 뒤처지는 느낌이 들어 심리적으로 불안이 커진다.
학원 교무실에 인사하러 갔을 때 손차희는 뜻밖의 광경을 접했다.
“그렇지, 그 부분을 집중적으로 파고들면 충분할 거야.”
“이 정도면 최상일까요?”
“어쨌든 밀리는 주제는 아닐 거다.”
학원의 물리 선생님과 대화를 나누는 학생은 이민찬이었다.
그는 같은 학원에 다녔고, 다니는 내내 경쟁자였으며, 그녀가 밀렸던 학생이다. 이민찬만 아니었다면 그녀는 이 학원에서 수석을 했을 테고 고려 과학고 입학에서도 수석을 거머쥐었을 것이다.
그런 이민찬은 그녀에게 부러움의 대상이자 질시의 대상이다. 게다가 녀석은 키도 크고 뽀얀 피부에 잘생긴 귀공자였다. 잘난 척하는 성격만 아니라면 봐줄 만했겠지만.
“후우,”
절로 새어 나오는 한숨을 손차희는 간신히 억눌렀다.
들리는 이야기로 추정해보면 이민찬도 연구주제 선정 때문에 고심하고 있었다. 그래서 학원 선생님에게 부탁하는 손쉬운 방법을 이용하고 있는 게 확실하다.
잠시나마 손차희는 발길을 돌릴지 말지 고민했다.
그녀가 생각한 연구주제는 수학 아니면 물리. 다만 같은 반의 전상철이 수학에서 연구주제를 잡았기에 그녀는 수학이 아닌 물리를 원했다. 그래서 물리 선생님을 찾았는데 의외의 복병과 마주쳤다.
전상철보다 더 싫은 이민찬이 물리 선생님과 이야기 중이라니. 학원 찬스를 생각한 사람이 그녀뿐만은 아니었다.
찌뿌둥한 얼굴로 머뭇거리고 있자니 이민찬이 그녀를 발견했다.
“어? 차희네? 연구주제 잡았어?”
“……아직.”
손차희는 물리 선생님의 눈치를 봤다.
물리 선생님은 그녀의 사정을 금방 간파했다.
“너도 주제 선정 때문에 왔구나?”
“그, 그게요…….”
“민찬이는 삼체역학 해법을 연구하기로 했다. 이 주제는 뉴턴 역학에서 한 단계 발전한 라그랑주 역학인데 고전 역학을 간소화한 방법이지. 잠시 기다리렴. 민찬이부터 끝내고.”
무슨 말인지 모르겠으나 고등학교 과정을 벗어나는 주제라는 건 알아들었다.
물리 선생님이 두툼한 자료 뭉치를 이민찬에게 건넸다.
“기본 내용은 여기에 다 있어. 넌 읽어보고 요약만 하면 된다. 그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겠지?”
“요약이야 조원들 시키면 되죠.”
“그래, 그렇게 해. 사실 이번 보고서는 학교 내신이나 수능과 상관없잖아? 시간 많이 쓸 필요 없어. 그 시간에 교과 공부하는 게 남는 거야. 알지?”
“네.”
“그럼 가봐.”
자료를 받은 이민찬이 꾸벅 인사하고 사라졌다.
손차희는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그녀도 안다. 이런 과제연구보다 내신이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입학식 때 장학금이 상품으로 주어진다지만 그건 학생들을 유인하기 위한 술책일 뿐이다.
그리고 고려 과학고의 선배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과제연구에 목을 매는 사람은 많지 않다. 대부분 싫어하지만 어쩔 수 없이 수행한다. 학생부에 몇 줄이라도 적어 넣어야 하니까.
방금 이민찬과 선생님의 대화로 보면 이민찬도 그들과 비슷하게 작업하겠지.
“흠, 차희 너도 물리로 정했어?”
“그러려고요.”
“그럼 적당한 주제를 찾아보자. 너도 역학으로 할 거니? 아니면 전자기학?”
“전 아무거나요.”
“간단한 실험을 넣을까? 아니면 이론만으로?”
고려 과학고에서, 또 다른 과학고에서도 학기마다 과제연구가 있기에 학원에서는 수년에 걸친 자료를 확보하고 있었다. 사실 고등학생은 제대로 된 연구 수행이 쉽지 않다.
“자, 너도 과제연구에 공들이지 마. 여기 괜찮은 주제와 연구 보고서가 몇 개 있는데 하나를 고르렴. 이걸 읽고 요약해서 보고서를 작성하면 된다.”
“그래도 돼요?”
“당연히 문제없어. 충분히 시간 들이고 이해할수록 더 나은 보고서가 나오긴 하겠지만 그럴 틈이 없잖아? 적당히 읽고 요약해.”
“네.”
손차희는 왠지 맥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과학고 첫 출발부터 대충이라니!
그녀의 심정을 알아챈 물리 선생님이 다시 강조했다.
“이 정도만 해도 반에서는 최고 수준일 거야. 전체에서 일등해서 장학금을 받으면 더 좋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시간 투자할 가치는 없지.”
“그렇게 할게요.”
“그럼 이 중에서 한번 골라볼래?”
그녀가 주제를 정하지 않으면 조원들은 과제연구를 시작도 못 할 것이다. 조원들은 그녀만 쳐다보는 해바라기니까. 손차희는 강우를 비롯한 조원들을 떠올렸다. 그들의 바람을 외면하고 싶지 않다.
학원에서 자료를 얻으면 최상은 아니더라도 차상은 된다. 이 자료를 받아 조금 다듬으면 좋은 결과를 끌어낼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경쟁자인 이민찬도 같은 방식이기에 안심했다.
손차희는 전자기학 분야의 주제를 골랐다. 이것으로 오늘 학원에 온 보람을 찾은 것 같았다.
* * *
“아이씨, 밥은 줘야지.”
강우는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학생들이 집으로 돌아간 주말, 남은 학생이 적어 식당이 문을 닫았다. 당연히 교내에서는 밥을 먹을 수 없고 밥을 먹으려면 교문 밖으로 나가야 했다.
이럴 때 밖에서 밥 먹는 것도 나쁘지 않았지만, 그놈의 귀찮음이 문제였다. 움직이기는 싫은데 아침마저 먹지 않아 엄습한 배고픔은 무시무시한 고통으로 다가왔다.
“좀 기다려봐.”
최대우가 김선호에게 받은 자료를 뒤적였다. 이 녀석은 온종일 자료를 살피느라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세 사람은 지금 세미나실에 모여 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엄밀하게는 최대우 혼자 머리를 굴리고 있었지만.
강우는 한숨을 푹푹 쉬면서 윤수아에게 눈짓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지금 점심이라고!’
정작 윤수아는 소행성 자료를 최대우에게 맡겨 놓고 화학을 공부하고 있었다. 두 번째 진단 고사를 준비해야 한다나. 은테 안경을 쓰고 집중하고 있는 모습이 귀엽게 보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은 강우뿐이었다.
강우는 최대우를 방해할 수 없었고 그렇다고 진단 고사 공부를 하고 싶지도 않았다. 솔직히 가진 책도 없었다. 고등학생이라면 누구나 한 권쯤은 가지고 있을 ‘수학의 정석’도 없다.
그런 그를 보고 윤수아가 혀를 내두르며 잔소리를 했지만 그는 다른 쪽 귀로 흘렸다.
그래도 최대우가 과제연구에 집중하고 있기에 강우는 입을 닫고 눈으로 노려보는 방법을 택했다.
“강우야, 공부 좀 해야 하지 않아?”
“귀찮아.”
“그럼 이것 좀 가르쳐줘.”
윤수아가 그에게 화학 문제를 쓱 내밀었다.
어느 나라 말이야? 대충 훑어봐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강우는 괜히 눈을 부라렸다.
그 마음을 알아챈 윤수아가 혀를 찼다.
“물은 내가 바보지. 넌 물리만 잘하지? 아니, 관심 있는 분야만 덕질하나?”
자기 소개하던 날 손차희와 말다툼했던 내용을 되새기며 윤수아가 물었다.
“네가 신경 쓸 바 아니지.”
퉁명스러운 반응에 윤수아가 시무룩해져서 물러났다.
강우는 다시 최대우를 재촉했다.
“얼른 밥 먹으러 가자!”
“안돼, 지금 중요한 부분이거든. 너희들끼리 다녀와. 난 김밥이나 사줘.”
최대우의 부탁을 무시하고 강우가 강제로 끌고 가려는 순간 윤수아가 동참했다.
“좋아, 오늘 점심은 김밥!”
“아!”
아침도 걸렀는데 김밥으로 배를 채운다고?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