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과학고 천재-20화 (20/325)

제20화 천재 가우스 (3)

세미나실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지금까지 열강을 토했던 강우는 한쪽 옆에 찌그러졌고 최대우는 수식을 검토하면서 체계적으로 정리하느라 머리를 싸맸다.

윤수아는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한 기본 작업을 시작했다. 그녀의 안색은 밝았다.

뭔가 제대로 돌아가는 분위기에 강우는 기분이 좋아졌다. 할 일이 사라졌다는 점이 조금 아쉽긴 했지만.

다만…….

“강우야, 배고파. 삼각김밥 세 개 먹은 거로는 기별이 안 가.”

“강우야, 강우야아! 나는 초코 우유가 먹고 싶어.”

갑자기 심부름꾼으로 전락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노는 사람이 다녀와야지. 세미나실이 있는 B동에서 정문까지 거리는 제법 되고 정문에서 편의점까지도 꽤 된다.

강우는 유유자적한 걸음으로 편의점을 향했다.

하늘이 파랗다. 쌀쌀한 바람이 제법 불지만 어느새 봄이 성큼 다가와 있는 듯했다. 올해의 봄은 작년과는 다를 것이다. 작년에는 지방의 작은 대학교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었는데 올해는 서울의 과학영재고에서 유유자적 지내고 있다.

달라진 환경만큼이나 새로운 경험이 다가온다.

전생의 원수인 한국대 물리학 교수, 마도환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직은 그 자식과 마주칠 일은 없다. 하지만 언젠가는 과학기술계를 바로잡을 것이다. 그날을 위해 그는 이 학교에서 3년간 기반을 닦아야 한다.

이 학교를 졸업한 후 어떻게 그놈에게 대항할지는 아직 생각해보지 않았다. 졸업 후 진로를 국내로 할지 외국으로 할지도. 다만 녀석이 교수로 있는 한국대에 학생으로 입학하고 싶지는 않았다.

일단 이 학교에서 자신을 도와줄 동료를 많이 만들어야 한다. 동료가 천재면 더 좋고.

전생에서 명확하게 깨달은 점이 있다면 이공계 연구에서 독불장군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혼자서 이룰 수 있는 성과는 한정적이지만 여럿이면 그 폭이 대폭 넓어진다. 연구팀이 만들어지면 더 훌륭한 업적을 쌓을 수 있고 이는 마도환을 처절하게 무너트리려는 그의 복수를 앞당겨준다.

학생의 재능을 알아보는 능력이 생긴 이유를 어렴풋하게 짐작할 수 있었다.

이런저런 복잡한 생각에 잠겨 걸음을 옮기고 있을 때였다.

“브라더!”

누군가가 그를 불렀다. 주말이라 그를 알만한 사람은 이곳에 없을 텐데?

정문으로 두 녀석이 들어오고 있었다. 고현성과 전상철. 수업 시간에 옆 테이블에 앉던 조의 멤버들이다.

굳이 상대하고 싶지 않아 옆으로 피하는데 고현성이 다시 불렀다.

“어이, 브라더! 집에 안 갔어?”

“…….”

“하긴 멀어서 못 갔겠군.”

강우는 무표정한 얼굴로 두 녀석을 쓱 훑어보고는 다시 걸음을 옮기려 했다.

“과제연구 주제는 정했어?”

“그럭저럭.”

“아! 차희가 학원에서 머리 싸매고 있을걸?”

학원에서? 하긴 손차희는 점심시간에도 과제연구로 고민하고 있었으니까.

“넌 편하겠다. 차희한테 다 맡기고 놀면 되잖아? 그래서 조 선정할 때 너보다 내가 더 나을 거라고 차희한테 누누이 말했었는데.”

왜 이 녀석은 과거의 일을 자꾸 꺼내는지 모르겠다. 차희에게 선택받지 못한 게 그리 충격이었나?

묵묵히 듣고 있자니 고현성이 말을 이었다.

“우리 조는 모두가 협력해서 자료를 분석하고 있지. 적어도 우리 조는 너네처럼 학원에서 던져준 주제는 아니니까.”

손차희는 학원의 도움을 받았는지 모르지만 강우는 학원의 도움을 받은 적이 없다. 바로 잡아주려다 굳이 알려줄 이유가 없는 듯하여 입을 다물었다.

“그래서 잘 돼?”

“네가 풀었다는 3차, 4차 방정식 해를 구하는 거……. 그거 쉽더라? 우리는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갔지. 고차 방정식에서 근의 공식이 존재하는가 하는 문제를 심층적으로 다루기로 했거든.”

적절한 주제였다. 시험과 연관성도 있고. 난이도도 딱 적당해 보였다.

“쉽지 않을 텐데?”

강우의 다소 삐뚜름한 반응에 고현성이 웃음을 터트렸다.

“크크크, 당연히 쉽지 않지. 그런 대단한 문제를 갓 고등학교 입학생이 풀 수 있겠냐? 그래도 내가 누구냐? 그 정도는 껌이지.”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지 쉽게 파악했다. 제대로 한다면 응원해주겠지만 보아하니 학원에서 답을 가져올 분위기였다.

한바탕 웃음을 터트리던 고현성이 전상철과 함께 학교로 들어갔다.

과제연구의 본래 취지가 뭘까? 학원에서 떠먹여 주는 방식으로는 학생들의 천재성을 절대 끄집어낼 수 없다.

고려 과학고 선생님들은 학생들의 과제연구 보고서에서 과연 진실을 알아볼 수 있을까? 어쩌면 선생님들도 눈을 감아주는, 보여주기식 과제일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앞섰다.

적어도 최대우와 윤수아의 노력이 부정당하는 일만은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 *

일요일 저녁이 되자 집에 갔던 손차희가 학교로 돌아왔다.

그녀는 윤수아의 연락을 받고 세미나실로 달려왔다.

세미나실에 들어온 손차희의 손에는 두툼한 자료가 들려 있었다. 강우는 그것이 학원에서 받아온 과제연구 자료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손차희가 들어왔을 때 강우는 하릴없이 놀고 있었지만 최대우와 윤수아는 정신없이 연구에 몰두하고 있었다.

최대우는 소행성의 관측기록에서 궤도요소를 구하는 수식을 완성했고 윤수아는 이를 프로그램화 시켰다. 지금은 프로그램의 버그를 잡는다고 난리였다. 두 사람의 노력으로 연구는 거의 절반가량 진행되어 있었다.

“너희들 뭐하니?”

이상한 분위기에 손차희가 눈을 게슴츠레 뜨고 살폈다.

“과제연구.”

“어? 주제를 정했어?”

“응.”

윤수아는 시선을 모니터에서 떼지 못한 채로 대답했다.

잔소리하려던 손차희는 모니터를 확인한 후 차마 말을 걸지 못하고 대신에 놀고 있는 강우에게 물었다.

“그래서 주제가 뭔데?”

“소행성 추적.”

“소행성? 갑자기 지구과학이네?”

손차희는 그 부분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수학이나 물리에 비하면 지구과학은 아무래도 인기가 떨어진다.

그녀 생각에는 소행성 추적보다 학원에서 받아온 전자기학 주제가 성적을 받기에 훨씬 안전했다. 그래서 가져온 자료 뭉치에 손을 뻗다가 멈칫했다.

최대우의 성격은 잘 모르지만 윤수아는 다년간 함께 지냈기에 잘 알았다. 그런데 그녀는 윤수아가 저렇게 뭔가에 몰두해서 집중하는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학원에서 받아온 주제로 바꾸자고 차마 말하기 어려웠다.

“갑자기 지구과학은 어쩌다가?”

“대우랑 같이 김선호 선생님을 돕다가 이런 주제를 잡게 됐어.”

강우는 며칠간 소행성 아스티리아를 관측했던 사실을 간략하게 털어놓았다.

손차희는 혼란스러웠다. 과학실험을 하다가 호기심을 느껴 심층적으로 파고들었으니 무척 자연스럽긴 한데 그녀는 강우나 최대우의 안목을 믿기 어려웠다. 자칫 별것 아닌 주제를 밀어붙이다가 실패하거나 점수가 안 나오면 그 책임을 누가 지지?

손차희는 몇 번이고 가져온 자료 뭉치를 만지작거렸다.

강우는 그녀의 갈등을 금방 알아챘다. 아마 저 자료에는 적당한 주제와 해답이 담겨있을 것이다. 저 자료를 요약해서 발표하면 적어도 중간은 간다. 그것도 손쉽게.

하지만 그렇게 하면 고등학교 생활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우게 된다. 처음부터 학원의 도움을 받으면 앞으로 모두 6학기 동안 여러 차례 비슷한 연구 활동을 반복할 텐데 그때마다 외부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 결국 스스로 해결하는 능력을 잃게 된다.

그런 방식은 천재가 걸어갈 길이 아니다. 그렇게 되도록 절대 버려둘 수 없다. 게다가 이 과제연구에는 무려 돈이 걸려 있었다.

강우는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과제연구 주제를 찾았어?”

“으응.”

“수학? 물리?”

“물리.”

“같은 분야네. 소행성 추적도 고난도 물리 지식이 필요한 거니까.”

“그래?”

“내 생각엔 네가 찾아온 주제는 보험용으로 남겨두면 어떨까 해. 보다시피 대우와 수아가 이 주제를 무척 흥미로워하고 또 이틀 동안 열심히 했거든. 지금 그만두기엔 아까워.”

손차희는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열심히 프로그래밍 중인 윤수아의 열정에 감탄했다. 설사 실패할지라도 지금 중단시키는 건 너무 잔인했다.

“일단 더 해보고 안 되면 그때 네가 가져온 주제로 바꾸면 어때?”

“그, 그게…….”

이미 답까지 학원에서 대충 받아왔으니 급하면 하루 만에도 처리할 자신이 있었다. 그렇기에 손차희는 그리 걱정하지 않았다.

“어제부터 둘이서 열심이거든. 이제 슬슬 결과가 보일 시점도 됐고. 내일 천문대에서 한 차례 더 관측할 때 선생님께 확인을 받아볼까 싶어. 그때 선생님이 부정적이면 주제를 바꾸고…… 어때?”

손차희는 차마 강우의 의견을 반박할 수 없었다.

“……알았어.”

결국 그녀는 가져온 자료를 다시 가방에 집어넣었다.

손차희는 최대우와 윤수아가 열심인 장면을 보고 있자니 부러운 생각이 들었다. 그녀도 저렇게 몰두해서 뭔가를 연구하고 싶었다.

교과서와 참고서에 나온 문제를 기계적으로 푸는 공부가 아닌, 창조적으로 고민하는 과제를 연구하고 싶었다. 지금 두 사람이 몰두하고 있는 저 연구에 자신이 끼지 못한다는 사실이 아쉬웠다.

그렇다고 지금부터 내용을 설명 듣고 옆에서 보조하기에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녀는 한 번도 윤수아에게서 설명을 듣는 자신을 그려본 적이 없었다.

지금까지 이런 일에서 그녀는 항상 중심에 있었다. 지금처럼 그녀가 없어도 잘 돌아가는 상황은 마음을 불안하게 했다. 갑자기 입지가 줄어든 기분이었다.

복잡한 심경에 손차희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멍하니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강우는 그녀의 심정을 이해했다.

그는 노트를 펼쳐 놓고 손차희를 불렀다.

“이것 좀 볼래?”

손차희가 군말 없이 그의 옆으로 왔다.

“이게 어떻게 된 거냐 하면…….”

강우는 노트에 그림을 그려 가면서 과제연구 내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자존심 때문에 입을 열지 못하는 손차희에게 어제 칠판에 수식을 쓰며 최대우를 가르치듯이 하나하나 설명했다.

노트 한쪽이 넘어가고 다음 쪽이 복잡한 수식으로 채워졌다. 과연 강우였다.

설명이 진행될수록 손차희는 생각이 복잡해졌다. 예상외로 어려운 문제인데다 지금까지 다루었던 교과 과정과 완전히 동떨어진 분야였다.

그보다 더 놀라운 점은 이런 어려운 문제를 지금 강우가 전혀 막힘없이 설명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게 무슨…… 마치 학교 선생님 같아, 아니 학교 선생님도 이렇게 설명하진 못해. 이건 대학교 교수님 같아…….’

그녀는 강우의 이런 면을 두 번째 경험한다. 그날 카페에서는 처음이고 낯설어서 미처 제대로 깨닫지 못했는데 지금은 확연히 보였다. 강우는…… 확실히 보통 학생과 다른 면이 있었다. 그게 무엇인지 콕 찍어 말할 수 없지만.

게다가 최대우와 윤수아는 어떤가. 그 두 사람도 어려워하지 않고 이 난해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지 않은가.

어제의 두 사람과 오늘의 두 사람이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왠지 모르게 뒤처진 기분에 손차희는 점점 불안해졌다. 고곽천재의 주도권은 자신에게 있어야 하는데…….

강우의 설명이 끝났을 때 손차희는 노트를 뺏어 들고 처음부터 하나하나 다시 살폈다. 겉보기보다 훨씬 흥미로운 주제였다. 적어도 그녀가 학원에서 들고 온, 틀에 박힌 교과서적인 문제와는 다르다.

그녀도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세미나실에서 강우를 제외한 세 사람이 문제에 몰두했다.

강우는 이해하고 도와주는 손차희가 고마웠다. 강우는 이 조원들에게서 새로운 희망을 봤다. 만일 이들이 고등학교 3년의 기간 동안 지금처럼 의욕적으로 노력한다면 각자의 천재성을 만개해서 드러낼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지금 이 순간이 만들어진 천재가 아닌, 진정한 천재가 탄생하는 시작점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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