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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떠보니 과학고 천재-21화 (21/325)

제21화 작은 성과 (1)

주말이 지난 후 새로운 한 주를 시작한 학생들은 훨씬 안정감을 보였다.

낯선 곳에 떨어졌다는 불안감을 주말에 집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날려버리고 이제 슬슬 과학고의 바쁜 생활 패턴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정작 강우는 아직도 적응이 쉽지 않았다. 그의 정신 연령보다 한참 어린 학생들과 어울리면서 약간 멘붕 상태에 빠졌다. 손강우의 학창 시절을 떠올리면 손쉬울 듯했는데 그때와 지금의 문화적 차이가 예상보다 컸다.

그 대표적인 문제가…….

- 윤수아 : 아자, 아자!

- 손차희 : 이번 주도 잘 해보자. 파이팅(이모티콘)!

- 최대우 : 흐아암(이모티콘).

- 윤수아 : 파이팅(이모티콘)!

“이게 뭔 짓이람.”

아침을 먹고 수업 들어가기 전까지 잠시 기숙사에서 노닥거리는 동안 핸드폰 단톡방에서 메시지가 마구 올라왔다.

학생들 놀이 문화? 당연히 강우는 톡을 씹었다. 개인적으로 날아온 것도 아니고 단톡이니 굳이 대답할 이유가…….

- 윤수아 : 강우야, 일어났어?

- 윤수아 : 아직 안 일어났으면 수업 늦어!

- 윤수아 : 아침 먹고 또 자니?

- 윤수아 : 대우야 강우 깨워.

- 최대우 : 흐아암(이모티콘).

- 윤수아 : ???

끊임없이 톡이 울렸다.

단톡방 인원이 네 명이다 보니 강우가 보지 않으면 1이 없어지지 않는다. 강우를 제외하고는 모두 바로바로 톡을 확인하니 1이 남으면 무조건 강우였다.

“강우야, 수아가 부르는데?”

“아, 몰라.”

“화가 나서 펄쩍 뛰는 이모티콘 폭탄이 올라오고 있어.”

“으아, 그러든가 말든가.”

강우는 옆에서 측은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최대우의 시선을 무시했다.

논리적으로 따져봐도 궁금하면 전화 한번 하면 될 것을 성가시게 왜 톡으로 고생하는지 알 도리가 없다.

“수아는 아침부터 왜 이러는데?”

“아, 그게…… 어제 많이 무리했잖아? 수아는 밤에 기숙사로 돌아가서도 계속 프로그램을 만졌나 보더라고. 그 덕에 잠이 팍 줄었지. 그래서 우리도 자다가 수업 늦을까 봐 깨우는 게 아닐까?”

최대우가 꿈보다 해몽인 해답을 내놓았다.

생각해보니 주말에 무리하긴 했다.

지금처럼 열심히 머리를 굴리면서 해답지가 없는 새로운 세계를 탐구하는 작업을 윤수아는 태어나서 처음 해보았을 것이다. 당연히 피곤함이 평소의 공부에 비하면 두 배가 넘는다.

“난 한 게 없는데?”

다만 그런 고생을 한 사람은 다른 조원들이고 정작 강우는 주말 내내 편하게 지냈다. 그러니 피곤할 일도 없다.

“나도 힘들지 않아. 얼마나 재밌었는데.”

최대우도 강우의 말에 동의했다.

강우는 가자미 눈으로 최대우를 슬그머니 살폈다. 하긴 이 자식 덩치를 고려하면 남는 게 체력이니 그 정도 굴러서는 간에 기별도 안 차겠지.

“오늘 수업은 뭐야?”

“오전 화학, 오후 물리.”

화학은 첫 수업이고 물리 시간에는 담임인 차도도가 들어온다.

“잠자긴 틀렸네.”

강우는 연습장 하나와 볼펜 한 개를 챙겼다. 그 옆에서 최대우는 화학 참고서와 물리 참고서를 가방에 가득 담았다.

* * *

화학 강의실은 다른 강의실에 비하면 독특했다.

강의실이라기보다는 실험실에 가까웠다. 커다란 테이블이 띄엄띄엄 놓여 있는 형태는 물리 강의실이랑 비슷하지만, 좌우 벽에 쭉 전시된 각종 실험기기를 보면 이곳이 화학 실험실이란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고대 연금술사가 튀어나올 것만 같은 분위기다.

오늘도 어김없이 손차희의 강요로 가장 앞쪽 테이블에 앉은 강우는 먼저 조원들에게 손짓으로 인사했다.

손차희는 무덤덤하게 인사를 받았고 윤수아는 피곤함에 절은 이모티콘을 닮아 있었다. 그 와중에도 단톡을 씹었다는 항의를 온몸으로 표현하는 듯했다.

유난히 핼쑥한 윤수아의 안색에는 주말 내내 고생한 흔적이 드러나 있었다.

어떻게든 달래야 할 것 같아서 강우는 슬쩍 운을 띄웠다.

“프로그램은 잘 돼?”

“여전히 디버깅 중.”

“막혔나 보네.”

“대우가 해결해 줄 거야.”

기본 수식을 최대우가 책임지고 있고 윤수아는 프로그래밍만 맡았다는 뜻이다.

당연히 최대우가 반색했다.

“어? 난 강우만 믿고 있는데?”

“날 뭘 보고 믿어? 차라리 선생님을 믿는 게…….”

책임을 회피하려는 순간 조원들의 싸늘한 시선이 몰려왔다.

이건 너희들 일이라고 말하려는 순간 강의실 문을 열고 담당 선생님이 들어왔다.

“어?”

강우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의 옆에 앉은 손차희가 경멸하는 눈초리로 옆구리를 쿡 찔렀다.

백의의 천사? 화학 선생님은 하얀 실험 가운을 걸치고 있었다. 물론 강우를 놀라게 한 점은 실험 가운이 아니었다.

“화학을 맡은 신새벽이에요. 여러분, 반가워요.”

다정한 음성으로 자신을 소개하는 신새벽은 무척 아름다웠다.

물리 선생님인 차도도를 보았을 때도 그 외모 때문에 충격을 받았는데 화학 선생님인 신새벽도 보통이 아니었다. 두 사람을 함께 세워두면 이곳이 학교가 아니라 방송국이라고 착각할 정도였다.

“지난주에는 해외연수를 다녀오느라 이제야 여러분을 처음 만나게 됐네요. 올해 신입생이 우수하다는 평가를 많이 들어서 기대가 커요.”

인사 후 신새벽이 자신의 이력을 늘어놓았다.

대충 요약하면 한국대 화학교육과를 졸업한 재원이었다. 신기하게도 이 학교에는 국내 최고 대학인 한국대 졸업생이 널렸다. 그만큼 선생님들 수준이 높다는 뜻이다.

“우리 담임이랑 누가 더 예뻐?”

“그야 담임이지.”

“아냐, 난 화학 선생님이 훨 나은 것 같아.”

“그렇지, 물리보단 화학이지.”

옆 조에서 고현성과 그 일행의 대화가 들려왔다.

얼핏 차도도와 신새벽이 역대 고곽 여선생님 가운데 최강 미모라는 쑥덕임이 들려왔다.

차가운 분위기의 차도도와 달리 신새벽은 온화하고 부드러운 인상이었다. 키가 큰 차도도에 비하면 신새벽은 아담한 체구의 귀여운 외모를 자랑했다.

어쨌든 이왕이면 예쁜 선생님과 수업하면 기분이 좋다. 수업 효율이 높아질지는 모르겠지만.

“손차희가 누구지?”

신새벽이 학생들을 쭉 둘러보다가 가장 앞에 앉은 두 여학생에게 시선을 멈췄다.

“전데요?”

손차희가 손을 들었다.

“아, 학생이었군요. 선생님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고 있다길래 확인해 봤어요. 앞으로도 열심히 해주길 바라요.”

손차희의 표정이 밝아졌고 반면에 옆 테이블에 앉은 전상철의 표정은 확 어두워졌다.

“자, 수업 시작할게요. 고등학교 화학 정도는 한 번씩 다뤄봤죠?”

“네!”

학생들이 우렁차게 대답했다.

강우는 고등학교 화학의 기억을 더듬었다. 물론 그는 고등학교 때 화학을 배웠고 대학에서도 일반화학을 수강하긴 했다. 하지만 이미 오래전의 일이라 기억이 가물거린다.

“선행 안 한 학생 있어요? 손들어봐요.”

당연히 없다고 예상하면서 쭉 둘러보던 신새벽의 표정이 확 변했다. 놀랍게도 가장 앞자리에 앉은 두 남학생이 손을 쭈뼛쭈뼛 들고 있었다.

“흐음, 이름이?”

“강우요.”

“최대우입니다.”

“원소 주기율표라고 들어봤어요?”

“네.”

강우는 힘차게 대답했다. 주기율표야 기본 중의 기본 아닌가.

한결 마음이 놓인 신새벽이 마카로 칠판에 주기율표라고 크게 썼다.

“화학은 주기율표로 시작해서 주기율표로 끝나요. 자, 그럼 얼마나 아는지 확인해볼까요? 강우 학생!”

“네?”

“불러봐요.”

그래도 강우는 핵융합 전문가다. 주기율표 정도야…….

“수소.”

신새벽이 칠판 위쪽 왼쪽 끝에 H를 적었다.

“헬륨.”

신새벽이 칠판 오른쪽으로 옮겨가서 이번에는 He라고 적었다.

“가끔 이걸 보고 ‘그’, 또는 ‘아저씨’라고 번역하는 인간들이 있는데…… 그러다가 걸리면 죽어요. 그때는 나랑 영어 배틀 함 뜨는 거죠.”

웃는 학생들을 향해 신새벽이 눈을 부릅떴다. 어째 그 모습마저 귀엽다.

신새벽이 이번에는 H 아래에 마카를 톡톡 치면서 강우를 돌아봤다.

“리튬.”

“잘 아네요. 다음은?”

“베릴륨, 붕소, 탄소, 질소, 산소…….”

강우의 대답이 나오자 신새벽이 원소기호를 제 위치에 적어넣었다.

“불소, 네온…….”

다시 신새벽이 강우를 쳐다봤다.

주기율표에서 강우가 아는 원소는 거기까지. 핵융합과 관련된 원소는 앞쪽의 리튬, 잘 봐줘야 탄소까지다. 그 이후로는 강우에게는 너무 먼 세상이다.

“그다음은 뭐죠? 몰라요?”

“선행 안 했는데요?”

“그래도 중학교에서 심화했으면 배웠을 텐데요?”

중학교에 다닌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데 주기율표를 기억할 리 없었다.

“기억해봐요.”

“모르겠는데요.”

약간 짜증 난 강우는 바로 입을 닫았다. 이래서 화학이 싫다. 물리에 비하면 화학은 암기할 것투성이니까.

“흐음, 옆에 학생이…… 최대우라고 했죠? 그다음 불러보세요.”

“저도 모르겠는데요.”

학생들의 웃음이 터지고 거리낌 없는 강우나 최대우와 달리 손차희의 안면이 붉게 물들었다.

“흐음. 심각한데…….”

“모르는 건 죄가 아닙니다.”

강우는 얼떨결에 항변했다.

“그렇긴 해요. 주기율표는 고등학교 과정이니까요. 앞으로 열심히 하면 되니까……. 자, 다음 아는 학생?”

신새벽이 강우와 최대우를 향해 미소를 보내고는 다른 학생을 찾았다.

예쁘면 모든 게 용서가 된다고…… 최대우는 싱글벙글이었다.

강우는 애초에 선행이고 뭐고 선생님의 칭찬이나 질책에 전혀 무감각해서 아무 생각이 없었다. 흥미를 잃고 멍한 표정으로 신새벽에게 시선만 고정하고 있었다.

지금 그의 머릿속에는…….

‘아! 괜히 앞에 앉아서 잠을 못 자겠네.’

신새벽과 눈을 마주친 학생들이 주기율표의 다음 원소를 불렀고 신새벽은 학생들이 부른 원소를 적절한 곳에 적어 넣었다.

금방 칠판의 절반이 채워졌다.

‘저걸 어떻게 다 외우지?’

강우는 학생들의 암기 실력에 혀를 내둘렀다.

원소 번호 38번 스트론튬에 이르러 학생들의 대답이 막혔다. 사실 화학에서 원소의 성질은 주기율표의 세로줄을 뜻하는 족과 관련된다. 그렇기에 족을 기준으로 원소를 외우고 원소 번호순은 초반부에 한정된다.

이때부터 학생들은 순서대로 부르는 것을 포기하고 족을 기준으로 세로로 원소를 호명하기 시작했다.

“55번은 세슘요. 위치는 루비듐 아래쪽요.”

1족과 2족은 시험에 자주 나오기에 쉽게 끝까지 원소를 불렀다. 헬륨 계열 원소인 18족과 그 앞인 17족도 쉬운 족이었다. 하지만 나머지는 만만치 않았다.

빈칸을 채우던 학생들이 포기하는 순간 영웅이 될 기회를 노리던 전상철이 자신만만하게 일어났다.

“나머지를 제가 채워도 되겠습니까?”

“환영해요.”

“원소 번호 39번은 Y, 이트륨입니다.”

전상철은 그 뒤로도 무려 20개에 가까운 원소를 채웠다. 이제 주기율표에 채워진 원소는 대략 80개. 아직도 꽤 많은 부분이 비어있었다.

“그럼 여기까지? 작년보다 못한데?”

신새벽의 도발적인 발언에 학생들이 전전긍긍했다. 그동안 작년 신입생보다 우수하다는 칭찬을 들었던 터라 모두가 분개했다.

정작 강우는 하품을 내쉬었다. 주기율표를 채우는 일은 열심히 공부했다는 증거는 될지라도 전혀 중요하지 않다. 주기율표는 언제든 책을 펼치면 나온다. 중요한 것은 주기율표를 이해하는 일이다. 아직 채워지지 않은 원소는 굳이 알아둘 필요가 없는 것들이다.

분명히 화학 선생님인 신새벽도 이 사실을 안다. 그런데도 이런 짓궂은 시험을 벌이는 이유가 뭘까.

“이 반에 화학 천재는 없나 봐?”

재차 신새벽이 도발했을 때 손차희가 벌떡 일어났다.

“제가 해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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