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과학고 천재-22화 (22/325)

제22화 작은 성과 (2)

신새벽이 미소를 지으며 손차희를 환영했다.

“오, 드디어 3반 일등이 등장하셨네. 자, 기대해보자. 시작!”

손차희는 잠시 주기율표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73번 탄탈럼, 74번 텅스텐…….”

“78번 백금 옆에는?”

“77번은…… 이리듐요.”

손차희는 막힘이 없었다.

학생들이 경악한 표정을 지었고 신새벽의 얼굴에도 놀라움이 드리워졌다.

손차희는 뿌듯한 기분 속에 열심히 대답했다. 그녀는 중학교 때부터 학교에서도 학원에서도 항상 이런 반응을 즐겼었다. 그만큼 열심히 노력하기도 했었다.

지난 물리 시간과 수학 시간에는 두드러진 모습을 보이지 못했지만 오늘은 다르다. 이 시간은 그녀가 가장 자신 있는 화학이었고 예상대로 그녀는 다른 학생과 다른, 압도적인 실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대단한데?

손차희는 무려 103번 원소까지 채웠다.

103번 자리에 로렌슘을 뜻하는 Lr을 써넣은 신새벽이 손차희를 쳐다봤다.

“여기까지입니다.”

“좋아.”

사실상 그 뒷번호 원소는 자연계가 아닌, 실험실에서 만들어져 짧은 순간 존재하는 원소들이다.

학생들을 쓱 훑어본 신새벽이 104번부터 연이어 적었다.

그렇게 118번까지 칠판에 기입한 신새벽이 웃으며 설명을 시작했다.

“선생님이 중학교 때 세계사 첫 수업 시간이었을 거야. 그때 담당 선생님께서 칠판에 세계지도를 멋있게 그리시는 거 있지? 난 그 장면에서 완전히 반해버렸거든. 그 지도가 완벽했으니까. 총각 선생님이었는데 심지어 선생님마저 너무 멋있게 보이는 거야. 키가 작고 두툼한 안경까지 쓴 그저 그런 남자였는데 내 눈에는 백마 탄 왕자였어. 그 세계지도 하나 때문에.”

학생들의 웃음보가 터졌다.

“그래서 그때부터 나도 그런 멋있는 선생님이 되어보겠다고 결심했어. 안타깝게도 난 세계사나 한국지리처럼 지도를 그릴 수 있는 과목이 아니고 화학이잖아? 그래서 나는 지도 대신에 주기율표를 첫 시간에 칠판에 쓰지.”

“선생님 멋있어요!”

학생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그렇지?”

“네, 선생님 예뻐요!”

“그래, 나도 내가 예쁜 건 알거든.”

정작 강우는 혀를 내두르며 고개를 저었다.

‘으아, 차도도 못지않네. 이 학교 선생님들은 전부 왜 이래?’

그럴 줄 알았다. 저렇게 많은 원소기호를 칠판에 늘어놓을 때부터 이상하다 했더니. 세계사 선생님은 세계지도를 그리고, 한국지리 선생님은 한국 지도를 그리고, 화학 선생님이 주기율표를 그리면 생물 선생님은 호랑이나 사자를 그리나? 정작 물리 선생님은?

물리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쳤던 강우는 무엇을 그려야 하는지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래, 나도 알아. 주기율표 굳이 외울 필요 없다는 거. 그렇더라도 손차희 학생은 대단했어. 그만큼 열심히 공부했다는 거니까. 그런데…….”

강의실을 쭉 눌러보던 신새벽의 시선이 강우와 최대우에게 멎었다.

“여기 앞의 두 학생! 너희는 원소기호 몇 번까지 기억해?”

“그, 그게요…….”

갑작스러운 공격에 강우는 대답할 수 없었다.

“딱 10번 네온까지였어. 10개가 뭐야, 10개가! 중학생도 10개보다는 더 알아.”

주기율표를 쭉 써놓고 보니 추가로 더 기억이 나긴 했지만 그렇다고 변명하기엔 다른 학생과 너무 비교되어 강우는 입을 다물었다.

“누구는 100개를 넘게 기억하는데…….”

강우를 향해 험악한 표정을 짓던 신새벽이 손차희를 향해서는 봄날처럼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손차희가 우쭐한 표정으로 강우에게 시선을 돌렸다.

‘젠장!’

강우의 한숨에 신새벽의 눈썹이 쓱 올라갔다.

“그래서 앞의 두 학생에게는 숙제가 있어요. 다음 시간까지 주기율표를 10번 써와요. 열심히 손으로 쓰다 보면 암기가 될 테니까. 알죠?”

갑자기 엄청난 숙제가 떨어졌다. 완전 날벼락이었다.

“저, 선생님! 요즘 같은 첨단 시대에 손으로 쓰면서 암기라뇨? 그건 좀…….”

“그래서 하기 싫다는 건가요?”

“그, 그게…….”

강우는 옆의 최대우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정작 최대우는 신새벽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싱글벙글하고 있었다.

이 자식이 아무리 선생님이 예쁘기로서니 숙제 폭탄이 터졌으면 화를 내야지, 좋아할 건 뭐야?

“다음 시간까지 10장!”

“눼!”

심드렁하게 대답한 강우는 바로 찌그러졌다.

아무래도 고생문이 활짝 열린 것 같다. 아! 모르겠다. 앞자리고 뭐고 잠이나 자야겠다.

* * *

수업이 모두 끝나고 강우와 최대우는 교무실로 불려갔다.

담임인 차도도의 호출이었다.

평범한 학생이라면 교무실 출입이나 담임의 호출을 달갑지 않게 여기겠지만 강우는 딱히 그렇지 않았다. 겉으로는 어떨지 모르지만, 속으로는 담임 차도도도 그에게는 까마득하게 어린 여자일 뿐이고 선생님이라고 해봐야 과거의 그는 교수였으니 두려울 일은 없다. 다만 과거의 그 직함이 먹히지 않아서 문제이긴 하지만.

교무실은 처음이다.

일학년 담당 선생님들이 모인 교무실은 공간이 꽤 넓었다. 오래전 중고등학교 시절 따닥따닥 책상이 붙어 있던 교무실을 떠올리니 완전 격세지감이 느껴졌다. 어쩌면 요즘도 다른 학교는 마찬가지일지도 모른다. 단지 과학고인 데다 신축 건물이라 공간이 풍족한 것일지도.

“저희 왔는데요?”

강우는 최대우와 함께 차도도의 옆에 가서 꾸벅 인사했다.

차도도는 모니터를 쳐다보며 키보드로 바쁘게 작업하다가 몸을 돌렸다.

“왔어? 상담실로 갈까?”

“그냥 여기서 하면 어때요?”

강우는 상담실행을 거부했다. 후다닥 빨리 끝내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상담실에 들어가면 괜히 잡설이 길어지니까.

차도도가 무슨 말을 할지 대충 감을 잡았는데 역시나 다음에 나온 말은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내가 진단 고사 성적을 분석해봤는데…….”

차도도가 성적이 기록된 자료를 넘겨 강우의 성적표를 찾아냈다.

“전체 124명 가운데 외국에서 특별전형으로 입학한 4명을 제외하면, 강우가 이번 진단 고사에서 수석을 차지했어.”

“네? 수석이요?”

화들짝 놀라는 강우를 달래며 차도도가 미간을 모았다.

“뒤에서. 꼭 말해줘야 알아먹니?”

“어쩐지.”

“별로 놀라지도 않네?”

“그럴 거라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리고 대우는…… 끝에서 세 번째야.”

“전 그나마 훨씬 낫네요?”

함박웃음을 짓는 최대우의 반응에 차도도가 혀를 찼다.

“으그, 웃음이 나오니? 그날 한 명이 아파서 시험을 제대로 못 쳤거든? 그걸 고려하면 너 뒤에는 강우밖에 없어.”

“선생님,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잖습니까?”

“뭐가?”

“꼴찌요. 전교생 학우를 위해 희생한 건데…….”

“으이그.”

강우의 너스레에 차도도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틀린 말은 아니다. 줄세우기식 교육에서는 누군가는 일등을 하고 누군가는 꼴찌를 해야 한다. 비교육적이라지만 안타깝게도 이 사회는 줄 세우기 문화다. 어쨌거나 유의미한 등수 안에 들어야 기업에 취직하고 공무원 시험에도 합격한다.

“그래도 너희 둘 입학시험 성적은 이렇게 나쁘지 않았거든. 진단 고사로 평가하니까 선행을 하지 않은 게 확연하게 드러났어. 그래서 걱정이야.”

과거 과학고 학생들의 성적 분포와 추이를 보면 선행학습 없이 입학한 학생이 얼마나 힘들게 따라가야 하는지 증명되어 있다. 과학고의 취지와는 달리 현실에서는 선행이 앞서나갈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물론 그 학생이 진정한 천재라면 3년 동안 다른 학생을 따라잡고 우뚝 서지만 그녀는 강우나 최대우가 그런 천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녀는 강우와 최대우가 자연스럽게 학습을 따라갈 수 있도록 돕고 싶었다.

“그래서 너희 둘의 분발이 필요해. 선행하지 않았다고 기죽을 필요는 없어. 열심히 하면 충분히 가능하거든.”

차분하게 타이르는 차도도의 설명에 강우는 군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적응 도움 프로그램 살펴봤어?”

“아직요.”

“그거 과거에 이 학교에 적응하지 못한 학생들의 고충을 바탕으로 기초 학습 도우미로 만든 프로그램이야. 열심히 활용해야지? 클래스룸 앱에 들어가면…….”

이어서 차도도가 직접 시범까지 보였다.

클래스룸 앱을 보는 순간 강우는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UI가 개판인 저 앱에 언제 적응할지 앞이 캄캄하다.

“오늘부터 저녁 시간에 적응 도움 프로그램을 수강하도록 해. 이거 검사할 거야. 너희가 지금 따라잡지 않으면 점점 더 힘들어지니까 하기 싫어도 어쩔 수 없어.”

갑자기 숙제 폭탄이 추가됐다.

오늘 화학 시간에도 숙제가 잔뜩이었는데 담임마저 거기에 동참하다니.

은근히 이를 박박 갈고 있으려니 익숙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둘이 벌써 사고 쳤어?”

뒤를 돌아보니 화학 담당 신새벽 선생님이 다가오고 있었다.

“사고 안 쳤는데요?”

심드렁하게 대꾸하자 신새벽이 웃으며 강우의 어깨를 툭툭 쳤다.

“에이, 그런 일로 화내지 마. 선생님 농담한 거니까. 그러면 왜 왔을까…….”

신새벽이 손에 든 책을 차도도 옆 책상에 내려놓았다. 안타깝게도 신새벽의 자리는 차도도의 옆이었다.

“아! 진단 고사 성적이야? 어디 보자…….”

강우와 최대우의 성적을 살피던 신새벽의 표정이 왈칵 일그러졌다.

“에게, 화학 점수가 이게 뭐야? 찍어도 이거보단 더 잘 나오겠다. 게다가 주관식이 0점?”

신새벽이 목소리를 높이며 강우를 뚫어지라 쳐다봤다.

강우는 신새벽의 표정에 헛웃음을 삼켰다. 솔직히 찍은 게 맞긴 하지만. 이 선생님은 대체 화를 내는 건지 아니면 연애하던 남자친구에게 토라진 표정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귀여운 인상이라 화난 표정도 귀염 그 자체다.

“너희 둘 다 진짜로 선행 안 했구나? 역시 내가 선견지명이 있었어. 그럴 때는 주기율표부터 외우는 게 답이거든. 안 되겠다. 10장이 아니라 20장 써야겠네.”

“허억!”

강우는 기겁해서 손을 저었다. 어째 혹이 더 붙는 느낌이다.

차도도가 조심스럽게 달랬다.

“거봐, 신 선생님도 걱정하시잖니? 적응 도움 프로그램 꼭 해. 알겠니?”

“눼.”

불만 가득한 음성으로 대답한 강우는 도망칠 준비를 했다.

신새벽과 미소를 교환한 차도도가 손을 휙휙 저었다.

“이제 가봐도 돼.”

“내일 뵐게요.”

“20장이야!”

“강우야, 대우야! 파이팅!”

주먹을 쥐고 파이팅을 외치는 차도도에게 강우와 최대우는 꾸벅 인사한 다음 몸을 돌렸다.

그때 저편에서 두 사람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강우 학생!”

차도도의 건너편에는 지구과학 선생님인 김선호가 앉아 있었다.

김선호가 오라고 손짓했다.

“과제연구는 잘 되어가?”

“그럭저럭요.”

적당히 대답하면서 우물거리는 강우와 달리 최대우는 신이 나서 김선호에게 늘어놓았다.

“우와, 선생님! 그러잖아도 오늘 밤에 물어보려던 차였는데요.”

최대우를 홀로 놓아두고 도망갈 수 없어 강우도 함께 옆에 붙었다.

“어디까지 진행했지?”

“그게 문제가 아니라 여기가 막혀 계산이 부정확해요.”

최대우가 볼펜을 찾고는 김선호의 책상 위에 놓인 백지에 수식을 쭉 나열하기 시작했다.

강우는 어깨너머로 힐끔 살폈다.

천체 위치의 정확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지구 자전축의 흔들림을 고려해야 한다. 흔히 세차운동이나 장동으로 알려진 현상이다.

강우는 거기까지 고려하기엔 시간이 부족하고 너무 심층적으로 들어가는 것 같아 최대우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그런데 최대우는 어느새 스스로 그 문제점을 파악하고 프로그램에 반영할 고민을 하고 있었다.

‘역시 이 녀석은 천재인가?’

하나를 가르치면 열 개를 안다. 머리 위의 S자가 괜히 나타난 게 아니었다. 짧은 시간에 그 많은 수식을 제대로 이해했으니 천재가 분명했다.

마치 지난 주말에 강우가 조원을 대상으로 설명했듯이 지금 최대우가 백지에 수식을 날아가듯이 유려하게 적어나갔다.

그 모습을 본 김선호의 눈빛이 마구 흔들렸다.

‘이 자식은 또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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