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과학고 천재-23화 (23/325)

제23화 작은 성과 (3)

강우는 즐거운 마음으로 최대우를 지켜봤다.

최대우가 쭉쭉 써 내려가는 수식이 한 페이지를 넘고 두 페이지째 절반을 채웠다.

이윽고 볼펜을 놓은 최대우가 진중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 부분을 이대로 처리하면 오차가 너무 크게 나옵니다. 방법이 없을까요?”

김선호는 바로 대답할 수 없었다. 놀란 가슴을 쓸어넘기면서 간신히 숨을 진정했다.

왠지 엄습하는 싸한 느낌에 강우는 맞은편의 두 선생님을 봤다.

차도도와 신새벽이 입을 쩍 벌린 채 이쪽을 넘겨보고 있었다. 방금 기초가 부족하다고 적응 도움 프로그램을 활용하라고 신신당부했던 학생이 저쪽에서는 완전 천재로 탈바꿈해 있으니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표정이다.

“그, 그게 뭐죠?”

차도도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아, 과제연구요. 이 학생들이 과제연구로 지구과학을 선택했거든요.”

김선호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강우는 차도도의 얼굴에서 실망의 빛을 읽었다.

아마 그나 최대우 때문에 표출한 실망은 아닐 것이다. 강우네 조에는 손차희가 있고 그녀는 물리와 화학에서 강점을 발휘한다. 조의 주도권을 손차희가 쥐고 있었으니 과제연구로 물리를 선택하리라고 예상했었을 것이다.

그런데 과목이 지구과학으로 바뀌었으니 차도도의 실망은 어찌보면 당연했다. 손차희를 주시하고 키우겠다는 분위기였으니까.

김선호의 답변이 이어졌다. 물론 여기까지 수준이 올라가면 김선호라고 해도 바로 답변하기 쉽지 않다. 김선호는 관련 자료와 책을 펼치고 부분부분 설명했다.

내용을 이해한 최대우의 표정이 밝아졌다.

“어디까지 했지?”

“오늘 밤이면 일차 결과물을 보여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생각지도 못한 답변에 김선호의 안색이 확 변했다.

“그걸 주말에 다 했다고?”

“조금 힘들긴 했지만…… 그럭저럭 해결되던데요?”

“누구 작품이지?”

“윤수아요.”

김선호는 그때 봤던 여학생을 떠올렸다.

“저희 고곽천재 조에는 손차희, 윤수아, 강우, 그리고 저, 이렇게 네 사람이 있거든요.”

최대우가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당연히 김선호도 차석 입학자인 손차희를 안다.

“차희가 큰일을 한 것은 알겠는데 윤수아가 뭘 했는데?”

물론 최대우는 손차희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정정하지 않았다.

“수아요? 수아는 프로그래밍 천재예요. 이 수식을 다 코딩해서 프로그램화하던데요?”

“대단하네. 고생했다.”

김선호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최대우를 칭찬했다.

그는 추가로 프로그램에 필요한 기능 몇 개를 설명했다.

최대우가 열심히 듣는 동안 강우는 차도도와 신새벽의 표정을 흥미롭게 관찰했다. 두 선생님 모두 여전히 얼이 빠진 모습이다.

“그럼 저희는 얼른 가볼게요. 저녁에 천문대로 가겠습니다.”

“그래라.”

강우와 최대우가 사라지자 차도도가 벌떡 일어나서 김선호에게 물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지난주에 천문대에서 두 학생에게 도움을 조금 받았었는데 학생들이 거기에서 연구주제를 정한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열심히 할 줄은…….”

김선호가 그간의 과정을 쭉 설명했다.

차도도와 신새벽이 서로 쳐다보면서 고개를 저었다.

“주기율표도 못 외우는 녀석들인데…….”

“시험도 찍는 것보다 못한 수준…….”

“단순히 선행 여부를 판단하는 시험이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웃으면서 반박한 김선호가 수식이 적힌 용지를 다시 훑었다.

차도도는 차분하게 상황을 되새겼다.

뭔가 느낌이 온다. 지금까지 강우의 행적이 조금 특이하다고 여기긴 했지만 최대우마저 그럴 줄은 꿈에도 몰랐다.

과학고에는 학교 성적과 무관하게 각종 국제 올림피아드에서 발군의 재능을 드러내거나 대학교와 협업 연구를 통해 유명 학술지에 이름을 올리는 그런 천재들이 있었다. 방금 강우와 최대우는 그런 천재성의 편린을 보인 것이다.

그녀의 마음을 눈치챘을까. 신새벽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무리 그래도 주기율표를 모르는 학생은 용서할 수 없죠.”

* * *

저녁을 먹자마자 고곽천재 조원들은 세미나실로 이동했다.

네 명이 함께 모여 밥을 먹고 함께 세미나실로 움직이니 유달리 눈에 띄었다. 몇 없는 여학생들이 섞인 조이기도 했고.

“대우야, 어디가?”

“세미나실.”

지나가던 같은 반 남학생이 대우를 붙잡았다. 조원 가운데 둘은 여학생이라 말을 걸기 쉽지 않고 강우는 쉽게 다가가기 어려운 학생이니 남은 학생이라고는 그나마 성격 좋은 최대우뿐이었다.

“세미나실? 진짜 열심히 공부하네?”

“공부라기보단 과제연구.”

“아! 차희가 갈구는구나.”

학생들은 고곽천재 조원들을 불쌍하다는 듯 쓱 살펴보고는 기숙사로 몰려갔다.

손차희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저것들이 뭐래?”

윤수아가 곧바로 손차희를 달랬다. 다년간 함께 다녔던 그녀는 손차희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네가 우리 조의 간판이라서 그러는 거야. 열심히 하는 우리 조가 부러운 거지.”

“그런 거야?”

“아직 주제도 못 정한 조가 대부분일걸.”

어쨌든 고곽천재가 잘 나가고 있다는 말에 손차희는 성질을 죽였다.

그때 옆에서 다시 태클이 들어왔다.

“여어, 씨스더! 잘 돼가?”

무심코 옆을 본 강우의 얼굴도 손차희처럼 일그러졌다.

수업 시간 내내 옆에 앉아서 경쟁하던 조다. 수업 시간에 얼굴을 맞대기도 지겨운데 밥 먹고 휴식 시간에도 얼굴을 보게 되니 짜증이 났다.

“잘 되긴 뭘, 그저 그렇지.”

“우리 과제연구는 엄청 잘 되는 중인데?”

전상철이 살살 약을 올렸다.

손차희가 발끈해서 반격하고 두 사람이 툭탁거리며 어울렸다.

그 옆에서 고현성이 강우를 향해 의미심장한 비웃음을 던졌다.

‘저 자식은 왜 나만 보면 저러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지금 표정을 보니 뭔가 꿍꿍이가 있어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언쟁을 벌이던 손차희와 전상철이 씩씩대면서 손가락을 걸었다.

“좋아! 내기하자고!”

“누가 겁낼 줄 알아? 한판 붙어!”

손차희의 눈에서 불꽃이 타올랐다.

황당해진 강우는 윤수아에게 재빨리 눈짓으로 물었다. 못 말리겠다는 표정으로 윤수아가 고개를 저었다.

어리둥절해 있자니 고현성이 대신해서 설명했다.

“브라더, 이번 금요일에 치르는 2차 진단 고사로 내기하는 거야. 너희 조원 점수 다 합하고, 우리 조원 점수 다 합하고. 당연히 우리 조가 이기지 않을까?”

갑자기 이런 내기가 왜 성립되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손차희가 씩씩대며 반박했다.

“우리가 이겨! 너희 조에 지면 사람이 아니지.”

“올! 차희 그동안 사람 아니었어?”

자신감은 좋지만 가능한 일인가? 강우는 상대 조의 면면을 살폈다.

전상철, 고현성, 조영제, 오동섭.

전상철은 반 2등이니까 1등인 손차희로 승산이 있다. 고현성은 제법 하긴 하는 것 같은데 윤수아도 나름 수재이고 열심히 하니까 엇비슷하려나?

조영제는 모범생이라는 소문이 있다. 수업 시간에도 차분하고. 대충 반에서 중간보다 잘하는 놈이 확실하다. 저 녀석과 최대우를 비교하면 최대우가 이번 시험에서는 죽었다가 깨나도 이기지 못한다.

오동섭은 전상철을 열심히 따라다니는 똘마니다. 겉보기에도 조금 우둔하게 생겼고 수업 시간에도 두각을 드러낸 적이 없다. 대신 수업 시간에 조는 것을 몇 번 봤다. 하지만 저 녀석과 강우 자신을 비교하면 1차 시험에서 이 반 꼴찌였던 강우가 훨씬 불리했다.

이렇게 승산 없는 내기를 갑자기 왜 하는 걸까? 내기라면 이길 가능성을 보고 해야 하지 않나?

손차희에게 절대 안 된다고 말하려던 강우는 그녀의 매서운 눈과 마주쳐야 했다.

‘아, 모르겠다.’

손차희와 전상철이 라이벌이라더니 서로 물러설 줄을 몰랐다. 그 옆에서 실실 웃는 고현성을 보니 이 사태의 주동자가 누구인지 알겠다.

“그래서 뭘 걸 거야?”

“밥 사기!”

“콜!”

그렇게 순식간에 2차 진단 고사에서 조원 성적 합산 대결이 이루어졌다.

강우는 찌푸린 시선으로 고현성에게 물었다.

“밥은 네 녀석이 사는 거잖아?”

“그렇지.”

“그런데 왜 밥을 걸어?”

“그래야 싹 지우지.”

젠장! 밥을 사기 싫었던 고현성이 자기네 조가 이길 내기를 기획한 것이다. 녀석의 귀여운 잔머리에 강우는 이를 갈았다. 거기에 생각 없이 말려든 손차희도 딱하긴 하지만.

녀석들과 헤어진 후 강우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차희야 이길 수 있어?”

“당연하지! 내 사전에는 패배가 없어.”

“그래도 이번에는 좀 힘들 거 같은데?”

손차희가 매서운 눈초리로 강우를 노려봤다.

“너만 시험 잘 치면 돼.”

“어? 그게 무슨…….”

“난 전상철은 이겨. 수아는 잘 대비하면 고현성보다 잘 칠 거고.”

거기까지는 대충 이해했다. 그런데 최대우는 어디로 가고?

“대우도 나름 똑똑하니까 오동섭보다 나을 거야.”

하긴 전상철을 따라다니는 오동섭은 아무리 좋게 봐도 과학고에서 기를 펼 녀석은 아니다.

“그러니까 네가 남은 조영제를 상대해야지. 영제는 공부를 꽤 하거든.”

갑자기 그의 상대가 왜 오동섭에서 조영제로 바뀌었지? 강우는 자신과 다른 셈법에 눈을 부라렸으나 손차희의 반격을 받고 바로 꼬리를 내렸다.

“하여튼! 너만 잘하면 만사가 편해. 2차 진단 고사 잘 쳐. 다른 조원한테 피해 주지 말라고.”

“사, 상대를 바꿔서 셈해봐.”

“그럼 나랑 바꿔 줄까? 상철이 상대할래?”

강우는 피눈물을 삼킬 뻔했다. 말로는 도저히 손차희를 이길 수 없다.

윤수아가 배시시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강우야, 강우야아! 파이팅!”

“크윽!”

예정에 없던 진단 고사 공부를 해야 하나?

* * *

세미나실에서 윤수아는 마지막 남은 정열을 불태웠다.

잠시 후 천문대에서 과제연구 일차 점검을 받을 작정이었기에 윤수아는 식사 후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바로 프로그램 수정에 매달렸다.

열심히 키보드를 두드리다 잠깐잠깐 고민에 빠지는 윤수아를 보며 강우는 옆에서 마음 속으로 응원하고 있었다.

그녀의 노트북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아마 그녀의 심장은 더 뜨겁게 뛰고 있겠지. 정열을 불태우는 어린 과학도의 숙명이다.

최대우는 수식을 하나하나 분해해서 윤수아에게 던져주고 있었다.

손차희는 몇 번이나 거들려고 하다가 윤수아의 만류로 포기했다. 대신에 손차희는 진단 고사 공부를 시작했다. 평소 어깨 뒤로 늘어트린 머리카락을 앞으로 내리고 한 손으로 만지작거리면서 공부에 열중했다.

강우는 고생하는 윤수아를 위해 프로그램 관련 아이디어를 던져줬다. 프로그래밍 실력은 그녀보다 떨어졌지만 전체 방향과 이를 구현하는 수식에 한해서는 그가 월등히 앞서있었다.

“중간 계산 결과 확인해봐. 자료에 다른 소행성 궤도요소 샘플이 적혀있거든.”

그의 언급에 최대우가 재빨리 수식을 쉽게 풀어서 윤수아에게 전했다.

“앞에 나온 식과 겹치는데?”

윤수아가 의문을 제기하면 최대우가 옆에서 연필로 식을 해체했다. 강우는 둘이 큰 고생을 하기 전에 식의 틀린 부분을 잡아줬다.

한참 키보드를 두드리던 윤수아가 마침내 환호성을 터트렸다.

“짜잔! 드디어 완성했어!”

“그럼 시험해봐야지.”

윤수아가 프로그램을 실행하고 기본 관측값을 인풋 데이터로 넣었다.

노트북 화면이 잠잠했다.

최대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한데?”

“무한루프 도는 중……, 으으! 역시 한 방에 되는 일이 없어!”

윤수아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새로운 연구란 원래 이런 식이다. 남이 가던 길이 아니기에 그 길이 맞는지 아닌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럴수록 성공했을 때의 성취감은 더욱 크다.

다른 학생이라면 한 달이 넘게 걸렸을 이 작업을 고곽천재는 불과 며칠 만에 그 끝을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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