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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떠보니 과학고 천재-25화 (25/325)

제25화 작은 성과 (5)

물론 최대우가 배신한 게 아니라 강우가 적응 도움 프로그램을 수행할 의사가 없어서였다.

차도도에게 한소리 들으니 먹던 밥이 더 목에 걸리는 느낌이다.

“과제연구는 잘 되어간다고 김선호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더라.”

“그렇죠? 그거 다 제가…….”

“수아가 열심히 했다던데?”

차도도가 다시 눈썹을 쓱 올렸다.

변명하려던 강우는 바로 식판으로 시선을 돌렸다. 차도도가 준 스테이크 조각이 오늘따라 맛이 없어 보인다.

차도도의 목소리가 진지해졌다.

“강우야? 공부하기 싫은 것은 아닐 테고…… 공부가 힘들지?”

“아뇨.”

“솔직하게 말해도 돼. 과학고 들어와서 처음에 적응 못 하는 학생들도 많아. 괜히 숨기면 더 힘들어.”

아무래도 관심사병으로 확실하게 찍힌 것 같다.

“그래서 말인데…… 내가 너를 확실하게 챙기려고. 의외로 너에게 대성할 자질이 엿보이거든.”

안 챙겨도 된다고 말할 수 없어 강우는 더욱 속이 답답해졌다.

“네가 과제연구를 열심히 하니 반갑지만 지금 정작 중요한 것은 그게 아냐. 진단 고사지. 이번에도 전교에서 꼴찌 할 수는 없잖아?”

“꼴찌는 아닌데…….”

“자자, 많이 먹어. 힘내고.”

차도도가 스테이크 조각을 하나 더 얹어주었다.

“그래서 오늘 저녁부터 나랑 톡으로 매일 연락하자, 응? 넌 그날 공부한 것을 나에게 보고해.”

“네? 제가 초딩도 아니고…….”

“내 눈에는 넌 초딩과 똑같아.”

“……!”

졸지에 어린아이 취급을 받게 된 강우는 황당했다. 어떻게든 바른길로 이끌려는 담임의 노고가 가상하지만 솔직히 정신 연령으로 따지면 그가 한참 위 아닌가.

“어? 강우 이 자식! 눈을 부릅뜨네? 귀엽게. 하여튼 이번에는 열심히 해보자, 파이팅!”

예쁜 눈동자를 반짝이며 주먹을 쥐는 차도도를 코앞에서 보고 있자니 강우는 바로 마음이 흔들렸다.

누가 얼굴이 서사요 진리라고 말했던가. 이번 시험에서는 지난 시험처럼 절대 찍고 자도록 내버려 두지 않겠다는 차도도의 의지가 엿보였다.

미모에 저절로 설득됐다. 이왕 해야 한다면 전리품을 챙겨야 한다.

“쌤.”

“강우야, 왜?”

“열심히 하면 뭐 해주실래요?”

“응? 열심히 하면 네가 좋은 거지, 내가 왜?”

“에이, 그러지 말고 인심 좀 쓰세요. 정말 잘할지 혹시 알아요?”

조용히 강우를 바라보던 차도도가 피식 미소를 지었다.

“좋아, 네가 열심히 한다면 못 해줄 게 뭐 있겠어? 열심히만 해.”

“약속한 거예요?”

“그래. 강우, 파이팅!”

역시 차도도는 화끈했다.

명확하진 않더라도 뭔가를 건졌다는 생각에 강우는 희희낙락했다.

어차피 고현성네 조와 내기를 하기로 하지 않았던가. 이참에 하기 싫은 고등학교 공부를 해야 할 것 같다. 시험을 잘 치면 고현성과 차도도 양쪽을 우려먹을 수 있으니 일석이조라고 해야 하나.

* * *

밥을 먹고 식당을 나왔더니 손차희를 비롯한 동료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어째 손차희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안색이 울긋불긋한 것이 흡사 술이라도 한잔한 것 같다.

“쟤 왜 저래?”

강우는 조심해서 최대우에게 귓속말로 물었다. 괜히 이럴 때 손차희를 잘못 건드리면 바로 지옥행이니까.

“이민찬이랑 한바탕했어.”

“이민찬이 왜?”

“이민찬이 2차 진단고사에서도 차희를 밟아버리겠다고 장담했거든. 과제연구도 자신 있다고 팍팍 우기고.”

듣고 보니 별일 아니다. 꼬맹이들이 흔히 저지르는 도발에 불과한데 저런 도발에 당하는 손차희 또한 어린 학생이었다.

불행하게도 다음 순간 손차희의 시선이 강우에게 꽂혔다.

“강우! 모든 건 너한테 달렸어.”

“나한테?”

어이없는 표정으로 강우가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고현성 조와 내기는 이겨야지!”

“네가 이민찬이랑 겨루는 거 아니었어?”

“이민찬이나 고현성이나.”

“왜 하필이면 나야?”

“90점이 100점 받는 게 효과적일까? 10점이 90점 받는 게 효과적일까?”

“그야 당연히…….”

뭔가 맞는 말인 것 같긴 한데 대답하다 보니 제 발목을 묶는 기분이다.

“점수 제일 많이 올릴 수 있는 사람이 바로 너야.”

손차희의 눈에서 불꽃이 튀는 듯했다.

강우는 속으로 이민찬을 욕했다. 그 녀석 때문에 괜히 욕을 먹고 있다.

문득 손차희의 분노를 풀어줄 방법이 생각났다.

* * *

교문에서 멀지 않은 떡볶이집에 학생들이 모였다.

저녁 식사가 학교에서 제공되기에 굳이 밖에서 먹을 일은 없지만 아무리 식단이 좋아도 학교 식당 밥은 입에 물리기 마련이다.

그래서 가끔 학교 밖에서 저녁을 해결하는 학생들이 있었다.

“뭘 먹을까?”

메뉴를 훑으며 강우는 조원들에게 의견을 물었다.

“이거 강우가 사는 거야?”

손차희가 신기한 듯 재차 확인했다. 시골 출신인 강우와 최대우는 아무래도 집안이 넉넉하지 않다는 것을 손차희도 알고 있었다.

강우는 손을 저으며 대답했다.

“내가 돈이 어딨어. 다른 사람이 사는 거야.”

“누구?”

“곧 올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고현성이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고현성은 강우와 한 테이블에 앉아 있는 학생들을 보고는 몸이 굳었다.

“어? 브라더! 왜 이리 많아?”

“네가 밥 사기로 했잖아? 잘 생각해봐.”

“진단 고사 내기 뒤로 미뤘는데…….”

“난 미룬 적 없다.”

고현성은 그날 했던 내기를 다시 떠올렸다. 기억이 감감하다. 그냥 강우에게만 밥을 사주기로 한 게 아니었나?

그가 이기면 강우가 차희에게서 손을 떼기로 했다. 반대로 그가 지면 강우에게 밥을 산다고 했던가? 아무리 생각해도 강우 혼자였는지 아니면 다른 사람을 포함했었는지 기억이 없었다.

버럭 소리를 지르려던 고현성은 자신을 쏘아보는 손차희의 매서운 눈빛과 마주쳤다.

여기에서 따지고 들면 그녀에게서 쫀쫀한 녀석이라고 욕을 먹을 게 확실했다. 그건 돈을 날리는 것보다 더한 수치다.

“더 비싼 곳으로 갈까?”

“아, 알았어. 대신에 내가 합석해도 되지?”

고현성은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손차희와 같이 밥을 먹을 수 있다면 꼭 손해만은 아니다.

“당연히 물주니까 앉아도 되지.”

능글맞은 강우의 태도에 고현성은 이를 갈았다.

간신히 영업용 미소로 위장한 고현성은 강우를 무시하고 손차희에게 수작을 걸었다.

“씨스더, 아무거나 골라. 내가 사는 거니까.”

“차희야, 제일 비싼 걸로!”

강우가 옆에서 부추겼다. 떡볶이집에 특별한 메뉴가 없는 게 아쉬울 판이다.

사준다는데 사양할 손차희는 아니었다. 즉석떡볶이 5인분이 주문메뉴에 올랐다.

떡볶이가 끓는 동안 고현성은 손차희에게 작업을 개시했다.

“씨스더, 과제연구 다 했어?”

손차희의 반응이 시큰둥했으나 고현성은 굴하지 않고 계속 말을 걸었다.

“우리는 거의 다 끝났는데 그래서 열심히 진단 고사를 준비하고 있지.”

손차희의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

지금 중요한 것은 2차 진단 고사다.

이 시험은 지난 1차 때처럼 상위 학생의 성적이 공개된다. 거기에다 내기까지 걸렸다. 그렇다 보니 고현성의 말이 심상치 않게 들렸다.

강우는 고현성의 전략을 꿰뚫어 봤다. 이 녀석은 손차희의 불안함을 살살 건드리고 있었다.

받은 만큼 돌려주는 법. 내버려 둘 강우가 아니었다.

“너희 주제가…… 근의 공식이라 했지? 그거 어려울 텐데 용케 다 했나 봐?”

“크크, 그 정도야.”

고현성이 어깨를 쭉 폈다.

고현성네 조는 다항식의 근의 공식을 연구하기로 했고 관련 답을 학원에서 받아왔다. 다만 거기까지다. 벌써 끝났다고 모두 손을 놓고 있었다. 애초에 과제연구를 열심히 할 생각이 없었기에 구색만 갖추어 보고서를 낼 생각이었고 지금은 서로 상대에게 보고서 마무리를 떠넘기는 중이었다.

내기를 이기려면 고현성네 조를 그대로 놓아두어서는 안 된다. 문득 생각난 듯 강우가 입을 열었다.

“아! 너희 조가 근의 공식 문제를 연구한다니까 정명욱 선생님께서 무척 기대한다고 하셨어.”

“어…… 그래?”

“수업 시간에 너희가 얼마나 잘 이해했는지 물어보신다고…….”

“끙!”

별안간 고현성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강우는 내심 킥킥대며 웃었다. 수학 선생님이 직접 물어본다면 적당히 보고서만 낼 수 없다. 적어도 보고서에 쓴 내용을 알고 있어야 하지 않는가. 학원에서 준 답을 그대로 베껴 제출하려던 전략에 문제가 생겼으니 저들은 과연 어떻게 할까?

수학 선생님에게 진위를 물어볼 수도 없으니 진단 고사에 집중하기 어려워진다.

다음 내기의 승산이 보이는 듯했다. 물론 가장 중요한 핵심은 강우네 조의 분발이고 그 열쇠는 강우가 쥐고 있었다.

* * *

“이거부터 봐.”

손차희가 강우에게 학원 교재를 툭 던졌다. 수학과 과학, 그것도 과학영재고 진단 고사 대비용이다.

예전에 강우는 이 교재를 본 적이 있었다. 가우스 카페에서 관성모멘트가 나온 물리 문제를 보고 말도 안 되는 선행이라고 욕했었는데.

강우는 이런 식의 문제를 풀 생각이 없었다.

이미 과거에 한 번 공부했던 내용이다. 당연히 처음 보는 학생과 그 이해도가 다르다. 다만 아직도 수업 시간에 헤매는 이유는 예전의 기억을 제대로 되살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난 이런 요약문제집은 안 봐.”

“왜?”

손차희가 그를 향해 무언의 강요를 계속했다.

“이건 완전히 암기잖아? 똑같은 문제가 나오면 대박이지만 조금만 비틀어내어도 제대로 못 풀지.”

“그래도 이 문제집은 적중률이 꽤 높아.”

손차희도 물러서지 않았다. 무려 내기가 걸려 있기 때문이다. 강우가 꼴찌를 하든 말든 그녀가 신경 쓸 일은 아니지만 전상철네 조에 뒤지는 것은 자존심 문제다.

강우는 손차희의 마음을 짐작했다.

“흠, 좋아. 그럼 일단 기본서부터 줘 볼래?”

‘수학의 정석’ 책이 넘어왔다. 가장 많은 학생이 본다고 알려진 수학 참고서다.

“미적분 부분부터 보면 되지?”

“좋아, 그다음에 학원 문제집으로 실력을 확인해보자.”

손차희는 자신 있었다. 학원에서 준 문제집은 어려워서 처음 배운 사람이라면 절반도 손을 대지 못할 테니까. 그 실상을 알게 되면 강우도 고분고분 그녀의 말을 듣고 공부할 것이다.

손차희가 과제연구 보고서를 정리하는 동안 강우는 수학 기본서에서 미적분을 다시 훑었다. 굳이 미적분을 선택한 이유는 그의 머리에 가장 많이 남은 수학 분야이기 때문이다. 이미 대학에서 심화 미적분을 끝내서 근대 유명 수학자들과 맞먹을 수준이지만 지금 당장은 수능 유형을 다시 훑어볼 필요가 있다.

불과 1시간 만에 강우는 기본서를 싹 훑었다.

“끝났어.”

손차희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그동안 힐끔거리며 감시했더니 강우가 마치 장난치듯이 책을 슬슬 넘기고 있었던 탓이다. 내기를 떠올리면 피가 마르는데 정작 당사자는 여유만만이니 기분이 좋을 리 없다.

아무리 천재여도 기본서를 한번 보고 문제를 완벽하게 풀 수 없다. 과거를 돌이켜보면 그녀도 익숙해질 때까지 꽤 시간이 걸렸다. 그렇기에 그녀는 강우가 제대로 문제를 풀지 못하리라고 예상했다.

“여기까지 풀어야 해.”

손차희는 싸늘한 표정을 지우지 않고 학원에서 받은 문제집에서 미적분 파트를 손수 펼쳐줬다.

“제한 시간은 1시간이야.”

총 30문항이었다. 이미 한번 풀어본 그녀도 1시간 내로 다시 풀 자신은 없었다. 하물며 겨우 기본서를 본 강우는? 몇 문제 풀기도 전에 강우가 항복하리라 예상했다.

강우가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윤수아와 최대우는 테이블에 앉아 본인의 공부에 몰두해 있었고 강우를 신경 쓰는 사람은 오직 손차희뿐이었다.

스윽- 스윽-

펜 소리만이 귀를 울렸다.

보고서에 집중하려는 노력이 물거품이 될 만큼 손차희는 강우가 신경 쓰였다. 녀석은 천재가 아니니 결과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데…….

시계를 보니 20분이 흘러 있었다. 얼핏 보니 강우는 벌써 저 아래쪽 문제를 풀고 있고.

‘몰라서 스킵했나…… 어?’

손차희는 강우의 손놀림에 눈을 부릅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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