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화 2차 진단 고사 (1)
강우의 공부법은 특이했다.
기본서를 볼 때 마치 만화책을 보는 듯 여유로운 자세로 빠른 속도로 페이지를 넘겼다. 물론 이렇게 보인 이유는 강우가 이미 미적분에 해박한 지식을 가졌기 때문이다. 미적분 고수가 미적분 기초에 무슨 내용이 있나 훑어보는 경우와 같았기 때문이다.
정작 이를 모르는 손차희는 강우의 태도를 오해했다. 공부하기 싫어서 대충하는 것으로.
시험 문제풀이도 마찬가지였다.
강우는 한국대 물리학과에 입학했던 천재였고 그 후에도 상온 핵융합에서 세계적인 성과를 이룰 뻔한 인물이었다. 당연히 고등학교 수학에서 그의 이해도는 손차희의 상상을 불허했다. 계산 속도도 마찬가지.
일반적인 고등수학 문제라면 그는 암산으로 순식간에 해결 가능했다. 복잡한 문제를 머릿속으로 풀면서 간간이 숫자 몇 개만 연습장에 적는 것으로 남들이 한 페이지 가득 적은 풀이과정을 대신할 수 있었다.
지금 강우가 보여주는 문제풀이는 손차희가 생각해본 적도 없는 방식이었고 속도 또한 빨랐다.
‘그냥 막 찍고 넘어가나?’
손차희는 안면을 확 찌푸렸다.
쓱 보더니 답을 적고 다음 문제를 쭉 훑었다.
‘제대로 푸는 건 아니겠지.’
분명히 대충 푼다고 확신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찜찜했다. 배우지도 않은 미적분을 기본서 한번 훑고 저 속도로 푼다면 그건 천재가 아니라 천재 할아버지쯤 될 것이다.
게다가 강우의 진단 고사 성적은 매우 나쁘다고 들었었다. 그러니까…….
문득 강우의 그간 행적이 떠올랐다. 카페에서 관성모멘트를 설명한 일과 물리 시간에 조를 우승시켰던 사건, 거기에 근의 공식 시험을 혼자서 다 맞췄고, 과제연구인 소행성 추적을 이론적으로 완벽하게 풀어냈다……. 하지만 원소 주기율표에서는 중학생 수준도 안 되는데…….
손차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녀가 고민하는 사이 강우가 펜을 놓았다.
강우의 표정은 무덤덤했다. 방금 열심히 시험을 끝낸 사람 같지 않다.
“시간이…… 30분이나 걸렸어.”
강우는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긁었다. 30분이나 걸린 게 영 미덥지 않다는 표정이다.
손차희는 시계를 확인하고 눈을 찌푸렸다. 제한 시간 1시간짜리 문제인데 얼마나 엉터리로 풀었으면 불과 30분일까. 물론 쭉 찍고 자겠다면 1분에 다 풀 수 있지만.
“다 풀었어?”
“당연하지.”
“줘봐. 내가 채점해줄게.”
손차희는 강우가 스스로 채점하기를 원치 않았다. 그녀가 채점해서 강우 실력을 낱낱이 파헤쳐줄 생각이었다.
채점은 어렵지 않다. 객관식이 대부분이라 답지를 보고 채점하면 끝이다.
“음……, 어…… 어?, 허억!”
손차희의 입에서 발해지는 소리가 바뀌었다.
강우는 별일 아니란 듯 빙그레 웃었다.
“강우! 너…… 미적분 예전에 공부했었어?”
“조금.”
“조금? 이게 조금? 그런데 어떻게 다 맞춰?”
불과 기본서 한 번 읽고 30분 만에 풀었음에도 한 문제도 틀리지 않았다. 게다가 그 문제 중간중간에는 고등학교 과정을 벗어나는 어려운 수준의 문제도 섞여 있었다.
“그냥…… 쉽던데?”
“답지 봤지? 그렇지?”
“그럴 리가. 난 답지가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어.”
강우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고는 학원 문제집을 한쪽으로 밀쳤다.
“이제 내 말 알겠지? 난 학원 문제집은 필요 없으니까 기본서만 좀 빌려줘.”
증명해버렸으니 손차희는 더는 딴지를 걸 수 없었다.
아직 강우가 괴물이라거나 천재라고 확신할 수는 없으나 범상치 않다는 것만은 인정해야 했다. 분하게도.
“이제 내가 알아서 공부할 테니까 넌 얼른 보고서 마무리해. 그것도 급하거든.”
강우의 다그침에 손차희는 나라 잃은 표정으로 노트북에 보고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정작 그녀의 시선은 모니터에서 떨어져 강우를 몰래 훔쳐보는 시간이 더 많았지만.
강우는 의기양양하게 수학 기본서를 펼치고 공부하는 척했다.
동시에 그는 테이블 위에 놓아둔 과자로 손을 뻗었다. 윤수아가 공부할 때 입이 심심하다며 편의점에서 사 온 과자였다.
그런데!
“아니? 이거 누가 다 먹었어?”
그의 손에 잡힌 것은 속이 빈 봉지뿐이었다. 킥킥 웃는 소리와 함께 윤수아의 입가에 묻은 과자 부스러기가 그의 마음을 찢어지게 했다.
누가 비폭력을 외쳤던가! 살인 충동을 느끼는 순간 윤수아의 해맑은 미소를 보고 강우는 바로 찌그러졌다.
‘수아가 샀던 거였지…….’
그리고 이어서 날아온 톡이 그를 좌절하게 했다.
- 차도도 쌤 : 강우우~ 공부하니?
매일 톡으로 점검할 거라더니 정말 톡이 날아왔다. 이 선생님은 퇴근했으면 데이트라도 할 것이지 퇴근 후에도 일하다니!
- 강우 : 열심히 공부 중입니다.
- 차도도 쌤 : 적응 도움 프로그램 접속 안 했던데?
- 강우 : 으악! 할게요.
- 차도도 쌤 : 화남(이모티콘)!
강우는 참담한 심정으로 윤수아에게 시선을 돌렸다.
“수아야, 내가 정말 공부하고 싶은데…… 방해물이 너무 많아. 나 대신에 클래스룸 앱 좀 접속해줄래?”
강우는 윤수아에게 핸드폰을 넘겼다.
“어? 그런 부탁쯤이야, 금방 해줄게.”
“담임쌤이 접속 안 했다고 마구 야단쳐서…….”
“우리 담임이 그런 면에서는 철저하지.”
“그렇지? 앞으로도 부탁해!”
과연 윤수아는 천사였다. 얼굴만 귀여운 게 아니라 마음도 하얗다.
* * *
2월 마지막 금요일은 2차 진단 고사 시험일이다.
이날 시험을 치고 자정까지 과제연구 보고서를 제출하고 나면 예비입학기간이 종료된다. 3월 1일은 노는 날이고 2일에 입학식 후 정식 고려 과학고 입학생이 된다.
금요일 오후에 강우는 1차 때와 유사한 시험지를 받았다.
그는 1차 때처럼 가장 뒷좌석에 앉아 시험을 쳤다. 오늘 시험감독은 신새벽. 화학 선생님이었다.
“자! 날마다 오는 시험이 아니야! 모두 열심히 쳐야지. 옆으로 눈 돌려봐야 도움 안 돼요. 왜냐? 옆 친구도 못 풀거든.”
신새벽의 외침에 학생들이 킥킥대며 웃었다.
“거기 뒤에 강우 학생! 옆으로 눈 돌리지 말라고 했어? 안 했어?”
다른 학생들을 휙휙 둘러보다가 바로 딱 걸렸다. 강우는 후다닥 시선을 책상 위로 고정하고 문제지를 훑어보는 척했다.
너무 관심을 받아서 탈이었다. 주기율표를 외우지 못한 이후로 신새벽은 그의 이름을 기억했다. 물론 결정적인 이유는 신새벽이 냈던 숙제 때문이었다.
주기율표를 20번 써오라는 숙제를 강우는 시간 내에 해내긴 했다. 한 번 쓰는데 무려 20분이나 걸리는 고된 노동이었다.
당연히 강우는 이 노동을 20번이나 반복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한 번 쓴 용지를 가지고 교내 컴퓨터실을 찾은 다음 스캔해서 복사했다. 문명의 이기는 열심히 활용해줘야 발명한 사람이 서럽지 않은 법이다.
그렇게 1장은 직접 쓰고 복사한 19장을 첨부해서 신새벽에게 제출했다.
그리고 딱 걸렸다.
어이가 없던 신새벽은 야단조차 치지 않았다. 단지 담임인 차도도에게 조용히 일렀을 뿐이다.
다행히 차도도는 노처녀 히스테리를 부리지 않았다. 아직 노처녀가 아니어서인가? 하여튼 나중에 입학 후에 보자고 인상만 확 구겼다.
그날 이후로 강우는 신새벽을 피해 다녔는데…… 안타깝게도 시험감독이 신새벽이었다.
수학 문제지를 쓱 살펴보니 과연 공부한 보람이 있었다.
진단 고사를 못 치면 호적을 파내는…… 아니 조에서 쫓아낸다는 손차희의 협박 때문에 수학 기본서를 한차례 쭉 훑었었다. 최근 며칠 동안 그가 공부한 유일한 내용이었다. 당연히 과학은 전혀 하지 않았다.
고현성과의 내기가 고민스럽긴 했지만 설마 진다고 손차희가 진짜 쫓아내기야 할까.
“아는 거 없더라도 열심히 풀어요.”
그의 옆에 다가와서 책상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신새벽이 말했다.
강우는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더욱 고개를 숙여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쉽다. 고등학교 과정의 이런 문제는 수학의 기본을 다시 다진 그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대부분 학생이 어려워하는, 사고력을 측정하는 문제는 더 쉬웠다.
마지막 주관식 문제들을 본 순간 강우는 눈을 찌푸렸다.
이건 완전히 대학 미적분학에서 다루는 내용이다. 나름 킬러 문제라고 냈나 본데 이런 문제를 강우는 대학교 때 무수히 다뤘다. 오히려 고등학교 수학보다 훨씬 익숙했다.
다변수 그래디언트를 활용한 최대최소와 맥클로린 급수 전개를 응용한 문제라니! 이런 문제를 고등수학 지식으로 풀려면 계산량이 많고 매우 복잡하지만, 대학 미적분학 개념을 차용하면 순식간에 풀린다.
강우는 금방 깔끔하게 정리된 식으로 풀어냈다. 너무 군더더기가 없어 오히려 관련 개념을 유도하고 풀이과정을 더 세세하게 적어야 할 정도였다.
끝내고 나니 이제 30분이 지났다. 아직도 30분이 남았다.
‘잠이나 자자.’
강우는 그대로 책상 위에 엎드렸다.
툭툭!
누군가가 그의 머리를 건드렸다. 마침 시험을 못 쳤다고 손차희에게 혼쭐이 나는 꿈을 꾸고 있었기에 강우는 기겁하고 몸을 일으켰다.
“차, 차희야?”
“거기서 차희가 왜 나오니?”
“네?”
“너희 사귀니?”
“푸하하하!”
그의 옆에는 신새벽이 허리에 손을 턱 올리고 있었고 학생들은 웃느라 난리였다.
젠장! 잠자는 사자의 코털은 건드리지 않는 법인데 무려 머리를 두드리다니. 괜히 신새벽에게 눈을 부라리다가 재차 꿀밤을 얻어맞았다.
“풀지도 않고 자면 어떡해?”
“다 풀었는데요?”
강우는 답지를 쓱 내보이며 항의했다.
“찍은 거잖아? 이번 수학 문제 어렵게 냈다고 들었어. 시간 내에 다 못 풀 만큼. 그런데 아직 시간 많이 남았는데 다 풀었다는 게 말이 돼?”
신새벽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굳이 말다툼할 이유가 없기에 강우는 입을 닫았다.
신새벽이 강우의 머리를 쓱쓱 매만지며 달랬다.
“강우야, 물론 네 마음은 아는데 그래도 시험은 충실하게 쳐야지. 그렇지?”
싸늘한 차도도와 달리 부드러운 신새벽이 작정하고 다정하게 어르자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이 정도면 넋을 놓지 않을 남자가 없을 것 같다.
“아는 것만이라도 차근하게 풀어보렴.”
신새벽은 몇 차례나 강우에게 시선을 맞추더니 교탁으로 돌아갔다.
‘으아, 이건 꼬리가 아홉 개가 확실하다.’
강우는 어쩔 수 없이 잠자는 것을 포기하고 문제지를 뚫어지라 쳐다봤다.
* * *
과학시험이 시작됐다.
1차 때와 마찬가지로 물리, 화학, 생물, 지구과학 네 과목이다.
강우는 물리부터 시작했다. 전공이기에 역시 막히는 건 없다. 객관식부터 시작해서 주관식까지 단번에 싹 풀었다.
이런 쓸데없는 문제를 냈냐고 내심 욕하려다가 담임인 차도도를 욕하는 것 같아 참았다. 어쨌든 차도도는 그를 공부시키려고 하는 고마운 사람이었다.
물리를 끝내고 화학을 펼치니 눈앞이 깜깜했다.
며칠간 그가 공부한 분야는 오직 수학. 수학 기본서만 싹 훑었다. 그렇다 보니 화학이나 생물, 지구과학은 생각 나는 게 없었다.
제대로 풀어보려고 화학 문제를 몇 개 봤더니 역시나 아는 게 없었다.
‘하! 화학이 이렇게 어려웠나?’
어떻게 찍을까 고민하다가 용트림하는 지렁이 한 마리를 그려 넣었다. 역시 천재적인 예술가 기질이 드러난다.
“화학도 끝났고…….”
막 생물로 넘어가려는데 누군가 머리를 툭툭 건드렸다.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보니 신새벽이 도끼눈을 하고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강우 학생! 뭐해?”
“저요? 보다시피 화학 문제 푸는데요?”
“너! 또 찍고 잠자려고?”
“허억!”
강우는 다급하게 답지를 팔로 가렸다.
신새벽이 그의 답지를 노려보면서 안면을 확 구겼다. 심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