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화 2차 진단 고사 (2)
신새벽의 손가락이 문제 하나를 가리켰다.
“너 말이야, 주기율표 외웠다고 했잖아? 이 문제는 주기율표 알면 바로 풀리는 문제야!”
당연히 강우는 알지 못했다. 문제를 제대로 읽지 않았으니 그런 문제인지 알 리가 없다.
“그리고 주관식은 왜 안 푸는데? 이건 주기율표 써넣으라는 문제잖아?”
아직 주관식은 풀기 전이라고 변명하려다가 참았다.
“그, 그러네요.”
“그럴 줄 알았어. 숙제를 냈더니 복사해서 제출하는 녀석은 네가 처음이야!”
“그, 그게요.”
“나를 심쿵하게 만든 학생은 네가 처음이라고! 너 때문에 내 마음이 찢어진다 찢어져!”
그들의 대화를 들은 학생들의 폭소가 터졌다.
눈앞에 용트림하고 있는 지렁이를 그려놓은 증거가 있으니 아니라고 반박하지도 못하겠다.
신새벽이 나중에 두고 보자는 눈빛을 발산하고는 다른 학생에게로 이동했다.
강우는 긴 숨을 내쉬며 마음을 진정시킨 다음 주관식 문제를 살폈다. 역시 주기율표를 채우는 단순한 문제다. 그나마 주기율표 앞부분을 조금 외우긴 했다.
강우는 아는 부분까지 원소기호를 기입한 다음 생물로 넘어갔다.
생물도 화학과 마찬가지였다. 기억 나는 내용이 하나도 없었다.
이번에는 답지에 기둥을 세웠다.
지구과학은…… 천문 분야는 물리의 친척이라 그나마 풀고, 나머지는 한국말인지 외국 말인지 구분이 안 된다.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서 강우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다행히 신새벽이 깨우지 않아 이번에는 단잠을 잘 수 있었다.
* * *
시험이 끝난 날 밤에 고곽천재는 천문대에 모였다.
소행성 아스트리아의 마지막 관측이 예정된 이 날에는 담당 교사인 김선호가 온전히 그들에게 모든 관측을 맡겼다.
그동안 천체망원경 다루는 방법을 유심히 보고 배웠기에 어려움은 없었다.
“나만 믿으라고!”
큰소리치는 최대우를 보조하면서 강우는 녀석의 천재성을 다시 확인했다. 천체망원경 앞에서는 사실상 기계치나 다름없는 그와 달리 최대우는 그야말로 날아다녔다. 심지어 윤수아마저 천체망원경을 제어하는 컴퓨터 앞에서 실력을 뽐냈다.
두 사람의 활약에 가장 당황한 사람은 손차희였다.
“얘네들 언제부터 이렇게 잘했어?”
“낸들 알아?”
간단하게 받아친 강우는 열린 돔 사이로 밤하늘을 올려보았다.
별이 듬성듬성 떠 있는, 무한한 우주는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문득 지방대 교수직을 맡은 후 그곳에서 보았던 하늘을 떠올렸다. 촘촘히 별이 박혀있던 까만 하늘은 이곳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별이 많았다.
서울의 하늘은 도심 불빛 때문에 확실히 감흥이 덜하다.
‘울릉도에서는 얼마나 많은 별이 보일까?’
최대우가 별 보기를 좋아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그그긍-
천체망원경이 움직였다.
윤수아가 개발한 프로그램으로 지금까지 얻어진 네 번의 관측자료를 이용해서 현재 시각의 소행성 아스트리아의 위치를 구했다.
이제는 그럴싸하게 변모한 프로그램은 사용하기에도 간편했다.
망원경이 한 곳을 겨냥하고 그곳을 CCD 카메라에 담았다. 화상을 전송받은 윤수아는 곧바로 기존 항성 데이터와 비교해서 소행성이라 예상되는 작은 별을 찾아냈다.
그렇게 구한 실제 위치는 프로그램에서 계산한 위치와 불과 1.2초각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오차라 보기 힘든 대단히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만일 충분한 입력 데이터가 존재한다면 계산 결과도 더 완벽해질 것이다.
“예상대로 성공했어!”
윤수아가 주먹을 불끈 쥐며 환호성을 터트렸다.
망원경으로 관측한 결과를 살펴본 강우는 손차희에게 확인했다.
“밤까지 보고서 제출할 수 있지?”
“이미 거의 다 끝냈어. 오늘 내용만 덧붙이면 돼.”
“고생했네.”
“내가 진단 고사 공부도 제쳐 두고 열심히 했는걸. 오늘 밤에 마지막 버전 돌릴 테니까 수정할 거 있으면 말해. 없으면 그냥 제출한다.”
강우는 내심 손차희에게 손뼉 쳐주고 싶었다. 뒤늦게 뛰어들어 내용을 배우면서 보고서를 쓰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특히 그녀처럼 자존심이 센 경우는 더욱 그렇다.
그래서 그녀에게 감사하려는 순간.
“아! 그렇지. 강우!”
갑자기 도끼눈을 뜨고 손차희가 강우를 노려봤다.
“으…… 응?”
“오늘 시험 잘 쳤어? 너한테 달려 있다는 거 알지?”
진단 고사 내기가 도마에 올랐다.
“대충 치긴 했는데…….”
“대충 쳐? 오늘 신새벽 선생님이 야단쳤잖아? 성의 없이 시험 친다고.”
어째 잘 넘어가나 했더니 그 불똥이 지금 튀었다.
강우는 열심히 손을 휘저으며 변명했다.
“며칠 동안 내가 열심히 하는 거 봤잖아? 수학은 잘 풀었다고! 과학이 형편없어서 그렇지.”
“으아악! 과학을 망쳤어?”
손차희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전상철이랑 고현성은 잘 쳤대?”
“내가 알 게 뭐야.”
손차희의 시선이 윤수아랑 최대우에게로 돌아갔다.
“너희는?”
두 사람이 갑자기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두 사람의 표정이 심상치 않자 손차희가 울상이 됐다. 자신도 보고서에 매달리느라 특별히 잘 치지 못했다. 내기가 걱정된다.
그녀의 마음을 알아차린 윤수아가 헤헤 웃으며 달랬다.
“괜찮아, 차희야. 그 녀석들도 못 쳤을 거야. 오늘 꽤 어려웠잖아.”
그나마 어려웠기에 유리하다고 해야 하나?
손차희가 한숨을 쉬고 있을 때 최대우가 손을 들어 하늘을 가리켰다.
“저기 빛나는 별이 시리우스야. 태양 빼고 하늘에서 가장 밝은 별! 추운 날씨에 하얀빛을 내뿜는 저 별을 보면서 고곽천재의 발전을 기원하자!”
“아! 저 별이 시리우스야?”
최대우를 제외하고는 하늘을 잘 몰랐다.
강우를 비롯한 모두는 경외심을 품고 하늘을 바라봤다. 유난히 밝은 하얀 별이 그들의 앞길을 열어주는 듯했다.
저 별을 보면서 먼 옛날의 과학자들은 자연의 신비에 눈 떴을 것이다. 그들의 마음이 현대를 살아가는 그들에게도 전해지는 느낌이다.
예비입학 기간이 끝났으니 다음 주면 입학이다. 본격적으로 과학고 생활이 시작된다.
앞으로 3년 동안 얼마나 파란만장한 시간이 펼쳐질까? 그 기간에 이들은 각자의 내면에 숨겨진 천재성을 얼마나 키우게 될까?
3년 후가 되면 이들 세 사람은 그의 옆에 나란히 서서 힘을 보태줄 동료가 될 수 있을까?
이번 과제연구를 수행하면서 강우는 이들의 무한한 가능성을 엿보았다. S급인 최대우뿐만 아니라 손차희나 윤수아에게서도 그 가능성을 느꼈다.
이 순간 강우는 고등학생으로 빙의해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된 현실을 기쁘게 받아들이게 됐다. 이 삶은 하늘이 그에게 내려준 축복이었다. 앞으로의 3년은 정말 열심히, 보람차게 살아보겠다고 다짐했다.
* * *
입학 직전 주말임에도 기숙사에는 학생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
과제연구 제출 때문이다. 오늘 밤 자정까지라고 못을 박았기에 보고서 작성을 맡은 사람들은 막바지 작업에 정신이 없었다.
11시 마감 점호에 맞추어 강우와 최대우는 기숙사로 돌아와 있었다.
다행히 오늘은 사감 선생님 대신 층장이 돌아다니며 인원을 파악했다. 덕분에 방에서 여유롭게 대기하면 충분했다.
11시가 조금 넘어 차도도에게서 톡이 날아왔다.
- 차도도 쌤 : 강우야! 클래스룸!
- 강우 : 쌤! 오늘은 봐줘야 하는 거 아녀요?
- 차도도 쌤 : 뭘 봐줘? 왜?
- 강우 : 시험 쳤잖아요! 보고서 내야 하잖아요!
- 차도도 쌤 : 보고서 네가 쓰니? 차희가 고생하는 거 다 알아.
물론 틀린 말은 아니지만 강우는 조금 서운했다. 역시 아직 차도도는 강우가 믿음직스럽지 못한 모양이다.
- 강우 : 알았어요. 흑흑.
- 차도도 쌤 : 파이팅(이모티콘)!
우는소리를 하며 알겠다고 했지만 귀찮은 건 귀찮은 거다. 평소처럼 윤수아가 없으니 최대우에게 핸드폰을 넘겼다.
“대우야, 클래스룸 접속했어?”
“응. 천문대 가기 전에 했지.”
“내 것도 좀 해주라.”
최대우는 착하다. 군말 없이 강우의 숙제를 대신하기 시작했다.
그때 단톡방에서 손차희의 연락이 왔다.
- 손차희 : 보고서 끝! 얼른 확인해. 별말 없으면 그대로 제출한다!
최대우가 노트북으로 보고서를 다운받았다.
과학고 학생들에게 노트북은 필수품처럼 여겨졌지만 강우에게는 아직 노트북이 없었다. 강우네 집안 형편에 노트북은 사치품이었다. 물론 강우도 아직까지는 정신이 없어서 노트북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다만 지금 같은 상황이 벌어지니 노트북 없이 보고서를 확인하기 어려웠다. 핸드폰으로 하려면 할 수는 있겠지만 한계가 뚜렷했다.
이제 그가 마지막으로 활약할 때가 되었다. 돈이 필요한데 어머니께 손을 벌릴 수는 없으니 반드시 상금을 타야 했다.
이런 보고서를 강우는 전생에서 무수히 많이 작성했었다. 반면 손차희는 거의 경험이 없으니 그가 조금만 손을 보면 상금이 확실하게 손에 잡힐 것이다.
“대우야, 노트북 좀 써도 될까?”
“네가 보고서 검토하게?”
“그랬으면 해서.”
최대우가 노트북을 그에게 쓱 내밀었다.
“난 클래스룸 숙제해줄게.”
오늘따라 녀석의 착한 심성이 빛을 발했다.
강우는 손차희에게 톡을 넣었다.
- 강우 : 차희야, 내가 마지막으로 살펴보고 제출해도 될까?
- 손차희 : 으음, 그럴래?
약간 떨떠름한 반응이었다.
- 윤수아 : 강우가 잘할 거 같아! 강우 파이팅(이모티콘)!
윤수아가 응원하자 마지못해 손차희의 답변이 돌아왔다.
- 손차희 : 알았어. 자정까지 꼭 제출해야 해.
강우는 보고서를 열었다. 역시 아직 보고서를 세세히 꾸미는 작업이 미흡하다. 게다가 오늘 관측한 실험 결과를 넣은 부분의 완성도가 떨어지고 마지막 결론 부분이 다소 억지가 강하다.
보고서를 처음 쓰는 초보자의 흔한 실수다.
“제목부터 구리잖아? 제목이 이게 뭐야?”
그때부터 강우는 전력을 다해 보고서 수정에 들어갔다. 2차 진단 고사의 실수를 여기에서라도 만회해야 한다.
탁탁-
방안에서는 요란한 키보드 소리만 들렸다.
혹시나 자신의 노트북이 부서지지 않을까 염려해서 지켜보던 최대우는 강우의 놀라운 활약에 눈을 떼지 못했다.
1시간이 채 못되어 보고서는 마치 인테리어를 다시 한 집처럼 산뜻해졌다. 다소 꼬이고 부족했던 수식 전개와 전개 논리도 강우가 손을 대는 순간 완벽해졌다.
강우의 손은 마법사처럼 뼈대를 새롭게 만들고 살을 덧붙였다.
- 손차희 : 강우야 제출했어?
- 손차희 : 이제 5분 남았는데?
- 손차희 : 강우야 뭐해?
- 윤수아 : 강우 파이팅(이모티콘)!
- 손차희 : 대우야, 넌 뭐해? 강우 제출했어?
- 손차희 : 59분인데? 으악!
- 손차희 : ???
불안해진 손차희의 톡이 연신 날아왔다.
강우는 보고서를 마무리하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보고서의 새로운 제목은 ‘소행성 아스트리아의 궤도 계산과 검출’이었다.
그리고 엔터. 보고서를 제출했다. 밤 11시 59분 30초였다.
* * *
입학식이 열렸다.
강당에는 학생들이 가득했다.
강우는 같은 반 학생들과 함께 열을 맞춘 간이의자에 앉아 있었다. 강당의 2층에는 2학년과 3학년들이 구경하러 모여들었다. 드디어 개학했고 학교도 정상을 되찾았다.
다행히 오늘은 의자를 나르느라 고생하지 않았다. 주역인 신입생을 대신해서 선배인 2학년 학생들이 대신 의자를 가져왔다.
입학식장에 앉아 있자니 이제야 과학고생이 된 기분이 들었다.
간단한 의례가 시작되고 교장 선생님 훈화가 이어졌다.
고려 과학고의 백두섭 교장 선생님은 과학고에서는 꽤 유명한 사람이다. 고려 과학고에 부임하기 전에도 다른 과학고에서 교감을 맡아 혁혁한 성과를 냈다고 알려져 있었다. 무엇보다 자율을 중시하고 학생들이 재능을 꽃피울 수 있도록 지원하기로 유명했다.
입학 축하 연설을 강우는 졸면서 넘겼다.
예비입학식 때와 마찬가지로 일학년 담당 선생님들의 인사가 이어졌다. 이제는 대부분 안면이 있는 선생님이다.
그리고…….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한 신입생에게 장학금을 수여하겠습니다. 호명하는 학생 앞으로.”
세 학생이 단상에 올라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