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화 학기 시작 (3)
학교 선생님과 학생들은 전상철네 조가 전시한 과제연구 앞에서 어슬렁거렸다.
때는 점심시간 직후, 밥을 먹고 휴식을 취하는 시점이었다.
고차 방정식 근의 이론을 연구한 전상철네 조의 판넬 앞에서 고학년들이 특히 관심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들은 마침 수학 교사인 정명욱을 만나자 이것저것 물어보았고 정명욱은 친절하게 대답해주었다.
“이거 시험을 쳤거든.”
“아! 그래서 이런 주제가 나온 거네요?”
학생들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판넬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전상철과 고현성은 안색이 하얗게 변해 판넬 옆에 서 있었다. 정명욱을 보자 강우에게 들었던 말이 생각난 데다 자신들의 과제가 고학년의 주목 대상이 되어서다. 사실 연구주제는 시험에서 차용한 것이고 정답은 학원의 도움을 받았다.
물론 이런 방식의 소재 차용이 문제 될 건 없었다. 핵심은 얼마나 깊게, 또는 기존 방식과 차별화하여 수행했는가의 문제다.
“쌤! 이거…… 19세기 수학자 아벨이 가우스와 다투었던 문제 아닌가요?”
“그렇지! 가우스는 대수 방정식에서 복소수 근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증명했기에 근의 공식도 있다고 생각했지. 반면 아벨은 5차 방정식에서는 근의 공식이 없다고 주장했거든.”
“제대로 증명하려면 군론을 이해해야 하잖아요?”
“그렇지.”
정명욱은 신입생 과제연구에서 곧바로 반론을 제기하는 학생을 뿌듯한 마음으로 지켜봤다.
아벨은 19세 때 5차 방정식 근의 공식이 없음을 증명해서 그 논문을 가우스에게 보낸 천재다. 다만 가우스는 그 논문을 보지도 않고 쓰레기라며 휴지통에 던졌다. 이후 2년간 아벨은 대학 도서관에서 홀로 이를 갈며 보완해서 정확하게 증명하게 된다.
“흐음, 그런데 제대로 이해하고 보고서를 작성한 것 같지 않죠?”
고학년 학생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고현성과 눈이 마주쳤다.
“혹시…… 이 과제연구 하신 분?”
“그, 그런데요?”
“이 부분요. 아벨의 이론을 사용한 건가요? 아니면 갈루아의 이론을 사용한 건가요?”
고현성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사실 그는 그런 이론이 있는지 그 이론이 보고서에 어떻게 쓰였는지도 몰랐다.
“그럼 5차 방정식에서 근의 공식이 존재할 특정 조건은 풀어봤어요?”
대답할 수 없던 고현성은 재빨리 전상철을 돌아봤다. 당연히 전상철도 입을 열지 못했다.
“흐음.”
대충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저은 고학년 학생이 물러났다.
그들의 대화를 관심 있게 보고 있던 정명욱이 고현성과 전상철에게 버럭 소리 질렀다.
“너희 둘! 열심히 연구했다면서 왜 그것도 대답 못 해?”
“그, 그게요.”
“보고서 결론을 마무리한 사람이 누구야?”
손을 들려던 전상철이 움찔하다가 손을 내렸다. 학원에서 받아온 것을 옮겨적은 게 전부라 아는 게 없었다. 수학 선생님이 점검한다는 소식을 강우에게 전해 듣고 신경 쓰긴 했지만 질문에 대답할 수준은 아니었다.
“대체 아는 게 뭐야?”
전상철은 머리만 긁었다.
한숨을 푹푹 내쉬던 정명욱이 고학년 재학생에게 설명했다.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적당히 베껴온 거야. 신입생이라 어쩔 수 없어.”
교내 수학 올림피아드 동아리에서 활동하는 고학년 학생은 수학에 뛰어난 신입생을 만났다고 좋아했다가 실망한 듯 보였다.
고현성과 전상철을 한 차례 쏘아본 정명욱이 몸을 돌리다가 옆 판넬에서 얼쩡거리는 강우를 발견했다.
“강우 학생!”
근의 공식 문제를 혼자서 맞혔던 강우를 보자 그 진위를 확인하고 싶었다.
강우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다가왔다.
“혹시 아벨이란 수학자를 알고 있나?”
강우는 고차 방정식 근의 공식을 깊이 공부한 적이 없기에 아벨을 몰라야 정상이다. 하지만 아벨은 대수 방정식뿐만 아니라 적분에서도 큰 공적을 세운 인물이고 강우는 대학에서 물리를 공부할 때 미적분 방정식을 깊이 다룬 적이 있었다.
“아는데요? 가난하게 살다가 결핵으로 젊은 나이에 요절한 비운의 천재잖아요?”
“그런데?”
“타원 방정식을 공부하면서 아벨 적분을 풀어보긴 했어요.”
“호오! 거기까지?”
강우의 대답이 실망해서 떠나려던 그 고학년 학생의 귀에 들어갔다.
“어? 아벨 타원적분을 했다고?”
고학년 학생이 급히 강우를 붙잡았다.
“타원적분 어디까지 했어? 그러면 타원 둘레 길이는 쉽게 구하겠네? 단진자 운동에서 타원적분 써봤어? 1종 타원적분은 얼마나 알아? 2종은?”
“변수 치환하면…….”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질문에 무심코 대답하던 강우는 바로 입을 닫았다. 굳이 고학년 선배들을 상대하고 싶지는 않았다.
심상찮은 표정으로 강우를 쓱 훑어보던 고학년 학생이 다급하게 물었다.
“혹시 저쪽에 전시된 이중 진자 문제 보고서 쓴 저자야?”
“아, 그거요? 전 아니고요, 저 학생들이 더 잘할 거예요.”
이중 진자 문제를 다룬 것은 이민찬네 조였다. 그 조가 보고서 주제인 라그랑주 역학을 제대로 공부했다면 타원 적분쯤이야 어렵지 않을 것이니 거짓말은 아니었다.
“아! 그래?”
고학년 학생이 급히 뛰어갔다.
강우의 대답에 어리둥절하던 정명욱도 웃음을 터트리고는 그쪽으로 사라졌다.
당연히 이민찬은 고학년 학생 앞에서 땀을 뻘뻘 흘렸다. 그 때문에 이민찬은 취지와 달리 학원에서 답만 가져왔다고 정명욱에게 제대로 깨졌다.
* * *
고곽천재의 보고서가 전시된 판넬 앞에도 학생들이 북적였다.
최우수상 작품이었으니 당연한 결과다. 신입생 임에도 학교 실험 장비, 그것도 상징성이 상당히 큰 천체망원경을 이용했다는 점에서 관심이 쏟아졌다.
다만 대부분 학생들은 지구과학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고 물리나 천문에 관심 있는 학생이어도 이 연구주제를 이해할 만큼 깊이 알지 못했다.
“아스트리아? 이름이 예뻐!”
“별 사진도 찍었네? 낭만적이야!”
학생들의 눈동자가 반짝거리는 것만 같았다.
이미 이런 반응을 예상했던 강우는 무덤덤했으나 다른 조원들은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저희가 고생 많이 했거든요.”
“프로그램 만드느라 죽는 줄 알았어요.”
“여기 적용된 수식이 얼마나 많은데요.”
윤수아와 최대우가 열심히 항변했으나 학생들의 반응은 바뀌지 않았다.
“야밤에 남녀가 같이 놀았다는 거지.”
“어? 최우수상이네? 신입생이 망원경까지 사용했어?”
“기존에 있는 프로그램 살짝 변형했나?”
내용을 상세하게 설명하던 윤수아는 상대의 반응이 예상과 달라 바로 우울해졌다.
대부분 학생은 이 주제의 본질을 알지 못하고 하늘의 별을 봤다는 겉모습에 주목했다. 그래서 부담 없이 농담을 일삼으며 선전하고 있을 때였다.
한 무리의 학생들이 우르르 나타났다.
“어? 천체관측 주제도 있어!”
학생들이 신기한 듯 요리조리 보고서를 훑기 시작했다. 강우는 그들에게서 범상치 않은 기세를 감지했다.
‘천체관측부인가?’
그때 유난히 어려 보이는, 키가 작은 남학생이 강우 앞으로 다가왔다.
“이거 네가 했어?”
아무리 봐도 고등학생이 아닌 중학생인 듯 보인다.
“중학생이니?”
키 작은 남학생의 안면이 확 일그러졌다.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강우를 노려보던 녀석이 부들부들 떨며 입을 열었다.
“나 2학년이야!”
“아! 중학교 2학년?”
“으아! 네 선배라고!”
깜짝 놀란 강우는 남학생을 다시 살폈다. 아무리 봐도 중학생 같은데? 교복이 없으니 진실인지 거짓인지 알 재간이 없다.
떨떠름한 표정으로 강우는 높임말을 썼다.
“아, 그러세요?”
“앞으로 선배라고 불러! 김선호 선생님한테 도움받았지?”
“네.”
“주제도 선생님이 골라줬어?”
“아뇨, 관측하다가 우리가 정했는데요?”
놀랍다는 표정으로 다시 보고서에 몰두하던 녀석이 다시 말을 걸었다.
“프로그램은 누가 짰어?”
“저 학생이요.”
강우는 저쪽에서 설명하고 있는 윤수아를 가리켰다.
“흐음, 그래?”
윤수아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뜬 학생이 판넬의 한 부분을 가리켰다.
“이거 유도해봤어?”
“모든 수식을 직접 풀었어요.”
“시간이 꽤 걸렸을 텐데?”
“일주일요.”
“정말? 놀라운데?”
연신 보고서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던 학생이 강우를 쓱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보고서 주저자가 누구야?”
“저기 여학생요.”
“흐음, 그럼 세부 내용은 잘 모르겠네.”
강우는 핵심을 질문하는 이 학생의 정체가 궁금했다. 갑자기 여러 학생과 함께 몰려와서 혼자서 질문을 도맡아 하고 있었다. 딱히 전문적인 부분을 묻지 않아 그것이 그를 배려한 것인지 아니면 물을 게 없어서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누구세요?”
궁금증을 참지 못한 강우가 반대로 물었다.
“나? 2학년이고 권유성.”
“아, 네…….”
무심코 끄덕이던 강우는 권유성의 머리 위에 나타난 글자를 확인했다.
- 권유성, 수학 A, 물리 S, 화학 C, 생물 C, 지구과학 A
어? 무려 S급이었다. 그것도 물리다. 이 학교에서 최대우를 제외하고는 본 적이 없는 재능이다.
누구인지 구체적으로 확인하려는데 함께 몰려왔던 친구가 권유성의 팔을 붙잡았다.
“별거 없네. 가자, 유성아!”
“이거 더 보고 싶은데…….”
“뭘 더 봐? 지금 바빠. 나중에 지구과학 선생님께 물어봐.”
“으, 으응.”
권유성의 눈은 판넬에서 떨어지지 않았으나 친구들이 그를 끌고 저쪽으로 사라졌다.
강우는 권유성이란 이름을 기억해뒀다. 누구인지 나중에 수소문을 해봐야 할 것 같았다.
그들이 사라진 방향을 물끄러미 보고 있으려니 윤수아가 후다닥 달려와서 강우의 등을 쿡 찔렀다.
“강우야, 뭐래?”
“그냥 이것저것 묻던데.”
“별말 없었지?”
있었는지 없었는지 모호했다. 그보다 윤수아가 관심을 가진다는 점이 더 이상하다.
“혹시 아는 사람?”
“예전에 학원에서…….”
권유성은 손차희와 윤수아가 다니던 학원에서 꽤 유명한 인물이었다. 나이는 윤수아보다 오히려 1년 어렸다. 초등 때부터 그 학원에 다니다가 중학교 1학년 때 영재고에 시험을 치고 합격했다. 덕분에 중학교 2년을 건너뛰고 입학한 특별한 케이스.
다른 학교와 달리 영재고는 특수 학교라 중학교 졸업장이 필요 없다. 설사 초등학생이라도 학교장이 인정한 천재라면 입학이 가능했다.
강우는 놀라서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물리 재능에 S가 있었으니 천재라면 천재다.
“으, 그럼 나이가 우리보다 1년 어리다는 거야?”
“응. 학원 다닐 때부터 알아서 누나라고 부르긴 하는데.”
“젠장!”
선배인 줄 알고 말을 높였던 강우는 화가 나서 발을 쿵쿵 굴렀다.
“왜 그래?”
“아무것도 아냐.”
나이가 어리더라도 먼저 입학했으니 선배라면 선배겠지만 강우는 정신 연령이 한참 위였다. 그런데 지금 자신보다도 어린 학생에게 꼬박꼬박 존대했으니 기분이 영 이상했다.
과연 고려 과학고에는 이상한 인간들이 많다더니 오늘 한 사람을 더 본 것 같았다.
“그래도 차희가 없어서 다행이야.”
“차희는 왜?”
“차희가 유성이 엄청 싫어하거든.”
대충 그 이유를 감 잡았다.
손차희는 학원에서 권유성과 우열을 다퉜다. 영재고를 준비하면서 함께 공부했고 경쟁했다. 학원에서 사적으로는 누나로 취급을 받았지만 공부에서는 치열하게 다툼을 벌이는 사이였다.
그러다가 권유성이 무려 2년을 뛰어넘어 고려 과학고에 입학했다. 중학교와 학원에서는 후배였던 동생이 고등학교에서는 손차희의 선배가 되어버린 셈이다.
“너랑은?”
“나? 나랑은 엄청 친하지. 난 애초에 유성이랑 경쟁 안 해. 그냥 편한 누나지. 히히.”
아예 경쟁할 엄두를 내지 않았을 만큼 대단한 학생이란 뜻이었다.
강우는 권유성이 사라진 건물을 다시 쳐다봤다. 아무래도 권유성과 여러모로 얽힐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