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과학고 천재-31화 (31/325)

제31화 학기 시작 (4)

입학 후 제대로 된 수업이 시작됐다.

지금은 물리 시간. 차도도의 분위기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다만 강우는 변화가 다소 있었다. 고곽천재와 같은 테이블, 그것도 가장 앞에 앉아서 수업을 들어야 한다는 점은 그대로였으나 지금 그의 앞에는 드디어 교과서가 놓여 있었다. 고등학교 물리 교과서. 지금까지 그는 변변한 책이 전혀 없었다.

교과서와 차도도가 배포한 프린트물을 앞에 두니 정말 고등학생이 된 기분이다.

“고등학교 물리를 모두 끝낸 학생이 태반이겠지만 우리는 고등학교 과정을 다시 살필 거예요. 우리 학교 교과 과정에서 물리는 모두 여섯 단계예요. 물리 I, 물리 II, 물리 III, 물리 IV, 고급물리 I, 고급물리 II. 뒤의 두 과목은 선택 과목이고 물리 IV까지 배운 후에 들을 수 있어요.”

물리나 물리와 연결되는 전공으로 진학하는 학생들은 보통 끝까지 모두 수강한다. 강우는 한 학기마다 하나씩 선택하면 된다는 것으로 이해했다.

“물리 IV 과목까지는 고등학교 물리 교과서를 사용해요. 물론 프린트물 추가하고.”

손차희가 손을 들고 물었다.

“고급물리는 무슨 책을 써요?”

“할리데이. 이미 공부한 학생도 있을 거예요.”

여기저기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대학 일반물리 서적을 학원에서 다루어 이미 한 번 훑었다는 그런 잡담이다.

강우는 손차희와 윤수아의 표정에서 이 두 학생 또한 물리 심화 교재까지 모두 끝냈다고 짐작했다. 물론 그의 관점에서 두 여학생은 그 교재 내용의 절반도 제대로 모르고 있긴 했지만.

“너도 봤어?”

최대우의 질문이 그에게 날아들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당연히 아주 많이 보긴 했다. 대학교 일반물리 교재니 보는 정도가 아니라 그 책으로 강의를 했다. 어차피 지금 그는 일반물리로 논할 수준이 아니다.

“아니. 넌?”

“나? 난 부분부분 봤어. 물리를 좋아하니까.”

최대우의 얼굴에서 자신감이 느껴졌다. 학원에서 배운 적은 없으나 그 책으로 스스로 공부했었다는 뜻이다.

“화학이나 다른 과목도 체계는 비슷해요. 하여튼 중요한 점은 수업 때 일반 고등학교 교과서를 쓰지만 강의 수준은 훨씬 높다는 거예요. 물리를 좋아하는 학생이라면 충분히 즐거운 수업이 될 거라 확신해요.”

차도도의 의미심장한 시선이 강우를 향했다.

강우는 자신도 모르게 몸이 움찔했다.

으아! 저 선생님의 포스는 역시 무시할 수 없다. 2차 진단 고사로 강우의 물리 실력이 보통이 아님을 확신했으니 앞으로 열심히 하지 않으면 혼낼 거라는 압박이 전해졌다.

강우는 슬그머니 시선을 회피하고 교과서를 펼쳤다.

차도도가 수업을 시작했다.

“자, 오늘은 첫 시간이죠. 물리의 토대이자 기본인 시간과 길이의 기준을 다룰까 해요.”

학생들에게 실망한 표정이 드리워졌다. 이미 수도 없이 들어본 내용이다. 역시나…….

“자, 길이의 기준이 어떻게 되죠?”

“미터원기요.”

“메테르 데 자르시브(Metre des archives)!”

외국어도 튀어나왔다. 프랑스에 소장되어 있다는 1미터의 기준, 국제원기의 명칭이다. 교과서에 한 줄로 설명된 길이의 기준을 프랑스말로 아는 학생이 있으니 대단하긴 하다.

“물론 현대에는 새로운 과학적 기준으로 정의하지만 길이의 기준을 처음으로 제창하고 통일했던 사람은 바로 나폴레옹이에요. 나폴레옹의 지원을 받은 프랑스 아카데미는 지구 둘레의 4천만분의 1을 1m로 정하자고 주장했죠.”

차도도의 설명이 이어졌다.

뜬금없이 물리에서 나폴레옹이 나오자 모두가 놀란 표정이다. 사실 1m란 길이는 사람들이 직관적으로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기준이다. 지금까지 학생들은 특별히 고민하지 않고 그냥 가져다 썼다. 그 기원을 고민했던 학생은 아무도 없었다.

“오늘 우리는 이 1m의 역사를 살펴볼까 해요. 강우! 앞으로 나와요.”

“네?”

슬슬 졸리는 눈을 감다가 지적받은 강우는 반사적으로 후다닥 일어났다.

“1m의 역사! 알죠?”

“제가 그걸 알 리가…….”

설사 안다고 해도 그게 물리와 무슨 관계가……. 아! 관계가 좀 있나?

“지난번에 지구를 구하는 방법과 비슷하거든. 강우가 모를 수가 없어.”

“에이, 그럴 리가요.”

“수업은 조별 토론, 발표 등 다양한 방법으로 진행하거든. 물론 채점에도 들어가. 오늘 발표자는 너야.”

“왜 하필이면 전데요?”

“딱 보니 잘할 거 같아서. 실제로도 잘하고 있고. 자, 강우야! 파이팅!”

그의 경력이 얼마인가. 대학원 조교 생활 동안 수업한 것과 교수 임용 후 수업한 것을 모두 따지면 짬밥이 차도도를 훌쩍 넘고도 남았다.

“으아, 그래도…….”

“못하면 감점인데…….”

갑자기 같은 조원인 손차희가 눈에 불을 켰다.

“끙.”

강우는 싫은 티를 팍팍 내면서 앞으로 나갔다.

발표를 맡긴 차도도는 강의실 뒤로 이동했다.

강우는 교탁 앞에서 학생들을 바라보면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강의야 어렵지 않다. 내용도 차고 넘친다. 단지 어디까지 이야기할지가 문제다. 이곳에서 그는 교수도 선생님도 아닌 학생일 뿐이다. 게다가 다른 학생에게 그는 선행하지 않은 좀 튀는 녀석으로 여겨져야 한다.

지금 이 순간,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서 향후 그의 이미지가 결정될 것이다.

판을 깔아준다면 숨길 필요가 있나…….

차도도의 빙그레 웃는 얼굴이 눈앞에 선명했다. 마치 그의 본심을 안다는 듯 마음껏 해보라는 표정이다. 그렇다면…….

강우는 칠판 앞에 서서 마카를 들었다.

“우리가 아는 미터법은 국제 표준단위입니다. 우리나라에는 1961년에 도입되었죠. 미터법이 익숙하다고 생각하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아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아파트 면적을 평으로 썼죠. 이것을 폐지한 게 불과 몇 년 전인 2007년입니다. 이때부터 비로소 완전하게 미터법을 사용하게 된 거죠.”

강우는 전 세계에서 미터법을 사용하지 않는 나라는 단 세 나라이며 여기에 미국이 속해있다는 충격적인 말을 꺼냈다. 이어서 미국 나사에서 화성에 보낸 우주탐사선이 단위 혼동으로 폭발한 사고를 언급하여 단위의 중요성을 논했다.

“그럼 미터는 누가 정했을까요? 나폴레옹은 혁명을 일으킨 후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는 목적으로 도량형 통일을 시도했죠. 그는 유럽 각국의 학자들을 모아 놓고 새로운 기준을 요청했고 힘에 눌린 아카데미에서는 의도대로 1미터를 의결했습니다. 바로 지구 둘레의 4천만분의 1이 1m로 정해졌죠.”

그때 강우는 이 문제가 필연적으로 지구 둘레를 구하는 방법과 맞물려 있음을 깨달았다. 바로 첫 시간에 다루었던 주제였다.

‘오랜만에 강의하니 재밌네. 선생님을 놀라게 해볼까?’

강우는 강연 요점을 살짝 틀었다.

“그럼 지구 둘레는 어떻게 구할까요? 가장 처음으로 지구의 크기를 구한 사람은 그리스의 에라토스테네스인데…….”

지구를 구하는 강의는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하여 근데 프랑스의 미터법으로 이어졌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지구의 크기를 실측하기 위해 두 명의 천문학자, 들랑브르와 메셍을 남과 북으로 보내어 정밀하게 측정했다. 두 천문학자는 무려 7년 동안 갖은 고생 끝에 임무를 완성한다.

“알다시피 모든 실험에서는 오차가 존재해요. 들랑브르는 측정 오차까지 그대로 기록했으나 메셍은 달랐죠. 그는 자신의 기록이 더 그럴듯하게 보이도록 조작을 시도했죠. 이렇게 양심을 팔면 과학은 망하는 겁니다.”

이것은 과학자의 양심과 관련된 문제로 현대에서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실험 수업에서도 수천억짜리 프로젝트에서도. 연구비를 거머쥔 권력자의 입맛에 맞는 데이터를 얻으려는 그릇된 움직임을 강우 또한 한두 번 목격한 게 아니다.

강우는 정신없이 과학자의 윤리를 강의했다.

이곳에 있는 학생들은 앞으로 과학자로 커나갈 인재이기에 과학에서의 윤리를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그런 사명감이 강우에게 열변을 토하게 했다.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물리와 관련된 내용을 흥미롭게 설명하는 강우의 강의에 모든 학생이 흠뻑 빠져들었다.

심지어 차도도도 같은 심정이었다.

첫날부터 어려운 물리 수식을 가르치는 수업을 할 수 없어서 대안으로 강우를 불러냈다. 그런데 강우는 그녀의 예상을 훨씬 넘어섰다.

강우는 내용에서 막힘이 없었을 뿐 아니라 강의 능력 또한 훌륭했다. 최소한 십 년 이상 강단에 섰던 사람이 아닌지 의심될 정도였다.

차도도는 감탄을 연발하며 강우의 강의에 집중했다. 이 학교에 들어오기 부족한 학생처럼 보였던 강우의 첫인상은 이제 완전히 바뀌었다. 강우에게는 단순히 공부만 잘하는 학생과 완전히 다른 뭔가가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래서 우리는 미터법 도입이 얼마나 어려운 과제였는지, 그 속에 숨은 두 천문학자의 노고가 얼마나 컸는지, 실험 결과를 조작하면 왜 위험한지를 알게 되었죠. 수많은 사람의 노력 끝에 이제는 전 세계 어디를 가더라도 통일된 기준으로 물건을 만들고 사고팔 수 있게 되었습니다.”

긴 강의가 끝났다.

물리와 역사가 복합된 내용이었으나 그 속에는 과학의 발전과 영향을 꿰뚫는 통찰력이 존재했다. 평범한 고등학생의 식견을 아득히 넘어서 있었다.

강의가 끝났음에도 모두가 침묵에 잠겨 있었다. 학생들은 멍하니 강우만 바라보고 있었다.

강의가 주는 깊은 여운에서 아직 깨어나지 못한 것이다.

짝- 짝- 짝-

가장 먼저 차도도가 손뼉을 쳤다.

그제야 강의실에 박수 소리가 물밀듯이 터져 나왔다.

“우와! 강우! 대단한데!”

최대우의 환호성을 윤수아가 바로 호응했다.

“강우야, 강우야아! 멋져!”

엉겁결에 따라서 손뼉을 치던 손차희는 다소 멍한 기분이었다. 방금 강우가 보여준 강의는 그녀가 절대 따라 할 수 없는 경지였다. 참고서를 보고 문제집만 풀던 그녀와는 차원이 다른 다양한 지식이 모두 녹아 있었다.

처음에 아래로 내려다봤던 강우가 어느새 경쟁자로 올라섰고 이제는 그녀를 아득하게 추월해서 앞서 나가는 기분이었다.

이민찬만 경쟁자라 생각했는데 새로운 경쟁자가 등장했다. 그 사실이 한편으로는 좋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두려웠다.

‘대체 강우, 이 녀석은 뭐지…….’

유감스럽게도 강우를 알던 사람은 이 학교에 없다. 강우는 먼 시골의 작은 중학교 출신이라 누구와도 연결되는 접점이 없었다.

박수 소리가 잦아들었을 때 차도도가 교단으로 올라왔다.

“수고했어요. 앞으로 강우가 계속 수업해도 되겠어.”

교단을 내려가던 강우의 안면이 확 일그러졌다.

“자, 그럼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이고…… 강우야?”

“예?”

“다음에도 부탁할게. 파이팅!”

“으악! 그거 반칙인데요?”

“이렇게 완벽하게 하고 손 떼는 게 더 반칙이야.”

강우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차도도가 강우에게 맡긴 이 수업은 반 학생들에게 강우를 확실하게 각인하는 계기가 됐다.

사실 강우에게도 나쁘지 않았다. 그동안 다소 엉뚱하고 뒤떨어진 학생 이미지였는데 이제는 엉뚱한 천재로 이미지가 바뀌었다. 적어도 물리 실력만큼은 확실하게 인정을 받았다.

복수를 위해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지 자신의 천재성을 개발하고, 능력 있는 동료를 얻겠다는 그의 계획이 첫발을 디뎠다.

물론 앞으로 더 큰 어려움이 가로막고 있다는 것을 강우도 잘 알고 있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