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화 학기 시작 (5)
과학고라고 수학과 과학만 가르치는 것은 아니다. 당연히 일반 과목 수업들도 있었다.
예비입학기간에는 수학과 과학만 보충 수업 개념으로 진행했으나 학기가 시작되자 모든 과목이 편성됐다. 물론 일반고에 비하면 수학 과학 시간이 확실히 많았다.
강우는 국어 수업을 들으면서 하품을 참고 있었다.
교단에는 ‘국어 공부가 왜 필요한가?’라는 주제가 적혀있고 나이가 제법 든 중년의 남자 선생님이 열변을 토했다.
‘하음! 몇 년 만이냐?’
마지막으로 들었던 대학 1학년 교양 국어에서 강우는 수업을 땡땡이치고 리포트도 베껴서 냈기에 수업 기억이 거의 없었다.
그나마 기억나는 국어수업은 고3 때가 마지막이었고 벌써 2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다시 경험하는 국어수업은 설레기는커녕 하품만 쏟아졌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일반 강의실이라 조별로 앉지 않고 각자 따로 앉는다는 점이었다. 가장 앞에 앉은 손차희와 윤수아를 피해 강우는 멀찌감치 가장 뒤에 앉았다.
거기에다 그의 앞자리에는 거구를 자랑하는 최대우가 떡하니 버텨서 그를 완벽하게 선생님의 시야에서 막아줬다.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었다.
다만 갑자기 그를 힐끔거리는 녀석들이 늘었다. 물리 시간에 미터법을 열강하고부터다.
그를 괴물처럼 보는 눈빛과 그를 부러워하는 눈빛이 뒤섞여 있었다. 나쁘지 않은 관심이다.
“그래서 사람은 책을 읽어야 한다. 심금을 울리는 문학 작품을 읽지 않으면 그게 어찌 사람이라 할 수 있겠나? 과학고 학생이라면 더 열심히 읽어야 해!”
국어 선생님이 열변을 토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하품을 내뱉던 강우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기분 좋은 잠이 눈꺼풀을 아래로 내리고 강우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고등학생이라면 기본적으로 읽어야 하는 문학 작품이 있다. 여러분들도 윤동주 시인은 들어봤지? 자, 대표적인 시, 한 편 외울 사람?”
학생들을 휙휙 둘러보던 국어 선생님의 눈에 커다란 체구에 가려 전혀 보이지 않던 한 학생이 발견됐다.
“어이! 거기 맨 뒤에 학생!”
당연히 반응이 없었다.
“거기!”
“저요?”
최대우가 놀라서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아니, 너 말고! 너 뒤에!”
그때야 옆 학생이 몸을 흔들어 강우는 잠에서 깼다.
졸린 표정으로 주섬주섬 일어나자 학생들의 폭소가 터졌다.
“조용! 이름이 뭐지?”
화가 난 음성으로 국어 선생님의 호통이 이어졌다.
“가, 강우인데요?”
“성이 뭐야?”
“강씨요.”
“흠, 그래 강우라 치고…… 윤동주 시인의 시 중에 아무거나 외워봐!”
강우는 바로 입을 다물었다. 시를 외우느니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칠판 한가득 설명하는 게 훨씬 쉽다. 아니면 푸리에 변환이나 2종 타원적분을 증명하거나.
강우가 입을 꾹 다물고 있자 국어 선생님이 눈을 부라렸다.
“어? 하나도 모르지는 않을 테고, 반항이야?”
“그, 그게 아니고요.”
“얼른 암송해봐.”
“아는 게 없는데요.”
“이런 무식한 녀석이!”
국어 선생님의 호통에 강의실은 웃음바다가 됐다. 물리 시간에 그를 경외하던 학생들의 눈빛이 곧바로 경멸로 바뀌었다.
솔직히 강우는 기억나는 시가 하나도 없었다.
그의 수난은 다음 시간에도 계속됐다.
그와는 상극이라 할 신새벽이 들어온 화학 시간.
신새벽은 들어오자마자 강우를 찾았다.
“일등 어딨어?”
“일등? 그게 누군데요?”
학생들이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화학 일등! 강우라고 있잖아?”
“강우가 왜 일등인데요?”
“끝에서!”
“푸하하!”
신새벽이 계속 두리번거리자 학생들이 가장 뒷자리를 가리켰다.
“저기 가장 뒤에 있는데요?”
“대우밖에 없는데?”
“대우 뒤에요.”
그제야 강우가 최대우의 뒤에서 빼꼼 얼굴을 내밀었다.
“부르셨어요? 근데 저…… 화학 일등 아닌데요?”
“끝에서!”
“프하하!”
다시 웃음보가 터졌다.
“쌤! 엄연히 121등입니다. 뒤에 셋이나 있다고요.”
“그 셋은 외국에서 왔잖아!”
할 말이 없어진 강우는 우물쭈물하다가 다시 반항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죠, 꼴찌한테 꼴찌라고 하면 기분 나빠요. 학생 인권도 생각하셔야죠.”
“내가 할 소리야. 넌 나한테 무슨 억하심정이 있길래 담임 쌤 과목은 1등 하고, 내 과목은 뒤에서 1등 하니?”
본전도 못 건진 강우가 우물쭈물하자 신새벽이 안면을 확 구겼다.
“주기율표도 못 외우는 두 녀석이 가장 뒤에 앉아?”
불똥이 최대우와 강우 두 사람에게 연달아 튀었다.
신새벽이 두 사람을 노려보며 다그쳤다.
“내가 그렇게 주기율표를 써내라고 했는데…… 그것도 20번이나 써서.”
“냈는데요?”
“1장 쓰고 나머지 19장을 복사했잖아? 네가 복사집 주인 아들이야?”
“큭큭큭!”
급기야 학생들이 책상을 치고 웃었다.
“최대우! 넌 왜 웃어? 너도 똑같애! 둘이 오십 보, 백 보잖아?”
강우를 바라보는 학생들의 눈빛이 이제는 경멸에서 연민으로 바뀌었다.
물론 강우도 충격이긴 했다. 31점이라 못 친 건 알고 있었지만 꼴찌라니. 강우는 조심스럽게 중얼거렸다.
“화학마저 잘 치면 그게 사람인가…….”
신새벽의 눈썹이 확 올라갔다.
“그래! 그래서 내가 더 화가 나거든! 왜 화학만 그 모양이야? 이건 머리가 나빠서가 아니라 공부를 안 해서야! 너 하루에 화학 몇 시간 공부해?”
어? 그러고 보니 아직 화학을 제대로 공부한 적이 없다.
버벅대며 대답을 하지 못하자 신새벽이 매서운 눈으로 노려봤다.
“그럴 줄 알았어. 화학 공부를 했어야 말이지. 강우! 잘 들어! 오늘부터 매일 밤에 화학 공부한 시간을 내게 보고해!”
“예?”
“왜? 너희 선생님이 가르쳐 주더라. 이번에 그렇게 했더니 너 물리 성적 확 올랐다고. 알았지? 매일 밤 톡 넣어.”
물리 성적이 오른 게 그 때문이 아니라고 열심히 항변했지만 먹히지 않았다.
결국 생각해낸 마지막 반항이…….
“전화번호 모르는데요?”
“어쭈? 이게 컸다고 선생님 전화번호 따고 싶은가봐?”
“예?”
갑자기 왜 그렇게 해석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머리가 제법인데? 선생님이 인심 썼다. 지금까지 전화번호 알려준 남자는 네가 첨이거든. 그러니까 앞으로 매일 밤 톡 보내. 뭘 보내야 하는지 알지?”
학생들이 배꼽을 잡고 웃었다.
얼핏 들으면 뭔가 야릇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매일 공부로 얽어매려는 사악한 음모였다.
넋이 나간 강우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학생들은 물리 시간에 받았던 것보다 더 큰 충격을 받았다. 물리를 그렇게 잘하는 것도 이상했지만 화학을 그렇게 못 하는 것도 이상했다.
역시 사람은 공평한 법이라며 학생들의 관심이 떠나갔다.
* * *
밤에 기숙사 점호가 끝난 후 강우는 침대에 드러누워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오늘도 세미나실에서 조원끼리 모여 공부하고 왔다. 과제연구가 끝난 후로 각자 공부하는 분위기였고 강우는 새로 받은 교과서를 뒤적였었다.
그렇게 공부하고 돌아오니 온몸이 피곤했다. 아직은 교수 시절처럼 열정적으로 공부든 연구든 진행하기 힘들었다. 적응을 핑계로 눈치를 보고 있는 상태였다.
맞은 편의 최대우도 그와 다르지 않다. 다만 차이점이라면 최대우는 누워서 책을 뒤적이고 있었다.
“대우야, 뭐 하는데?”
심심함을 이기지 못한 강우가 먼저 물었다.
“수학 공부.”
“무슨 책?”
“차희한테 빌린 거. 심화 문제집이라던데?”
최대우는 강우의 질문에 답하면서도 책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금방 페이지를 넘기고 다시 책에 몰두했다.
‘흐음, 수학 공부라…….’
책상에 앉아서 문제를 풀지 않고 침대에 누워 책을 뒤적이며 하는 수학 공부라니.
생각해보면 딱히 이상할 것도 없었다. 그도 가끔 그렇게 하니까.
예를 들어 사회 과목이라면 누운 채 교과서를 읽을 수 있다. 굳이 앉아서 공부해야 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선입관이다.
다만 수학은 다르다. 연필을 쥐고 계산해야 하기에 의자에 앉지 않고서는 공부하기 어렵다.
그런데 그 계산을 암산으로 할 수 있다면? 굳이 백지에 적어가며 계산하지 않아도 된다면 반드시 책상 앞에 앉을 이유가 없다.
종이에 적지 않고 수식을 전개할 수 있는 능력이 수학을 잘한다거나 나아가 천재의 전유물은 아니더라도 평범한 학생에게는 쉽지 않은 공부 방식이다.
사실 공부란 것은 머리를 어떻게 쓰느냐의 문제이지 자세가 어떠냐의 문제는 아니니까.
강우도 따라서 같은 자세를 취했다. 오늘 받은 프린트물을 들고 침대에 누워 복습을 시작했다.
“으응? 이상한데?”
얼마 지나지 않아 때려치우려던 강우는 심상찮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이상하게 과거보다 머리에 쏙쏙 들어오는 느낌이 들었다. 예전에도 받아들이는 능력에서 남보다 뒤떨어진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는 천재였지만 그때보다 확실히 이해력이 높아졌다.
수업 시간을 떠올렸다. 미터법 관련 역사는 정말 오래전에 그가 접했던 내용이다. 그것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을 줄은 생각지 못했는데 강의 중에 신기하게도 막힘이 없었다.
과거라면, 예전 교수 시절의 그였다면 오늘처럼 완벽하게 오래전 내용을 떠올리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수학 시간에 삼차방정식의 근의 공식을 기억해낸 것도 이상했다. 아무리 예전에 공부했던 내용이라지만 날짜로 따지면 무려 십 년도 훌쩍 넘은 옛날 일 아닌가. 그리고 참고서를 한 번 훑어보는 것만으로 예전에 공부했던 수학을 모두 이해했다는 것도.
“머리가 더 좋아졌나?”
강우로 빙의하고 난 후 예전 손강우 시절에 습득했던 지식을 더 잘 떠올리는 것 같다. 이 부분에 대해서 강우는 제대로 확인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침대 위에서 미적거리고 있을 때 톡이 날아왔다.
- 신새벽 쌤 : 강우! 화학 공부했어?
수업 시간에 반쯤 농담으로 받아넘겼는데 정말 톡으로 매일 숙제 검사처럼 할 생각이었나?
한숨을 연발하다가 강우는 어쩔 수 없이 답장했다.
- 강우 : 예.
- 신새벽 쌤 : 뭐 했는지 보고해야지?
한 게 있어야 보고하지. 고민하던 강우는 대충 답변했다.
- 강우 : 주기율표 한번 썼습니다.
- 신새벽 쌤 : 내일 제출해.
으악! 졸지에 밤늦게 숙제하게 생겼다. 적당히 넘어가는 법이 없다.
한숨을 푹푹 쉬고 있을 때 또 톡이 날아왔다. 이번에는 담임인 차도도였다.
- 차도도 쌤 : 강우야? 공부하니?
- 강우 : 화학 선생님 때문에 주기율표 쓰고 있어요. 이건 모두 쌤 때문이에요.
강우는 차도도에게 항의했다.
- 차도도 쌤 : 말이 이상한데? 그게 내 책임이라는 거니?
- 강우 : 하여튼 화학 선생님 좀 어떻게 해봐요.
- 차도도 쌤 : 그래서 물리는 안 하고?
- 강우 : 낼 해야죠. 오늘은 화학만으로도 벅참.
- 차도도 쌤 : 게으름 피우지 말고! 파이팅(이모티콘)! 아참, 강우야?
강우는 투덜거리며 톡을 주시했다.
- 차도도 쌤 : 뭐 해줄까?
2차 진단 고사를 잘 치면 해주겠다던 보상이 생각났다. 딱히 받고 싶은 것은 없었다. 지금 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노트북인데 그 비싼 것을 사달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대답하지 않으면 계속 담임이 괴롭힐 것 같아 빨리 끝내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담임에게서 자유로워지려면 조금 황당한 요구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 강우 : 쌤!
- 차도도 쌤 : 왜?
- 강우 : 제가 주말에 일이 있는데 혹시 시간 되세요?
- 차도도 쌤 : 주말에?
- 강우 : 네, 멀리 나갈 일 생겨서요.
- 차도도 쌤 : 알았어 ㅇㅋ
차도도가 의외로 손쉽게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