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과학고 천재-33화 (33/325)

제33화 어쨌든 주말 (1)

입학 후 첫 주말을 맞이한 기숙사는 이전 주와 달리 북적였다.

기숙사에 남은 신입생 숫자는 비슷했으나 재학생이 그만큼 늘었기 때문이다. 일부 학생들은 집으로 귀가했고 일부는 낮에 학원을 갔다.

물론 강우와 최대우는 전혀 해당 사항이 없었다.

“아침부터 뭐해?”

방문 앞에 놓인 작은 옷장을 열고 연신 한숨을 내쉬는 강우를 향해 최대우가 물었다.

평소 강우와 최대우는 옷차림에 신경 쓰지 않고 무던한 편이었다. 그런 강우가 아침부터 옷장만 들여다보고 있으니 신기했던 모양이다.

“하나같이…… 애들 취향이야.”

“뭐가? 평소에는 잘만 입더니?”

최대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내가 원해서 그런 게 아니라고.”

볼멘소리를 퍼부으며 강우는 옷장을 뒤적였다.

오늘은 무려 차도도와 단둘이 움직이는 날이다. 데이트라고 할 수준은 아니지만 어쨌든 둘만 만나는 시간이다. 정신 연령이 한참 높은 강우는 잠재의식에서 성인 여성과의 데이트처럼 받아들이고 있었다. 예전 손강우 때의 영향이다.

그렇기에 그럭저럭 욕을 먹지 않을 정도의 옷차림을 하고 싶었는데 남은 옷이라곤 말 그대로 아기자기한 초딩 옷뿐이다. 그나마 무난한 옷들은 이미 빨래통에 들어가 세탁을 기다리고 있고.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생각 좀 하고 입었어야 했는데.

최대우가 불난 집에 부채질해댔다.

“어차피 네가 고른 옷 아니었어?”

“아! 울 어머니가……”

한숨을 쉰다고 해결되진 않는다.

강우는 어쩔 수 없이 가슴에 큼지막한 귀여운 그림이 그려진 티셔츠를 꺼냈다. 이걸 입고 차도도 옆에 서면 초등학교 다니는 아들처럼 보이지 않을까 염려되었으나 달리 방법이 없다. 그나마 겨울이라 외투를 입어서 가릴 수 있어 다행이다.

핸드폰이 울렸다.

- 강우야, 왔다!

“어딘데요?”

- 기숙사 앞.

“갈게요.”

어디를 가느냐고 묻는 최대우에게 말없이 손만 흔들고 강우는 재빨리 빠져나왔다.

휑한 기숙사 앞 주차장에서 한 여인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어? 누구시죠?”

“야! 넌 담임도 몰라?”

“평소랑 너무 다르니까 그렇죠. 오늘 데이트 있으세요?”

“데이트? 어…… 데이튼가? 그건 아닌데…….”

평소 정장 스타일이던 차도도가 활동적인 옷을 입고 나타났다. 이렇게 차려입으니 평소보다 확 젊어져서 풋풋한 여대생처럼 보였다.

강우마저 입은 티셔츠 때문에 완전히 어려져서 문제지만. 두 사람이 나란히 서니 대학생 누나와 초등학생 동생 같은 분위기였다.

“자! 봐라! 네가 멀리 간다고 해서 차까지 끌고 나왔잖아!”

차도도 옆에 못 보던 작은 승용차가 한 대 서 있었다. 가장 작고 경제적인 차로 알려진 소형 국민차 모닝이다.

“이거 뭐예요?”

“차! 내가 큰맘 먹고 몰고 나왔지.”

“평소에 이 차 타고 다니세요?”

“아니, 보통 때는 지하철.”

그가 기억하는 차도도와 이미지가 어긋나서 조금 혼란스러웠다. 차가운 표정 하나로 남자들의 접근을 차단하는 차도도라면 이보다 훨씬 고급 차를 탈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의외로…….

그의 마음을 눈치챈 듯 차도도가 차를 탕탕 쳤다.

“이것도 쉽지 않아. 내가 월급 받은 지 이제 이 년 차잖아.”

“혹시 면허는 따셨어요?”

“대학 때. 오래됐어.”

어딘지 모르게 의심스럽다.

차도도의 재촉에 강우는 조수석에 올랐다.

차 내부에 붙어 흔들거리는 귀여운 인형을 보고 있자니 새삼 차도도가 여자라는 점을 깨달았다. 의외로 섬세하게 내부를 아기자기하게 꾸며놨다.

“자, 그래서 오늘 뭘 하는데 나를 불렀어?”

“선생님께서 뭐든 부탁하라고…….”

“그랬지. 정말 데이트하자는 건 아닐 테고, 어디 갈 건데?”

“옷 사러요.”

차도도의 시선이 슬그머니 강우의 티셔츠로 옮겨갔다.

“푸하하!”

“으!”

강우는 재빨리 외투로 티셔츠를 가렸다.

“그게 네 취향이야?”

“아뇨, 어머니 취향요. 그래서 옷 사려고요. 근데 제가 옷을 사기가…….”

“그렇지. 아무렴 옷 쇼핑은 여자 눈이 확실해.”

강우의 목적을 확실하게 이해한 차도도가 고개를 빳빳하게 세웠다.

“좋아. 오늘 내가 확실하게 도와줄게. 대신에…….”

차도도가 강우를 째려보며 말을 이었다.

“앞으로 공부 열심히 해. 농땡이 부리지 말고.”

모닝에 시동이 걸렸다.

* * *

빵빵-

요란한 경적이 울렸다.

운전대를 잡은 차도도가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아, 아니! 저 자식이!”

갑자기 앞으로 끼어든 차를 향해 차도도가 삿대질을 했다.

“으아, 저 자식이 초보를 놀려? 좀 끼워주면 어떠냐고!”

쉬지 않고 화를 내는 차도도를 바라보면서 강우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운전대를 잡으면 사람이 바뀐다더니 차도도가 딱 그 꼴이었다.

보다 못한 강우가 한마디 했다.

“쌤! 면허 딴 지 오래됐다면서요?”

“장롱에 처박아뒀었어.”

“시내 연수는 받았어요?”

“몇 년 전에.”

아무래도 오늘 무사히 돌아가기 쉽지 않을 듯하다.

강우는 의외로 차도도가 허당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학교에서는 카리스마 넘치고 모든 면에서 완벽해 보이더니 학교 밖에서는 이렇게 허술할 수 없었다.

“평소에 차 끌고 다니지 않았어요?”

“내가 힘이 장사야? 이 무거운 차를 무슨 재주로 내가 끌고 다녀? 학교에 차 안 타고 다닌다니까. 바쁠 땐 운전기사가…… 아, 아니야.”

대충 집에 차를 세워두었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빵빵-

빨리 가지 않는다고 뒤차가 난리를 쳤다.

“저 자식이! 초보의 쓴맛을 확 보여줄까?”

버럭 화를 내는 차도도를 달래면서 강우는 무척 고민했다. 마음 같아서는 운전대를 빼앗아서 자신이 몰고 싶었다. 전생의 강우는 최소 십 년을 운전한 베테랑이니까.

다만 지금은 운전면허가 없어 도울 방법도 없었다.

“조심조심 가요.”

“나도 빨리 가고 싶어! 그런데 차가 제멋대로 천천히 간다니까.”

열심히 기어가는 와중에 오른쪽으로 목표한 백화점이 보였다.

“저긴데요?”

“응? 저기야? 근데 차선을 어떻게 바꾸지?”

답이 없다.

차선을 바꾸지 못한 차도도는 목적지를 지나쳤다.

“으으, 유턴 어디서 해?”

“그냥 앞으로 가요. 가다 보면 옷가게 있겠죠.”

내심 한숨만 나왔으나 휴일에 도와주러 온 차도도에게 뭐라고 할 수는 없었다.

무안함을 달래려는 듯 차도도가 주제를 전환했다.

“내가 천천히 가는 이유는 물리학에 근거해서라고.”

“네?”

“물체가 운동할 때 발생하는 공기저항이라고 들어봤지?”

“네.”

“저항은 속도에 비례해서 증가하잖아? 즉, 빨리 달릴수록 휘발유가 많이 먹는다는 뜻이야.”

차도도의 설명은 지금 천천히 가는 이유가 휘발유를 아끼기 위해서란 뜻이었다.

강우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정정했다.

“물체의 속도가 더 빨라지면 비례가 아니고 속도 제곱에 비례해서 저항이 증가하는데요?”

“아!”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차도도가 강우를 쳐다보고는 미소를 지었다.

“우리 강우, 아는 것도 많아!”

“쌤! 앞에!”

“으악!”

차도도가 급히 브레이크를 밟았다. 그녀는 빨간 불로 바뀐 교차로 신호등을 보며 연신 손으로 얼굴을 식혔다.

강우는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정정했다.

“근데요, 자동차는 변속기 때문에 일정 속도 이하에서는 오히려 연료가 낭비되거든요?”

차도도의 눈썹이 쓱 올라갔다.

“너! 감히 선생님 말에 이의를 제기해?”

“아뇨, 그렇다고요.”

찔끔하는 강우를 보며 차도도가 배시시 웃었다.

“강우야, 실은 선생님이 자동차를 전혀 몰라요. 잘 알면 내가 지금 이렇게 헤매고 있겠니? 그러니까 알아서 봐주라.”

“…….”

차도도가 강우를 향해 뿌듯한 미소를 날렸다.

“그래서? 계속 설명해봐.”

“네?”

“쌤 생각에는 그걸 바탕으로 자동차의 경제속도와 종단속도를 풀이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종단속도의 대표적인 예는 빗방울이다. 중력에 의해 낙하하는 빗방울은 일정 속도에 이르면 더는 속도가 증가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다면 비를 맞는 모든 물체는 깨져버리고 말 테니까.

‘운전보다 물리 강의를 더 좋아하나?’

강우는 간략하게 열대지방에서 내리는 빗방울, 온대지방의 빗방울 속도가 어떻게 다른지, 또 하늘에서 떨어지는 운석의 속도는 어떤지를 과학적으로 설명했다. 또 이 이론을 자동차에 적용하면 어떤 부분이 달라지는지.

강우는 물리 현상을 설명하는 데 재미가 붙어 계속 말을 이었다. 이런 모습은 천생 물리학 교수가 천직이라고 드러내고 있었다.

한참 재미있게 과학 이론을 이어가던 강우는 차도도의 눈빛을 흘낏 봤다.

앞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가 반짝인다. 물리 현상에 흥미를 느껴서인지 강우에게 감탄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그 순간 강우는 차도도의 의도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었다. 그가 물리학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 자연스럽게 탐색하는 과정일지도.

어쨌든 차도도와 대화가 잘 통해서 강우는 무척 즐거웠다.

물리 이론으로 대화가 통하는 여자가 있으리라고는 전생에서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떡하니 눈앞에 그런 여자가 있었다.

차도도의 안면에 환한 미소가 어렸다.

“강우, 넌 참 신기해.”

“네?”

“뭔가…… 아는 게 많으면서도 모르는 것도 많아.”

칭찬인지 비난인지. 어쨌든 차도도가 그를 나쁘게 볼 이유가 없으니 강우는 흥미롭게 경청했다.

“네 성적을 쭉 살펴봤는데…… 놀랍더라.”

“2차 진단평가요?”

“아니, 전부다. 그래서 내가 열심히 키워 보겠다고 다짐했어. 파이팅!”

어째 앞으로 무시무시한 일이 벌어질 것 같아 사양하고 싶었으나 그를 향해 방긋 웃는 차도도의 얼굴을 보는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 * *

계속 직진하다가 우연히 발견한, 서울 근교의 대형 아울렛 매장에서 강우는 옷을 골랐다.

“이건 어때요?”

강우가 선택한 옷을 본 차도도가 미간을 찌푸렸다.

“넌 무슨 옷을 그렇게 노숙하게 입으려 해?”

“노티나요?”

강우는 평소처럼 옷을 골랐을 따름이다. 문제는 그게 전생의 방식이라 삼십 대 중반의 나이에도 맞지 않는 스타일이었다.

“넌 지금 입은 옷은 완전 초딩인데 고르는 옷은 사십 대 중년이야.”

괜히 뜨끔한 강우는 바로 입을 닫았다.

“그래도 발랄한 십 대 스타일이 딱 좋겠지?”

“으아, 그건 좀…….”

강우는 울상이 되어 적극적으로 손을 저었다. 초딩 옷도 문제지만 중딩 옷도 입고 싶지 않다.

“흐음, 그래? 그럼 나랑 딱 맞는 정도로 할래? 이십 대 초반?”

“이십 대 초반?”

의심스러운 눈으로 차도도를 쓱 훑어보자 바로 주먹이 날아왔다.

그나마 그게 최적이다.

옷을 고르는 차도도의 안목은 과연 달랐다. 그녀가 고른 옷은 하나같이 강우도 마음에 들었다.

“돈은 있어? 선생님이 사줄까?”

“아뇨, 이번에 장학금 받은 거로 사려고요.”

“아하!”

차도도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옷을 사고 나니 배가 고팠다.

“밥 먹을래? 밥은 선생님이 사줄게. 뭐 먹을래?”

아울렛 매장 한쪽에 식당가가 보였다. 두 사람은 식당 메뉴를 살피며 선택의 기로에 섰다.

“전 저거요.”

강우가 고른 메뉴는 콩나물국밥이었다.

차도도가 코웃음 치며 팔을 잡고 끌었다.

“넌 참 이상하네. 옷만 노숙하게 고르는 줄 알았더니 먹는 것도 완전 아저씨 스타일이야. 고딩이 무슨 국밥이야? 피자나 이런 거 골라야지.”

“국이 있어야 밥을 먹는 기분이…….”

이래서 전생을 아직 못 벗어난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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