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화 어쨌든 주말 (2)
“선생님은 파스타. 어때?”
“돈 내는 사람 마음이죠.”
강우는 내심 투덜대며 차도도를 따라갔다. 파스타로 어떻게 배를 채울 수 있는지 도무지 모를 일이었다.
파스타를 앞에 두고 우아하게 포크질하는 차도도와 달리 강우는 후루룩 한입에 먹어 치웠다.
콜라를 입에 물고 강우는 조용히 차도도를 살폈다. 그녀를 이렇게 가까이에서 편안하게 관찰하는 것도 처음이다.
보통 때는 담임 선생님이란 생각에 왠지 모를 벽이 느껴졌는데 지금 이렇게 둘이서 밥을 먹고 있으니 데이트하는 기분이 들었다.
겉으로는 어떨지 모르지만, 강우의 정신 연령은 적어도 차도도보다 한참 위이기에 전혀 어색한 기분은 없었다. 그것도 물리로 대화가 통하는 여자가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할수록 왠지 차도도가 예뻐 보였다. 실제로 차도도의 미모가 뛰어나기도 했다. 전생에서도 이만한 미인을 본 적이 없을 정도였으니까.
선생님을 앞에 두고 무슨 생각을……. 강우는 곧바로 잡념을 날려 보냈다.
그의 시선을 의식한 차도도가 미소를 지으며 질문을 던졌다.
“강우야, 또 필요한 거 있니?”
“음, 많죠.”
“뭐?”
“수건, 치약, 잠옷, 샴푸, 비누…….”
생필품이 우르르 나왔다. 남들은 뭐라 할지 모르지만 강우는 실제로 이런 것들이 부족했다. 가난한 집 사정을 알기에 돈을 함부로 쓰기 어려워서다. 집에서 가져온 카드는 정말 필요한 곳에 최소한으로 긁었다.
강우의 집안 형편을 차도도도 잘 알기에 그의 말을 바로 이해했다.
“그렇겠네. 그런 것 말고 다른 건?”
“노트북이 필요하긴 한데…….”
무심코 말을 꺼냈던 강우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과학고 학생이라면 대부분 노트북을 갖고 있다. 과제를 할 때 거의 필수여서 그도 지금 간절하게 필요하다. 물론 그의 목적은 조금 다르긴 하다. 전생의 손강우가 남긴 자료를 다시 확보하기 위해서. 또 수시로 그 연구를 계속 이어가기 위해서.
“친구들은 노트북을 다 갖고 있지?”
“차희랑 수아는 당연히 있고 대우도 있더라고요. 그때 과제연구 때 잠시 빌려 썼었는데…… 저도 하나 살까 하고 있었어요.”
받은 장학금에 어떻게든 돈을 조금 더 모으면 적절한 성능의 노트북을 구하는 게 불가능하진 않았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차도도가 제안했다.
“내가 사줄까?”
“네? 그게 얼마나 비싼데…….”
“그거 몇 푼 된다고.”
“언제는 소형차도 이 년 차 직장인에게는 쉽지 않은 거라더니…….”
“그건 그거고.”
갑자기 차도도가 왜 이런 제안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다. 오늘 옷을 사러 같이 와준 것만으로도 아주 고마운데 노트북은 너무 나간 느낌이다.
“대신에 너도 내 부탁을 하나 들어준다면.”
그렇지, 공짜일 리가 없다. 역시 조건이 걸렸다.
“뭔데요?”
“앞으로도 매일 클래스룸 접속하고 그날 무슨 공부를 했는지 밤에 톡으로 보고해.”
2차 진단 고사를 빌미로 계속 보고했었으니 새삼 달라질 것은 없지만 솔직히 신경 쓰인다.
“쌤, 대체 저를 왜 이리 괴롭히는 건데요?”
“내가 네 가능성을 딱 알아봤거든. 내가 계속 괴롭히면 크게 될 인물이란 거.”
차도도의 표정에는 자신감이 넘쳤다.
첫 번째 시험에서 거의 꼴찌를 했다가 일주일 만에 중간으로 올라섰으니 그녀의 눈에는 그렇게 보일만도 하다. 계속 옆에서 밀어붙이면 성적이 더 오른다고 판단했나?
“그래도 노트북은 좀 미안한데요? 그냥 톡은 계속 넣을게요.”
강우의 거절은 먹히지 않았다.
“노트북값 선생님한테는 아무것도 아니거든. 그러니 받아도 돼.”
“선생님 월급이 얼마나 된다고…….”
“충분하거든? 그리고 쌤 부자야. 그러니까 괜찮아.”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알 수 없으나 강우는 어쩔 수 없이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열정적인 선생님만 있다면 학생들이 재능을 꽃피우지 못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포크를 한쪽으로 치우면서 차도도가 몸을 일으켰다.
“자, 그럼 노트북을 사러 가볼까?”
강우도 옷이 잔뜩 든 쇼핑백을 손에 들었다.
* * *
“우와! 최신형이네?”
최대우가 연신 노트북을 보며 침을 흘렸다.
“네 꺼랑 비슷한데?”
“아니지, 내 껀 구형이고 이건 최신형이라 엄청 비싸.”
노트북을 쳐다보고 있으려니 강우는 기분이 이상했다.
어쩌다 보니 차도도는 가장 좋은 모델을 그에게 사줬다. 손강우였을 때라면 그 또한 고민하지 않고 샀을 테지만, 지금 그의 처지에서는 감히 욕심내기 어려운 물건이었다. 그것을 차도도가 해결해준 것이다.
솔직히 그녀의 의도를 파악하기 힘들었다. 물론 공짜는 아니어서 매일 톡으로 공부한 내용을 보고하는 수고를 해야 했지만. 어차피 앞으로 공부를 할 예정이니 딱히 나쁜 조건은 아니었다.
어쨌든 최근 들어 가장 급했던 문제를 해결했다. 물론 최대우에게는 차도도가 사줬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것은 둘만의 비밀이어야 했다.
“이제 우리 둘이서 게임 할 수 있겠다!”
게임을 하다가 걸리면 벌점을 받는다고 학교에서 엄포를 놓았으나 완전히 근절할 수는 없었다.
“난 게임 별로 안 좋아하는데…….”
“그럼 어쩔 수 없고.”
강우의 대답에 최대우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옆에서 노트북을 구경하던 최대우가 자신의 침대로 돌아간 후 강우는 작업을 시작했다.
먼저 한설대학교에 있었던 손강우의 포털 계정에 접속했다.
‘아직 살아있으려나?’
다행히 접속은 순조로웠다. 메일과 클라우드 계정이 남아 있었다. 손강우가 죽은 지 불과 한 달밖에 안 돼서 그런지 계정 폐쇄는 아직이었다. 최종 접속 날짜는 그가 죽었던 날이었다. 적어도 그의 계정을 누군가가 해킹하거나 손댄 흔적은 없었다.
이곳에는 손강우가 수년에 걸쳐 연구했던 모든 성과와 자료가 남아 있었다. 누군가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자료고 그 가치도 어마어마했다.
메일함에는 그가 죽은 후 날아온 메일이 우르르 쌓여 있었다. 미국 방산업체의 제안 메일이 아쉬움을 불러왔다. 친구들에게서 온 메일 제목을 보니 그때의 그리움이 물밀듯 밀려와 갑자기 눈물이 흘렀다.
강우는 과거를 떠올리며 잠시 먹먹한 기분에 몸을 맡겼다.
그 메일을 지금 읽을 수는 없다. 읽어봐야 소용도 없고. 그가 이 계정에 접속한 것도 비밀이어야 한다.
강우는 중요 자료를 노트북에 다운받았다.
다운받은 파일들이 노트북에 옮겨지는 걸 보며 그의 마음도 단단해졌다. 마도환을 향한 복수는 둘째였고 다시 핵융합 연구를 시작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 때문이었다.
문득 손강우가 다녔던 한설대학교의 연구실이 지금 어떻게 되었을지 궁금해졌다.
그 연구실에는 그가 연구하던 각종 중요 자료들이 잔뜩 있었다. 학교 계정에 넣어둔 자료를 확보하고 나니 연구실에 둔 자료들도 욕심이 났다. 담당 교수가 죽었으니 연구실을 그대로 두진 않았을 것이다. 그의 물건은 어디로 갔을까.
빨리 그 행방을 알아봐야겠다.
* * *
일요일 저녁이 되자 학생들이 돌아왔다.
평소처럼 강우는 윤수아의 호출을 받고 세미나실로 불려갔다. 그곳에는 집에서 돌아온 윤수아와 손차희가 이미 진을 치고 있었다. 당연히 윤수아의 앞에는 과자가 놓였고 최대우는 그 과자를 날름 뺏어 먹었다.
“잘 다녀왔어?”
“너희는 기숙사 잘 지켰어?”
윤수아의 엉뚱한 인사가 돌아왔다.
“기숙사에 뭔 일이 있으려고.”
“불이라도 나면 너희가 꺼야지.”
“갑자기 무슨 불? 불나면 119 부르고 도망쳐야지.”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으며 강우는 공부할 준비를 했다.
손차희는 학원에서 내준 수학 문제집을, 윤수아는 생물 참고서를 꺼내놓고 있었다.
최대우는 물리책을, 강우는 화학책을 꺼냈다.
윤수아가 놀란 표정으로 강우의 책을 뒤적였다.
“화학도 공부해?”
“공부는 아니고 숙제해야지.”
“숙제가 있었어?”
반문하는 윤수아의 얼굴에 원소 주기율표를 들이밀었다.
“이거 남은 거 안 써오면 혼낸다고 해서.”
“아하! 또 복사해서 내.”
신새벽이 눈에 불을 켜고 검사한다고 했으니 어쩔 수 없이 강우는 화학 숙제를 해야 했다. 겸사겸사 신새벽에게 톡으로 보고해야 하고. 이래저래 귀찮은 일투성이다.
“열아홉 장을 언제 다 쓰지?”
옆에서 최대우가 끼어들었다.
“내가 써줄까?”
“너도 써야 하잖아?”
“내꺼 쓰면서 같이 쓰지. 한 장에 빵 한 개씩. 콜?”
떠넘기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으나 그렇게 하기에는 돈이 없다. 물론 장학금 받은 돈이 아직 남아 있었지만 헤프게 쓰면 언제 바닥날지 모르니 참아야 했다. 아! 서글픈 인생이다.
“그냥 내가 할게.”
강우는 주기율표를 펴고 하나씩 옮겨적기 시작했다.
손차희는 인사 후 말없이 공부에 몰두하고 있었다.
강우는 손차희를 힐끔거리면서 그녀가 공부하는 모습을 유심히 관찰했다. 평소와 다름없이 보이면서도 어딘지 분위기가 달랐다. 뭔가 비장한 기색이다. 아마 2차 진단 고사 결과가 충격이었나보다.
참다못한 강우는 윤수아를 툭 건드렸다.
“차희는 왜 저래?”
“열심히 공부하겠다고…….”
열심히 학원 문제집을 파고 있는 손차희를 보니 조금은 안타까웠다. 저렇게 문제만 열심히 풀면 흥미가 떨어져서 집중하기 쉽지 않다. 공부는 긴 마라톤이고 단기간에 승부를 가르는 분야가 아니었다. 고등학교 과정만 3년이고 대학교, 나아가 연구자로 직업을 선택한다면 평생 공부해야 한다.
“열심이긴 하네.”
그렇다고 해줄 말도 없어서 강우는 손차희에게서 눈을 뗐다.
“아참! 강우야! 동아리 어디 들 거야?”
애초에 강우는 동아리에 별 관심이 없었다. 고등학교는 다시 핵융합 연구를 재개하기 위한 징검다리일 뿐.
“생각 없는데?”
“안 하면 대학 가기 힘들어.”
대학 입시는 수능과 학생부로 나뉘고 수시 입학을 위해서는 학생부에 한 줄이라도 더 적어야 했다. 특히 과학고의 경우 학생부에 적힌 내용이 대단히 중요하다. 이것 때문에 과제연구나 R&E, 동아리 활동 등을 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물론 학술적인 동아리 외에 취미 동아리도 꽤 있었다.
“넌 무슨 동아리 들 건데?”
“아직…….”
윤수아가 말을 얼버무릴 때 최대우가 먼저 답했다.
“난 천체관측 동아리!”
하긴 최대우가 천체관측에서 빠질 리 없다. 강우도 긍정을 표했다.
“담당 선생님이랑 이미 잘 아니까…… 괜찮겠네.”
“강우야! 너도 같이하는 거 아니었어?”
최대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둘이 같이? 그럼 나도 할까?”
윤수아가 끼어들었다.
“넌…… 컴퓨터 동아리나…… 이런 거 아니었어?”
“그러다가 성적 망칠 거 같아서…… 집에서도 반대하고…….”
지난 과제연구에서 보여준 윤수아의 컴퓨터 실력은 대단했다. 그녀의 고민이 이해가 되면서도 아쉬웠다.
어느 쪽이 반드시 낫다고 할 수 없기에 강우는 직접적인 조언을 하지 않았다.
“차희는 뭐 한데?”
강우의 시선이 다시 손차희에게 쏠렸다.
그제야 손차희가 조용히 연필을 내려놓고 반응했다.
“아니, 난 수학 동아리 들어갈 거야.”
“갑자기 웬 수학?”
“차희는 지난번 고곽 3대 천재에 충격받았잖아…….”
윤수아가 대신 이유를 설명했다.
전설로 불리는 그 천재들의 공통점이 바로 국제 수학 올림피아드 우승자였다. 국제 올림피아드 입상은 학원에서 배워 해결하기 어렵다. 가장 좋은 방법이 관련 동아리 활동이다.
그 때문에 손차희는 일찌감치 수학 동아리 쪽으로 방향을 정했다.
윤수아가 빙그레 웃으며 이유를 더 했다.
“유성이랑 만나기 싫어서 그렇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