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과학고 천재-35화 (35/325)

제35화 동아리 선택 (1)

“유성이가 거기에서 왜 나와?”

손차희가 윤수아를 째려보고는 다시 문제집으로 시선을 돌렸다.

강우는 과제연구 전시 당시에 만났던 이학년 학생을 떠올렸다. 나이가 한 살 아래인데 일 년 전에 고려 과학고에 입학해서 지금은 한 학년 위 선배가 되었다고, 손차희와는 학원에서 치열하게 경쟁했고 그 때문에 손차희는 그 학생을 싫어한다고.

‘이름이…… 권유성이라 했었지.’

전시회 때 그들이 수행한 과제연구에 관심을 보인 거의 유일한 고학년생이었었다. 이로 미루어보면 권유성은 천문에 관심이 많은 학생이 분명했다. 그러니 천체관측 동아리에 속해있을 가능성이 컸다.

강우는 손차희가 천체관측 동아리에 가지 않겠다는 이유를 충분히 납득했다. 그녀의 발전을 위해서도 수학 동아리가 더 낫다. 다만 손차희의 수학 잠재력은 B였기에 고차원 수학을 배우게 되면 갈수록 힘들어할 게 뻔하다. 그 부분이 그녀의 성장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모른다.

시무룩해진 윤수아는 손차희를 제쳐 두고 다시 강우에게 관심을 보였다.

“강우야! 너는 천체관측 동아리 들어갈 거지?”

“나도 아직…….”

“강우는 당연히 해야지.”

강우의 말을 최대우가 바로 잘랐다.

딱히 마땅한 동아리가 없는 데다 일전에 천체관측반은 야밤에 기숙사를 빠져나올 수 있는 특전이 있다는 기억이 났다. 무엇보다 친구들과 함께하니 적응이 편하다.

윤수아가 곧바로 결론을 내렸다.

“아자, 아자! 우리 모두 천체관측 동아리에 가입하는 거야.”

윤수아와 권유성이 친하다던 기억이 났다. 누나 동생 하는 사이라고. 그런데 그 권유성이 나이가 한 살 어리다 보니 아무래도 족보가 살짝 꼬일 것 같긴 하다.

“신입 부원 모집하면 바로 등록해야 해. 어떤 동아리는 인원 초과하면 절대 안 끼워주는 곳도 있어.”

물론 천체관측 동아리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다.

* * *

신입생 과제연구 판넬이 전시됐던 복도가 새로운 내용으로 바뀌었다.

신입생을 모집하기 위한 동아리 홍보 판넬이 쭉 나열됐다. 동아리를 홍보하는 고학년 학생들과 동아리에 가입하려고 판넬을 기웃거리는 신입생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모든 학생은 최소한 하나의 체험 활동 동아리에 의무적으로 가입해야 한다. 동아리는 체험 활동 동아리와 자율 동아리로 나눌 수 있고 수학연구반이나 천체관측반은 체험 활동 동아리에 속했다.

강우는 어슬렁거리며 홍보장을 돌았다. 그에게 이런 분위기는 정말 생소했다. 대학교도 아닌 고등학교에 동아리가 이렇게 많은 줄 처음 알았다.

어느 학교에나 다 있는 교지편집반, 방송반, 도서반 외에 과학고임을 대변하는 수학연구반, 물리실험반, 화학실험반도 보였다.

“국제 올림피아드 금상에 빛나는 수학연구반은…….”

“물리인증, 물리 올림피아드, 당신의 고등학교 생활을 장식할…….”

“고대 연금술사가 돌아왔다. 컴퓨터 기판에서 금을 채취하는 화학실험반은…….”

홍보에 나선 고학년들의 목소리가 귀에 쏙쏙 박혔다. 정신 놓고 있으면 서너 개씩 가입할 판이다.

당연히 강우는 물리실험반이 궁금했다. 하지만 발걸음을 옮기는 찰나 최대우에게 팔을 잡혔고 멈춰 선 곳은 천체관측반 판넬 앞이었다.

두 사람의 옆에 윤수아마저 붙었다.

“어? 수아 누나!”

판넬 앞에서 키 작은 남학생이 윤수아를 환영했다. 그때 본 그 권유성이란 학생이다.

“유성아, 나도 가입해도 돼?”

“누나라면 당연히 환영이죠. 그때 과제연구 주제를 보고 우리 동아리에 올 줄 알았어요.”

강우는 권유성의 머리를 다시 확인했다. 물리에 S라는 글자가 찬란히 빛나고 있었다. 천체관측반이니 이 학생은 훗날 천체 물리에 특화될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이 신입생들은?”

권유성의 시선이 최대우와 강우를 향했다.

몸집이 큰 최대우와 작은 권유성이 나란히 서니 확실하게 비교가 된다.

“흐음, 그때 그 과제 같이한 학생들이죠?”

“응, 나랑 같이. 그러니까 잘 봐줘.”

“누나 부탁인데 당연하죠.”

권유성이 고개를 끄덕이며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두 사람을 훑었다.

“우리 천체관측반이 인기가 높아요. 일반적으로 동아리 전체 인원은 스무 명 이내. 한 학년에 일곱 명이 한계죠. 지금 가입 의사를 밝힌 학생이…….”

“없잖아?”

윤수아의 지적에 권유성이 시무룩해졌다.

“작년에는 경쟁이 치열했는데 올해는 영 이상해.”

강우는 올해 인기가 없는 이유가 권유성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홍보는커녕 인상만 팍팍 쓰고 있으니까.

“그래도 전통을 건너뛸 수는 없죠.”

권유성이 한쪽에서 종이뭉치를 꺼냈다.

“그거 뭐야?”

“가입 시험요. 원래는 시험 쳐서 높은 점수순으로 뽑았다니까요.”

“나도 그래?”

“아뇨, 누나는 제외죠. 그래도 풀어서 내야 해요.”

“내 친구들은?”

“음…….”

권유성이 눈을 크게 뜨고 두 사람을 다시 살폈다.

“내 친구들 안 받아주면 나도 다른 동아리 갈 거야.”

“누나!”

엄포에 화들짝 놀란 권유성이 찜찜한 표정으로 그들에게 문제지를 나눠주었다.

문제지를 받아든 강우는 한숨을 푹푹 쉬었다.

겨울철 별자리 나열하기, 황도 12궁 별자리 쓰기…… 대충 이런 문제들이었다. 당연히 강우가 알 턱이 없다. 엄연히 그런 문제는 물리와 전혀 상관없으니까.

그나마 아는 문제가 있긴 했다. 과제연구를 하면서 최대우에게 배웠던, 밤하늘에서 가장 밝은 별 이름 정도다.

최대우를 슬쩍 보니 번개 같은 속도로 쭉쭉 써 내려가고 있고 윤수아도 어렵지 않게 문제를 풀고 있다.

강우는 한 문제를 고민하다가 하늘 한 번 보고 또 한 문제를 고민하다가 하늘 보기를 반복했다. 세수하기 귀찮아하는 토끼처럼 이 귀찮은 짓을 왜 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흔적이 역력했다.

그 와중에 옆 동아리에서 떠드는 소음이 귀를 어지럽혔다.

“수학연구반에 들어오시면 이 학교 재학생 중 최고의 천재라는 박일현 학생을 만날 수 있어요! 작년 국제 수학 올림피아드 은상에 빛나는…….”

최고의 천재라는 말에 강우의 눈길이 절로 돌아갔다.

수학연구반 선전 판넬 앞에 샤프하게 생긴 남학생이 서 있었다. 두툼한 안경을 낀 학생의 모습이 정말 평생 공부만 하다가 저승으로 돌아갈 인상이고 여학생들이 절대 꼬이지 않을 타입이다. 이마에 재미없는 사람이라고 딱 박혀있었다.

‘저 남학생이 박일현인가…….’

무심코 박일현에게 시선을 돌린 강우의 눈이 확 떠졌다.

- 박일현, 수학 S, 물리 A, 화학 C, 생물 C, 지구과학 C

무려 수학에서 S가 떴다. 다만 다른 과목에서는 영 상태가 좋지 않다. 수학이 S라면 국제 수학 올림피아드 은상이라는 타이틀이 이해됐다.

들리는 선전으로 유추하면 지금 이학년 중에서 최고의 천재로 인정받는 학생인 모양이었다.

강우는 박일현의 인상을 머릿속에 기억했다. 언젠가 만날 일이 있겠지.

“강우 후배님?”

그의 문제지를 누군가가 톡톡 두드렸다. 권유성이다.

“네?”

“뭐 하세요? 문제 안 풀고.”

“아는 게 없어서…….”

권유성이 눈썹을 확 일그러트렸다.

다급하게 윤수아가 설명했다.

“그때 과제연구, 그거 수식 계산한 사람이 강우야.”

“누나 아니고요?”

“난 프로그램만. 내가 그렇게 어려운 수식을 어떻게 풀어?”

이해했다는 듯 권유성이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강우를 보는 눈빛은 호의적이지 않았다.

“마지막에 엄청 어려운 계산 문제가 있으니까 그거 풀면 인정해줄 수도 있어…….”

“그거 못 푼다고 쫓아내면 누나 화낼 거야.”

윤수아가 얼른 경고 멘트를 날렸다.

사실상 풀 수 있는 문제가 없었기에 강우는 대충 시험지를 넘겼다.

그러다가 권유성이 장담한 마지막 문제를 만났을 때 그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이건 구면 기하학 문제인데?’

천문학에서 별의 좌표를 변환할 때 필요할 뿐 딱히 쓰일 곳이 없기에 수학을 심화 과정까지 했더라도 접할 일이 없는 분야다. 물론 강우는 지난번에 소행성 위치를 계산하면서 관련 이론을 사용했기에 당연히 다뤄봤다.

두 별의 적경, 적위 좌표를 주고 두 별 사이의 각거리를 구하는 문제였다. 삼각함수와 구면 기하학 기초를 알면 별반 어렵지 않은 문제이지만 아마 풀 수 있는 학생은 없을 것이다.

강우는 문제를 노려보다가 권유성을 살폈다.

녀석이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적어도 그 눈빛에 ‘정말 수식 연구를 제대로 했겠어?’, ‘김선호 선생님이 알려준 수식을 그대로 적용만 했겠지?’ 등의 깔보는 평가가 담겨있었다.

권유성의 잠재력이 대단하고 지금도 천체관측반에서 맹활약하고 있겠지만 강우에겐 하룻강아지일 뿐이다.

강우는 권유성을 향해 피식 웃음을 날렸다.

바로 권유성이 반응했다.

“못 풀겠지? 못 풀겠지?”

“너, 초딩이냐?”

“뭔 소리야! 중학교 졸업한 지 언젠데…….”

“어? 유성이 너 중학교 졸업 안 했잖아?”

윤수아가 바로 끼어들었다.

권유성은 중학교 1학년을 마치고 영재고에 입학했기에 중학교를 졸업하지 않았다.

급소를 찔린 것처럼 움찔하던 권유성이 시선을 후다닥 돌렸다.

곧바로 강우는 재빠르게 손을 놀려 마지막 문제를 풀었다. 시간은 불과 2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강우는 거의 백지상태인 답지를 제출했다. 아는 게 없으니 어쩔 수 없다. 푼 문제는 단 두 개였다.

권유성이 답지를 받으며 툴툴거렸다.

“확 떨어트려야 하는데…….”

기겁한 윤수아가 그를 노려보자 권유성이 재빨리 손을 저으며 헤헤 웃었다.

권유성의 시선이 강우의 답지로 향했다.

놀랍게도 대부분 빈칸이었으나 가장 어려운 마지막 문제만큼은 완벽하게 풀이과정까지 적혀있었다.

권유성의 입이 쩍 벌어졌다. 작년에 선배들에게서 들은 기억이 났다. 역대로 동아리에 가입한 학생 중에 이 문제를 풀었던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고.

그런데 저 강우란 녀석이 이 문제를 풀다니! 과제연구를 수행하면서 수식을 모두 계산했다는 윤수아의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으으, 천재였나?’

약간은 착잡한 심정으로 강우의 답지를 넘기고 최대우의 답지를 확인한 권유성은 다시 놀랄 수밖에 없었다.

모든 문제의 답이 완벽하게 적혀있었다. 그것도 마지막 문제까지.

권유성의 벌어진 입은 다물어지지 않았다.

‘이 자식들 괴물이야?’

동아리 가입 등록을 완료한 강우와 동료들은 자유롭게 다른 동아리를 구경했다.

“강우야! 마지막 문제 풀었어?”

최대우가 강우의 어깨를 붙잡고 장난스럽게 물었다.

“마지막 문제? 그거 과제연구하면서 했던 건데? 그때 문제에 비하면 완전 기초지.”

“그렇지. 덕분에 나도 손쉽게 풀었어.”

하이파이브를 나누는 강우와 최대우를 보면서 윤수아는 적어도 저 둘이 동아리에서 떨어질 일은 없겠다고 생각했다. 비록 권유성에게 협박하듯 요구했지만 설사 그러지 않았더라도 저 둘은 분명히 붙었을 것이다.

윤수아는 강우와 권유성, 두 천재가 이끌어 갈 동아리의 미래를 즐겁게 상상했다.

그녀가 보기에 저 둘은 최고의 천재였다. 두 천재가 불협화음을 만들지, 아니면 더 조화로운 화음을 만들지 사뭇 기대됐다.

체험학습 동아리는 하나밖에 가입할 수 없지만 자율 동아리는 여러 개 가입이 가능하다. 농구부나 댄스부, 만화창작부가 눈에 뜨였다.

수학이나 물리 분야의 다양한 동아리도 즐비했다.

강우는 자율 동아리인 이론물리부에 가입하려다가 포기했다. 물리 성적을 높이기 위한 물리 문제풀이반이란 설명을 들어서다. 이런 동아리는 인원 제한이 없어 학생들이 바글거렸다. 과학고라서일까, 성적을 욕심내는 학생들이 많았다.

옆을 돌아보니 최대우와 윤수아가 사라지고 없었다.

윤수아는 컴퓨터연구반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아쉬움을 달래고 있었고 최대우는 댄스부 앞에서 고민하고 있었다.

거구의 최대우가 댄스와 과연 어울릴지 의문이었지만.

그때 강우의 앞을 익숙한 사람이 지나갔다. 그녀는 곧장 수학연구반으로 걸어가서 가입원서를 썼다. 손차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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