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화 과제연구 지도교사 (1)
김윤택이 여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지난 과제연구에서 이민찬 군은 물리를 선택했었죠. 이중진자 연구였던가요? 학생이 물리를 선택하면 제가 애써봐야겠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고려 과학고에서는 과제연구 또는 R&E 지도교사가 담임보다 학생에게 더 큰 영향을 미친다. 과제연구 지도교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학생부 내용이 달라지고 이는 대입 수시 입학의 성패를 가르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학생을 좋은 대학에 많이 보낼수록 해당 선생님의 평가도 올라가기에 대부분 선생님은 우수한 학생의 지도교사가 되려고 무척 노력했다.
주임 선생인 김윤택은 이 부분에서 장점이 많았다.
특히 그는 모교인 한국대학교에 연줄이 있어 한국대학교 교수들과 합동연구를 자주 추진했다. 한국대와 합동연구는 R&E에서 가장 돋보이는 성과였기에 학생들도 김윤택을 과제연구 지도교사 일 순위에 두었다.
“주임 선생님께서 그동안 우수학생을 좋은 대학에 많이 진학시키셨으니까 당연합니다.”
김윤택 지지자인 생물 담당 박종수가 찬성했다.
현재 이민찬의 담임이 김윤택이었기에 반대하는 선생님도 없었다.
빙그레 웃음을 머금은 김윤택이 차도도를 힐끔 살폈다. 차도도는 아무 표정 없이 회의에 임하고 있었다.
“말이 나온 김에…… 손차희 학생도 물리를 선택한다면 내가 데려가고 싶습니다만.”
김윤택의 제안에 차도도의 안면이 흔들렸다.
김윤택의 속셈이 명확해졌다. 올해 수석과 차석 입학생인 이민찬과 손차희를 동시에 지도하겠다는 뜻이다. 별다른 문제가 없다면 과제연구 지도교사는 졸업 때까지 바뀌지 않는다.
물론 차도도도 안다. 김윤택은 내년 R&E에서 학생들에게 좋은 기회를 제공할 가능성이 높았다. 손차희도 그 사실을 안다면 김윤택을 지도교사로 선택할 것이다.
“그건…… 차희 학생에게 물어봐야죠.”
“하하, 물론 그렇지요. 차희 학생이 수학을 선택할 수도 있으니까요.”
약간은 그녀를 무시하는 듯한 발언에 차도도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렇다고 주임 선생님에게 대들 수는 없다.
단숨에 수석과 차석 입학생의 지도교사 자리를 선점한 김윤택은 내친김에 한 발 더 나갔다.
“그리고…… 그 반에 강우라는 학생 있잖습니까?”
“강우는 성적이 별로인데요?”
차도도는 강우라는 이름이 나오는 순간 가슴이 콱 막히는 기분을 느꼈다. 이건 손차희보다 더 아팠다. 그녀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하하, 압니다. 잘하는 학생만 받는 것은 교사의 도리가 아니지요.”
차도도는 내심 김윤택을 욕했다.
그동안 김윤택이 우수학생을 독점했다는 사실을 모두가 안다. 김윤택의 대학 입시 결과가 탁월한 이유도 우수학생을 잘 고른 덕분이다. 물론 김윤택의 노력이 전혀 없었다고 깎아내릴 정도는 아니지만.
“하지만 강우는 세심한 보살핌이 필요한 학생이에요…….”
차도도는 강우의 성격을 설명했다. 강우의 다소 유별난 행적 때문에 모든 선생님이 수긍했다.
“저도 압니다. 그럴수록 경험 많은 교사가 필요하지요.”
한 방에 제압당한 차도도는 반박할 말이 없었다. 교사 경력으로 따지면 그녀는 완전 햇병아리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녀는 김윤택이 강우를 노리는 이유를 헤아렸다. 분명히 2차 진단 고사 영향일 것이다. 2차 진단 고사에서 강우는 수학과 물리에서 만점을 받았으니까. 학교에 축적된 자료를 보면 수학과 물리를 잘하는 학생 가운데 천재가 많았다.
강우의 두 과목 성적은 그야말로 놀랄만한 것이었기에 김윤택의 호기심을 자아냈겠지.
다만 차도도는 우려가 컸다. 강우가 이민찬이나 손차희와 함께 김윤택의 지도를 받게 되면 김윤택이 과연 강우를 제대로 지도할까. 어쩌면 꿔다놓은 보릿자루 신세가 되는 건 아닐까.
그녀는 강우의 가능성을 엿봤기에 이대로 빼앗기긴 싫었다. 손차희보다 강우를 잃는 것이 더 신경 쓰였다.
그녀가 항의하려고 할 때 뜻밖에도 다른 사람이 나섰다.
“강우 학생이라면 저도 관심이 있습니다만.”
수학의 정명욱이 끼어들었다. 수학 수업 시간에 일찌감치 강우의 천재성을 알아챈 그도 강우의 지도교사가 되겠다고 나섰다.
김윤택이 못마땅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물론 강우가 과제연구로 수학을 선택한다면 정 선생님께서 맡으셔도 되지요.”
“강우는 화학을 선택할 거예요!”
놀랍게도 신새벽마저 등장했다.
차도도에게도 신새벽의 개입은 뜻밖이었다. 더구나 강우의 화학 성적은 매우 나빴다. 그런 학생을 뽑아서 화학 연구를 시키겠다니!
정작 신새벽은 차도도에게 미소를 지으며 자신 있게 설명했다.
“부족한 과목의 성적이 오르면 가장 효과가 크죠. 강우 학생이 화학을 선택하면 제가 팔을 걷어붙이고 화학우수자로 키울 거예요. 우리 학교에 새로운 천재의 탄생을 장담하죠.”
차도도는 신새벽의 주장에 머리를 맞은 것처럼 당황했다.
새로운 천재? 그냥 우수학생도 아니고? 신새벽이 강우에게서 어떻게 천재성을 봤지? 정작 강우는 화학 숙제도 제대로 하지 않았고 시험 성적도 형편없었는데?
갑자기 강우를 노리는 사람들이 확 늘어나자 교무회의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손쉽게 강우를 확보하려 했던 김윤택은 쓴맛을 삼켰다. 어쩔 수 없이 김윤택은 열기를 잠재웠다.
“강우 학생의 선택을 기다려봅시다. 학생이 어떤 과목을 고르는지.”
결론을 내리면서도 김윤택은 차도도를 눈빛으로 압박했다. 물리를 선택하면 지도교사는 차도도가 아닌 자신이라는 의지가 담겨있었다.
허탈한 차도도는 간신히 화를 억눌렀다.
‘강우가 나를 버리진 않겠지.’
이럴 때를 대비해서 강우에게 노트북을 사준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강우에게 점수를 따두었다. 강우가 물리를 선택한다면 자신을 버리지 않으리란 근거 없는 자신감이 불안을 그나마 줄여주었다.
이 광경을 흥미롭게 구경하는 두 선생님이 있었다.
지구과학 담당인 김선호는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생물 담당인 박종수는 수업 시간에 잠자던 그 말썽꾸러기 학생을 떠올렸다.
“그 자식, 공부도 못하게 생겼던데…….”
생물시험 전교 꼴찌인 녀석을 천재라 할 수는 없는 법이다.
* * *
수업이 끝나고 고곽천재는 함께 세미나실로 이동했다.
학기가 시작된 후에도 그들은 똑같은 일과를 반복했다. 손차희가 세미나실을 부지런히 확보한 덕분이었다.
강우는 조별 활동의 장점을 확실하게 체감했다. 이들 덕분에 그는 비교적 쉽게 과학고 생활에 적응했다. 친구들과 행동을 함께하면서 그들의 사고방식에 젖어 들 수 있었다. 덕분에 이제는 행동거지도 점차 고등학생에 어울리게 바뀌었다.
고곽천재가 아니었다면 그는 분명히 왕따가 되어 홀로 다녔을지도 모른다.
세미나실로 이동하고 있을 때 태양이 그들을 환히 비췄다. 과학고 천재들은 태양에서 무엇을 볼까? 강우의 의문은 하나의 질문으로 이어졌다.
“태양은 무슨 색일까?”
갑작스러운 강우의 질문에 모두가 뚱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흰색!”
“노란색!”
“초록색!”
“왜?”
손차희가 가장 먼저 대답했다.
“태양을 보면 흰색으로 보이잖아?”
물론 태양이 너무 밝아서 도저히 색상을 알아볼 수 없다.
윤수아가 미간을 찌푸리며 반박했다.
“아냐, 난 어릴 때 그림일기 그릴 때 태양을 항상 노란색으로 그렸거든!”
이번에는 최대우가 나섰다.
“태양은 주계열성에서 G형의 별이야. 태양을 스펙트럼 파장으로 분석하면 초록색이 가장 강해.”
“네 눈에는 저게 초록색으로 보이냐?”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강우의 핀잔에 최대우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모두 의견이 다르네. 그럼 해가 질 때 붉게 보이는 이유는…….”
강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손차희가 먼저 대답했다.
“레일리 산란. 짧은 파장의 빛이 산란 되어 사라지고 그 반대인 긴 파장의 빛이 우리 눈에 도달하거든. 그래서 붉어. 이것은 하늘이 파란 이유와 같은 거야.”
과연 손차희답게 교과서적인 설명을 했다.
역시 과학고 학생답다. 이대로 내버려 둘 강우가 아니다.
“그럼 가장 산란이 잘 되는 보라색으로 하늘이 보여야 하는 거 아냐?”
“어?”
미처 생각지 못했다는 듯 손차희가 버벅댔다.
“생각처럼 단순하지 않아. 하나의 과학 현상은 여러 요인이 겹쳐서 나타나니까. 그래서 새로운 물리법칙을 발견하는 과학자는 충분한 사고와 실험을 통해 극복해야 해.”
강우의 설명에 친구들은 호기심을 품고 하늘에 뜬 태양으로 시선을 돌렸다.
과학은 호기심을 풀어주는 도구다. 이 친구들도 호기심을 잃지 않는 한 과학자의 길을 걸어가게 될 것이다.
그들 모두가 가슴에 사명감을 쌓고 있을 때 정적을 깨트린 사람은 윤수아였다.
“강우야, 강우야아! 과제연구 지도교사 신청하라던데…… 생각해봤어?”
“아니, 대충하지 뭐.”
정작 강우는 태평이었다.
윤수아는 한심하다는 눈초리로 강우를 흘겼다.
“그거 선생님마다 학생 수 제한이 있어서 빨리 신청해야 해. 신청한다고 선생님이 다 받아주는 것도 아니고.”
“어? 그거 지난번에 동아리 신청할 때도 비슷한 말 들었던 것 같은데? 정작 천체관측 동아리는 미달…….”
“그거랑 다르잖아?”
“설마 지도교사 없어서 과제연구 못 하려고.”
말문이 막힌 윤수아는 작전을 바꿨다.
“그럼 팀이라도 짜야지. 팀을 짜고 과목을 선택해야…….”
“강우는 나랑 할 건데?”
최대우가 강우의 어깨를 콱 잡으며 말했다.
최대우의 힘에 움찔한 강우는 엄살을 떨었다.
“이 자식이! 완전 협박이야.”
손차희는 잠시나마 과제연구를 고곽천재와 함께할지 고민했다.
그때 그들의 앞으로 주임 선생님, 김윤택이 다가왔다.
“강우 학생!”
그들을 쓱 훑어본 김윤택이 손차희와 강우를 확인하고는 미소를 지었다.
“강우 학생! 과제연구 신청했나?”
“아, 아직 안 했는데요?”
“물리를 선택할 거지? 그렇다면 내 밑으로 오면 어떤가?”
“예?”
뜻밖의 제안이라 강우는 눈만 깜박였다.
“이리저리 알아보면 알겠지만 한번 선택이 3년을 좌우하거든. 내 밑으로 와! 내년에 한국대와 R&E를 추진해볼 테니까.”
여전히 강우는 고개만 갸웃거리고 있었지만 다른 학생들은 이 제안이 얼마나 엄청난지 눈치챘다.
한국대와 R&E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그 결과가 괜찮다면 한국대 수시 입학도 가능했다. 한국대 입학을 보장받는다는 점에서 무시할 수 없는 제안이 확실했다.
손차희는 그 말에 가슴이 뛰었다. 지금 김윤택의 제안은 그녀가 바라고 바라던 바였으니까. 그런데 왜 하필 강우에게?
강우가 내키지 않는 듯 반문했다.
“한국대 물리학과요?”
“그래. 내가 한국대 물리학과와 물리교육과에 아는 교수가 많아. 음, 물론 너희는 잘 모르겠지만 국내 최고 권위의 핵융합 과학자인 마도환 교수라든가…….”
순간 강우의 표정이 확 일그러졌다.
“하여튼 학생의 앞날에 큰 디딤돌이 될 거야.”
“하아!”
강우가 땅이 꺼지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그 이유를 아무도 알지 못했다.
한참 뒤에야 강우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선생님, 천천히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어? 이거 고민할 필요가 없는 좋은 제안이야. 이 학교 학생이라면 무조건 수락할 조건이라고.”
“너무 당황스러워서요. 나중에 연락드리겠습니다.”
강우가 꾸벅 인사하고는 바로 걸음을 빨리했다.
그 모습에 싫은 티가 역력히 보였다.
김윤택은 예상치 못한 사태에 멍한 표정이었다. 누구도 거절하지 못할 제안을 했는데 상대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것도 햇병아리 신입생이.
얼굴이 붉어진 김윤택이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을 때였다.
“선생님! 저는 물리를 선택하겠습니다!”
손차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