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과학고 천재-38화 (38/325)

제38화 과제연구 지도교사 (2)

세미나실에 모여 공부하면서도 분위기는 다소 어색했다.

학년 주임이자 물리 부장인 김윤택의 제안을 강우는 거절했고 손차희는 스스로 부탁했다.

물론 손차희가 지도교사를 요청했다고 해서 반드시 성립되는 것은 아니었다. 김윤택의 선택이 남아 있다. 다만 손차희의 위상으로 보아 김윤택이 거절할 일은 거의 없다.

평소라면 손차희는 대단히 만족했을 상황이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녀는 강우의 눈치를 봤다. 그녀는 강우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담임과 친해서?’

그녀가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해답이었다. 애초에 강우는 물리에 강했으니 과제연구에서 당연히 물리를 선택할 것이고 그렇다면 김윤택과 차도도 둘 가운데 하나를 골라야 했다.

그녀는 냉정하게 미래의 이익을 계산해서 김윤택을 선택하지만, 강우는 눈앞의 의리를 저버리지 못할 수 있다. 혹은 미모에 홀렸을 수도 있고. 아마도 강우 성격이라면 차도도라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나쁠 건 없어. 다음 과제연구에서는 강우를 이겨야지.’

지도교사로서의 경험은 김윤택이 월등하니까. 손차희는 자신의 선택을 의심하지 않았다.

정작 강우는 별생각이 없었다.

애초에 그는 과제연구를 심각하게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가 연구를 수행한 경험만 몇 년이었던가. 이런 고등학교의 과제연구는 하루아침에 해치울 수 있을 정도였다.

그렇기에 그는 누가 지도교사가 되든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어차피 지도받을 일도 없고 혼자 알아서 수행할 예정이었으니.

강우가 물리책을 넘기고 있을 때였다.

윤수아가 그의 책을 연필로 톡톡 쳤다.

“강우야, 왜 안 했어?”

“어? 난 주임 쌤이랑 안 친해.”

“하긴…… 친하면 더 좋지. 그래도 아깝잖아? 차희 봐. 먼저 적극적으로 제안하잖아?”

강우는 손차희를 힐끔 살폈다.

수학책을 펴놓고 열심히 공부하는 듯하지만 실상은 그들의 대화에 정신이 쏠려 있음이 느껴졌다.

“차희는…… 나랑은 좀 다르지.”

“강우 넌 어떻게 대학 갈 생각인데?”

작심한 듯 윤수아가 핵심을 건드렸다.

물론 강우는 대략적인 장기 계획을 세우긴 했다. 훗날 그는 다시 세계적인 핵융합 전문가로 우뚝 서야 한다. 고려 과학고 졸업이나 대입은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 과정일 뿐이었다.

다만 그는 한국대학교로 진학할지 아니면 외국으로 유학을 갈지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 예전처럼 순수 국내파로 남는 것도 나쁘지 않고 그의 능력이라면 최소한 예전의 명성을 되찾을 수 있다고 확신한다. 문제는 마도환이었다.

마도환이 버티고 있는 한국대 물리학과로 진학하면 어쩌면 끔찍한 상황을 맞을지도 모른다. 한국에서는 일개 학부생이나 대학원생이 교수랑 싸우기 힘드니까.

그렇다고 유학을 떠나기엔 돈이 없었다.

“모르겠는데…….”

“강우야, 우리 학교에서는 대부분 학생부 전형으로 진학하잖아? 학생부 잘 받으려면 성적이 특출나거나 과제연구에서 탁월한 실적을 거두는 게 최선이야. 넌 방금 그 길을 스스로 걷어 차버렸고.”

강우는 반박하지 않았다. 누가 봐도 윤수아의 생각이 옳다.

“차희를 봐. 교과 성적도 우수하고 과제연구도 김윤택 쌤이라면 잘 봐주시겠지.”

“흠, 그럼 나도 성적을 잘 받아보지 뭐.”

“네가? 생물 꼴찌인 네가?”

“커윽!”

차마 반박하지 못한 강우는 주먹을 쥐고 한차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내가 보기에 강우 넌 과제연구를 잘하는 게 최선이야.”

윤수아의 말을 듣다 보니 은근히 오기가 생겼다. 화학이나 생물 성적이 엉망인 이유는 공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잖아도 강우로 다시 태어난 후 이해력, 응용력, 기억력 모든 분야에서 예사롭지 않다는 느낌을 받고 있다. 뭔가 천재성에 변화가 있다. 새로운 생을 살면서 어떻게 달라졌는지 확인해보고 싶었다.

그때 폰이 울리고 강우는 한숨을 뱉었다.

“뭔데?”

“신새벽 쌤이야.”

“왜?”

“오늘은 왜 보고 안 하냐고.”

“으악!”

모두가 기겁하고 외면했다.

강우는 얼른 답장을 썼다.

- 강우 : 하고 있어요.

- 신새벽 쌤 : 그래서 대체 무슨 공부를 하고 있어?

- 강우 : 주기율표 숙제요.

- 신새벽 쌤 : 아직도 그거 해? 얼른 해라. 아! 너 지도교사 누구 정했어?

- 강우 : 아직 생각 안 해봤는데요?

- 신새벽 쌤 : 내가 해줄 테니까 나한테 신청하도록.

- 강우 : 예?

- 신새벽 쌤 : 잘해주겠다니까. 알지? 덤으로 내가 화학 성적까지 팍팍 오르도록 지도해줄게.

- 강우 : 핸드폰 배터리가…….

강우는 폰을 껐다. 오늘따라 김윤택과 신새벽이 왜 그를 노리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아! 차 쌤한테도 보고해야 하는데…….”

강우는 꺼진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망연자실해졌다. 선생님들의 괴롭힘이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했다.

다음날 강우는 정명욱으로부터도 제의를 받았다.

* * *

천체관측반 첫 만남이 천문대에서 열렸다. 일명 신입생과 재학생의 대면식이었다.

동아리 지도교사인 김선호와 6명의 신입생, 2학년 이상 고학년이 13명이다. 3학년은 오늘까지만 동아리 활동을 하고 앞으로는 거의 나오지 않을 거라고 했다.

신입생 6명 중에서 3명은 강우가 처음 보는 학생이었다. 물론 남은 3명은 강우와 최대우와 윤수아다.

고학년 중에서 유일하게 눈에 익은 사람은 권유성뿐이었다.

권유성은 윤수아와 많이 친한 듯 한시도 옆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어째 윤수아를 뺏긴 기분이 들어 강우는 수시로 권유성을 흘겨보았다. 어린 티가 많이 나는 권유성이 윤수아 옆에 붙어 있으니 딱 누나와 동생을 보는 느낌이었다.

“신입생들을 환영한다. 이번 신입생 가운데 놀라운 사람이 있다. 가입 테스트를 모두 맞췄다. 바로 최대우다!”

“와아!”

최대우는 인사했고 격렬한 환영을 받았다.

“신기하게도 그동안 아무도 맞추지 못했던 마지막 문제를 맞힌 학생이 있다. 다만 다른 문제는 하나 빼고 몽땅 틀렸다. 강우다.”

“우우-”

야유가 쏟아졌다.

물론 강우도 호명된 이유를 안다. 마지막 문제는 관련 공부를 하지 않았다면 맞출 수 없는 고난도 문제이기 때문이다.

“오늘 신입부원을 보니까 앞으로 우리 부의 발전이 훤히 보인다.”

환영 인사가 끝나고 자유롭게 선후배 간 대화를 시작했다.

당연히 강우는 어울릴 생각이 없어서 한쪽으로 물러났고 최대우는 선배들의 질문에 답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윤수아는 권유성이랑 노느라 강우를 챙기지 못했다.

눈치를 보던 강우는 김선호에게 다가갔다.

“쌤, 과제연구 관련해서요.”

“응? 그건 왜?”

“갑자기…… 김윤택 선생님, 신새벽 선생님, 정명욱 선생님께서 연락을 주셔서…….”

강우는 그간의 사정을 설명했다.

김선호가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 그 선생님들이 네 가능성을 알아봤나 보네.”

“가능성이요?”

“앞으로 크게 될 거 같다는 가능성.”

“전 화학 성적이 사실상 꼴찌인데요?”

“그러게. 왜일까?”

김선호가 빙그레 웃었다.

인기가 너무 많아도 골치 아프다. 세 선생님 중에 누구를 골라야 할지. 정작 담임인 차도도는 조용했다. 아예 관심이 없는 건지 아니면 있는 건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

물론 강우는 물리를 선택하게 된다면 김윤택이 아닌 차도도를 지도교사로 요청할 계획이다. 그의 뜻대로 연구하기에는 김윤택보다 차도도가 훨씬 유리하니까.

“근데 저희 담임쌤은 왜 아무 말씀이 없으실까요?”

“원래는 그게 정상이야. 학생이 먼저 신청하는 거니까. 네 경우가 비정상이지. 어쨌든 여러 선생님에게서 가능성을 인정받았다니 축하한다.”

김선호는 강우에게 격려의 말을 남긴 후 천문대 돔을 열고 관측을 준비했다.

아무래도 선생님들끼리 자신을 두고 작당 모의한 것 같아 강우는 기분이 별로였다. 이런 상황에서 한 선생님을 고르면 다른 선생님에게 미운털에 박히지 않으려나? 김윤택이나 신새벽은 누가 봐도 뒤끝이 있어 보이는데?

그가 고민하고 있자니 그제야 윤수아가 그를 챙겼다.

“강우야! 무슨 고민해?”

“아! 과제연구.”

“응? 과제연구?”

그녀 옆에 있던 권유성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관심을 보였다.

권유성이 윤수아와 강우를 번갈아 살피더니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들이 안 받아주나 보네. 하긴 나라도 말썽꾸러기는 안 받겠다. 너희들 입학 때 과제연구로 천문 했었지? 또 천문 하게?”

강우는 천문학을 연구한다는 생각을 아직 해본 적이 없었다.

“유성아, 천문도 할 만해?”

윤수아가 권유성에게 조언을 구했다.

“천문으로 하면 천문학과나 물리학과 진학에는 도움이 돼. 폭이 좁긴 하지만. 역대 과제연구 보고서 본 적 있어?”

권유성이 천문대 한쪽에 정리된 서재의 자료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보고서로 묶은 이십여 권의 소책자가 있었다.

놀랍게도 강우네 조가 제출했던 ‘소행성 아스트리아의 궤도 계산과 검출’ 보고서도 꽂혀 있었다.

강우는 각 보고서의 제목을 보면서 과제연구의 수준을 대충 파악했다. 역시 예상대로 고만고만한 수준이었다. 고등학생이니 어쩔 수 없다고 해야 하나.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무척 도움이 됐다.

“우와! 내가 한 거잖아?”

윤수아가 감탄했고 권유성이 강우를 슬쩍 보고는 맞장구쳤다.

“내가 볼 때 여기 있는 연구 중에서 제일 수준이 높았어! 역시 누나가 제일이야!”

“내가 아니라 강우랑 대우가 한 거라니까.”

“강우가? 그럼 방금 한 말 취소야, 취소!”

약간은 가소로운 듯한 표정으로 권유성이 빈정거렸다.

강우는 이참에 서열을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유성이라 했지? 수아에겐 누나라 존대하면서 왜 누나 친구인 나에게는 반말이야?”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는 듯 권유성이 멀뚱멀뚱 그를 쳐다보았다.

“어? 그야 후배니까…….”

“나이도 어리다면서?”

“선후배가 먼저지.”

“나이가 먼저야.”

이건 미묘한 문제였다. 윤수아처럼 성별이 다른 경우는 따지지 않았으나 강우처럼 성별이 같으니 문제가 됐다.

“같은 학년과는 말을 놓고 있어?”

권유성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무려 2년이나 어렸기에 권유성은 같은 학년을 누나나 형으로 호칭하고 있었다.

강우와 권유성이 대립하고 있자니 최대우가 끼어들었다.

“뭐해?”

거구의 최대우가 앞에 서자 권유성은 저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그, 그럼 둘 다 말을 높이는 거로…….”

“안 돼.”

강우는 딱 잘라 거절했다.

버벅거리던 권유성이 불쌍한 표정으로 윤수아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윤수아도 어떻게 처리할지 뾰족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했다.

강우와 권유성, 두 사람은 서로를 노려보며 눈싸움을 지속했다. 당연히 정신 연령이 삼십 대인 강우는 양보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최대우의 몸집에 결정적으로 밀린 권유성이 불만을 터트렸다.

“쳇! 공부나 잘하면 모르지만…….”

“뭐?”

“난 공부 못하는 사람을 형이라 부를 생각 없다고!”

무려 2년이나 빨리 입학하고도 권유성은 성적이 탁월했다. 특히 그의 천재적인 기질은 교과 과목뿐 아니라 과제연구에서도 탁월한 실력을 보였다.

“호오, 그래? 넌 잘하나 본데…….”

강우가 피식 웃자 권유성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이 자식의 버릇을 어떻게 고쳐줄까? 감히 하룻강아지가 호랑이 무서운 줄을 모른다. 겸사겸사 하룻강아지의 천재성도 좀 확인해 보고.

어차피 과제연구는 열심히 할 생각이니까 과제연구로 녀석의 코를 눌러줄까…….

“권유성! 과제연구 자신 있어?”

권유성의 입가에 가소롭다는 비웃음이 확 일었다.

“푸하하! 내가 누군 줄 알아? 작년에 과제연구로 뜬 사람이 바로 나야!”

권유성은 작년에 지구과학 분야에서 과제연구로 최우수상을 받았었다. 당연히 권유성은 진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다.

“그러면 과제연구에서 누가 더 높은 상을 받는지로 내기할까?”

“콜! 다시 존댓말 할 준비나 하시지!”

그렇게 둘 사이에 대결이 성립됐다. 이기는 사람을 형으로 대접하기로.

당연히 강우는 여유로웠다.

‘이 자식이 십 년 동안 한국대에서 연구한 나를 뭐로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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