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화 과제연구 지도교사 (3)
강우는 눈 감고 한 손만으로 상대해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하룻강아지는 호랑이를 모르는 법이다.
정작 난감해진 사람은 윤수아였다.
“어?”
“왜?”
“강우 네가 이기면 아무 문제 없지만, 유성이가 이기면 유성이가 네 형이고, 그런데 난 유성이 누나고 그럼 내가 네 누나가 되는 거야?”
어? 그게 그렇게 되는 건가? 뭔가 족보가 꼬였다.
미간을 찌푸리며 한참 고민하던 윤수아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그것도 나쁘지 않겠어. 강우가 나를 누나라고 부르는 것도. 자, 연습해보자. 강우야! 누나라고 불러봐! 누나!”
“크윽!”
강우는 사납게 쏘아보았다.
폭소를 터트리던 윤수아가 마침내 화제를 바꿨다.
“그럼 강우야! 우리도 주제를 지구과학으로 할 거야?”
어? 그렇게 되는 건가? 권유성이랑 비교하려면 아무래도 같은 과목이 명확하겠지. 다른 과목이면 평가에서 어긋날 수 있으니까.
“난 아무 과목이나 상관없어. 오죽하면 신새벽 쌤이 화학으로 하자고 했겠어?”
그때 최대우가 끼어들었다.
“나라면 신 선생님과 바로 한다.”
“너도 화학을 못하잖아?”
“신 쌤은 예쁘잖아!”
“으이그.”
본의 아니게 주제가 지구과학으로 정해졌다. 어차피 상관없다. 지구과학의 다른 분야라면 곤란하지만 물리학과 사촌인 천문 쪽은 어떻게든 비벼볼 수 있으니까.
그들이 떠들고 있는 사이 천문관측 준비가 끝났다.
김선호가 학생들을 향해 설명했다.
“자! 오늘은 신입생 환영 관측회다. 마침 하늘에 달이 떠 있으니까 달을 망원경으로 보도록 하자. 지금 반달이지? 반달일 때 우리는 달의 지형을 가장 잘 볼 수 있다. 망원경으로 보는 달은 경이 그 자체다!”
그그긍-
천체망원경이 움직여 하늘에 뜬 달을 조준했다.
달빛이 환하게 천문대 내부를 비췄다. 학생들의 호기심 어린 얼굴에도 달빛이 내려앉았다.
달을 관측하는 학생들의 진지한 모습을 보면서 강우는 이들이 과학고 학생임을 다시 확인했다. 학생들은 이 순간 과학을 체험하고 있었다. 이 경험은 앞으로 그들을 과학의 길로 이끄는 걸음마가 되어줄 것이다.
강우의 차례가 왔다.
강우는 망원경 접안부에 눈을 대고 달을 찾았다.
“아!”
그는 망원경으로 달을 처음 봤다. 지금까지 소행성을 찾느라 망원경으로 어두컴컴한 별만 몇 번 보았다.
시야에 달의 울퉁불퉁한 지형이 들어왔다. 바로 운석이 떨어져서 생긴 크레이터다. 마치 손에 잡힐 듯 선명하게 보이는 달의 크레이터와 계곡, 산맥을 보면서 강우는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촌놈이냐?”
옆에서 권유성이 그를 비웃고 있었다.
“그래, 나 촌놈인데…… 너도 처음 봤을 땐 나랑 똑같지 않았냐?”
“헉! 어떻게 알았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권유성이 후다닥 윤수아 뒤로 숨었다. 저 자식은 아직 철부지가 확실했다. 저 녀석과 경쟁 같은 걸 하자니 삼십 대 정신 연령이 부끄러웠다.
“자, 유성아, 너 관측 많이 해봤지? 이 형한테 한 번 설명해봐라.”
“아니? 누가 형이래? 내가 선배라고!”
소리를 버럭 지른 권유성은 표정과 달리 곧바로 설명을 시작했다. 물론 강우를 위해서는 아니고 윤수아를 위해서였다.
두 사람이 노는 모습을 본 김선호가 어이가 없는 듯 혀를 찼고 다른 학생들은 모두 웃음을 터트렸다.
* * *
점심시간 직후에 강우는 차도도에게 불려갔다.
엄밀하게는 휴게실 겸 상담실이었고 그곳에는 이미 차도도 외에 신새벽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강우가 들어서자 차도도보다 신새벽이 더 환영했다.
“강우 왔어?”
정작 그녀의 얼굴에서 원소기호를 읽은 강우는 뚱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내가 커피 내려줄까?”
신새벽이 자신의 텀블러를 까닥이며 물었다.
흠 커피라……. 전생에도 커피를 그리 즐기진 않았지만 강우가 된 후 거의 커피를 마시지 못했다. 학교에 깡통 커피 자판기가 있긴 했으나 그놈의 돈이 뭔지. 게다가 요즘은 자판기를 보면 커피보다 탄산음료가 훨씬 땡겼다.
강우가 상념에 잠겨 대답을 얼버무리자 신새벽이 곧바로 다그쳤다.
“얘! 내가 아무한테나 커피 내려주는 줄 알아? 내가 커피 주면 영광으로 알아야지!”
“예, 커피 주세요.”
강우는 힘없이 대답했다.
“어디 아프니?”
“아뇨.”
차마 신새벽 얼굴을 보는 순간부터 아파졌다고 대답할 수는 없었다.
커피를 앞에 두니 그 향이 기분을 따뜻하게 했다. 한 모금 마시자 독특한 커피 맛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오랜만에 맛보는 커피는 몸을 차분하게 녹였다.
“좋네요.”
“그렇지? 내가 커피를 잘 내리거든.”
“앞으로도 종종 부탁해요.”
“야! 넌 내가 커피 타주는 사람으로 보여?”
신새벽이 버럭 소리 지르며 눈을 부릅떴다.
강우는 그 모습이 귀여워서 피식 웃었다.
“쌤은 화내는 모습이 안 어울려요.”
“왜?”
“눈이 크잖아요.”
“어? 이 자식 봐라? 이제 선생님에게 아부도 할 줄 알고?”
여느 때처럼 톡톡 튀는 신새벽을 무시하고 강우는 차도도에게 도와달라고 눈길을 보냈다.
두 사람이 툭탁거리는 모습을 지켜보던 차도도가 미소를 머금고 분위기를 환기했다.
“강우야, 오늘 이렇게 부른 건…… 혹시 과제연구 지도교사 정했니?”
“그게…….”
“화학으로 정했지?”
신새벽이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아뇨.”
“뭐? 아냐? 화학 선택하면 내가 시간 내서 가르쳐준다니깐. 나처럼 지성과 미모를…… 하여튼 이런 선생님이 손수 가르쳐 주면 좋다고 받아야지. 응?”
“다른 과목으로 하려고요.”
“으…… 너! 화학을 못하니까 회피하는구나? 학생이 그러면 안 돼, 모르는 과목일수록 더 열심히 해야지.”
신새벽이 한바탕 연설을 하기 시작했다.
강우는 신새벽이 이렇게 말 많고 푼수기가 있는지 오늘 처음 알았다.
“회피는 절대 아닌데요?”
“맞잖아?”
“아닌데요?”
“맞아!”
철없는 아이처럼 말다툼하던 두 사람 때문에 차도도가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
“좋아! 그럼 아니란 걸 증명해봐!”
“싫은데요?”
“뭐야? 네가 화학을 잘한다는 걸 증명하면 내가 해달라는 건 다 해준다!”
“그래도 싫은데요?”
“할 거야? 말 거야?”
신새벽이 눈을 부릅뜨고 그에게 얼굴을 가져다 댔다. 우락부락한 선생님이었다면 공포를 느꼈겠지만 신새벽이다보니 공포는커녕 오히려…….
“하, 할게요. 증명할게요.”
어쩔 수 없이 강우는 꼬리를 내렸다.
“어떻게?”
“일등 하면 되잖아요.”
“이 자식이! 이번에는 진짜로 뒤에서 일등 하겠다고?”
신새벽이 그의 머리를 확 붙잡았다.
“아! 그게 아니라 앞에서 일등요!”
“중간고사에서?”
“네!”
신새벽의 입꼬리가 쓱 올라갔다. 예상치 못한 성과를 거뒀다는 표정이다.
강우는 신새벽에게 몰려 어쩔 수 없이 수락하긴 했으나 나름대로 자신이 있었다. 새로운 삶을 살면서 예전보다 월등해진 천재성을 제대로 테스트해볼 기회가 필요하기도 했고.
이번 중간고사에서 화학을 열심히 공부하면 얼마나 성적이 올라갈지 시험해보고 싶었다. 신새벽에게 혼나는 것이 지겹기도 했다.
당연히 강우가 일등 할 수 없다고 확신한 신새벽이 가슴을 탕탕 쳤다.
“좋아! 강우의 패기를 인정하지! 네가 일등 하면 진짜로 해달라는 거 다해준다. 그 대신에 못하면…….”
“저도 해달라는 거 다해줄게요.”
“내가 해달라고 할 게 뭐가 있어…….”
신새벽이 묘한 웃음을 머금었다. 이 내기는 무조건 이겼다고 생각한 그녀는 기분이 날아올랐다. 강우가 지면 확실하게 화학 공부를 시켜서 화학 성적을 올려버릴 생각이다. 다음 학기에 과제연구 지도교사도 쟁취하고. 어차피 이 내기 때문에라도 강우가 화학을 열심히 공부할 테니 절대 손해는 아니었다.
신새벽은 주먹을 불끈 쥐고 내심 포효했다. 이번 학기 과제연구 지도교사는 놓쳤지만, 그 못지않은 성과를 거뒀다.
대화는 차도도에게로 넘어갔다.
“흠, 강우야, 그래서 물리로 선택했니? 그럼 주임 선생님이랑 하겠네?”
“김윤택 선생님요?”
“응.”
“왜요?”
“주임 선생님이 과제연구 쪽으로 유능하시니까…….”
강우는 차도도를 조심스럽게 살폈다. 여전히 아름다운 그녀의 얼굴에는 일말의 기대감도 담겨있지 않았다. 그가 주임 선생님의 권유를 절대 거부하지 않으리라 예상했기 때문일까.
“어제 주임 선생님께서 말씀은 하셨어요.”
“그래서?”
차도도와 신새벽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됐다.
“생각해본다고 했는데…… 거절할 생각입니다.”
“어? 그 좋은 기회를 왜?”
“다른 사람에게는 좋을지 모르겠지만 저에게는 아니거든요. 저는…… 학생과 선생님의 궁합이 맞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특히 과제연구 과목에서는.”
어떤 과목의 선생님이 좋아서 그 과목을 열심히 하고 성적이 올랐다는 식의 성공 스토리는 매우 흔하다. 물론 강우는 스스로 연구를 수행할 능력이 있기에 연구에 간섭할 주임 선생님을 오히려 배제하고 있지만.
차도도에게서 기대하는 표정이 일었고 신새벽은 의미심장한 눈으로 두 사람을 쳐다봤다.
“그래서 누구와…….”
“저…… 물리로 안 할 건데요.”
마치 폭탄이 떨어지듯 차도도의 안면이 굳었다.
“그럼 수학?”
“아뇨. 지구과학.”
강우가 고개를 저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차도도의 안면에 실망이 스쳐 지나갔다.
“지난번이랑 비슷한 주제로 하려나 보구나. 김선호 선생님이랑?”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어요. 아직 김 선생님께선 모르시지만…… 내일 신청하려고요.”
“그, 그래.”
차도도는 잠시 말이 없었다.
김윤택에게 빼앗긴 것보단 낫다고 생각한 차도도는 숨을 골랐다. 대신에 그녀가 양보할 수 없는 부분이 아직 남아 있었다.
“물리는 열심히 할거지?”
강우는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어차피 물리는 그의 인생이다. 누가 시켜서 열심히 할 그런 상황도 아니었고.
“진단 고사에서 만점으로 일등 했으니까…… 이번 중간고사에서도 비슷한 성적을 내줬으면 좋겠어.”
선생님이라면 누구나 할 법한 말이다.
“요즘도 매일 톡으로 공부한 결과를 보내고 있잖아요?”
강우는 두 선생님을 노려보며 툴툴댔다.
“야! 그거 전부 너 잘되라고 하는 거야!”
신새벽이 곧바로 반박했다.
아무래도 사심이 더 많아 보이는데? 강우는 내심 투덜대며 차도도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렇긴 한데…… 이번에도 확실하게 결과를 내자. 진단고사는 성적에 들어가지 않지만, 중간고사는 성적에 올라가니까 매우 중요하지. 이번에도 잘 치면 네 공부는 제 궤도에 오를 거야.”
차도도는 강우의 실력을 의심하지 않았다. 다만 공부와 시험을 대하는 태도가 오락가락하는 부분을 염려했다.
“최선을 다해 성적을 올리란 뜻이야. 물리 외에도 전 과목을.”
“화학도 절대 빼먹으면 안 돼!”
두 선생님의 시선을 받고 있으니 강우는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해졌다.
차도도의 차갑고 깨끗한 얼굴과 신새벽의 귀엽고 부드러운 얼굴이 겹쳐 보였다. 역시 미모만큼 확실한 무기가 없다는 사실을 다시 명확하게 깨달았다.
어쩌다 보니 차도도와 신새벽이 그에게 같은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물론 그가 손해 볼 일은 아니다. 선생님이라면 제자의 공부를 신경 쓰는 것이 당연하기도 했고. 하지만…….
두 사람이 동시에 매일 톡으로 연락하기를 고집하고 거기에 더해 성적을 올리기를 요구한다고? 이전보다 조금 올리는 것도 아니고 최고의 성적을 내주기를 원한다고 한다. 우연히 같은 요구가 되었는지 아니면 둘이 연합작전을 펴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기회에 정말 노력해볼까? 천재들만 모인 이곳에서 정말 한번 사고 쳐 볼까?
고려 과학고에서도 일등을 못하면서 어떻게 마도환에게 복수하고 세계적인 핵융합 권위지가 되겠는가.
강우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