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화 과제연구 지도교사 (4)
“그럼 해볼까요?”
강우의 대답에 신새벽이 반색했다.
“‘해볼까요’가 뭐야? 학생이라면 당연히 해야지.”
“강우, 넌 할 수 있을 거야. 아니, 할 거야. 파이팅!”
차도도는 미소로 환영했다.
강우도 확실하게 방향을 잡았다.
확실히, 공부에 매진하는 학생들의 모습은 매력적이었다. 이 학교 학생이 공부에 집중하는 모습은 강우를 흥분되게 한다. 이제는 자신도 그 학생들과 함께 공부에 열정을 쏟고 싶었다.
그런 학생들과 경쟁한다. 천재들과 천재성을 겨룬다. 3년 동안 계속할지 이번 중간고사로 만족할지 모르겠지만 그들과 후회 없이 승부를 겨뤄보고 싶었다.
어쨌든 첫 시험에서 학생들에게, 적어도 반 급우들에게 확실한 인상을 심어두면 앞으로 편해질 것이다. 또 선생님들에게도 마찬가지이고. 적어도 화학과 생물 꼴찌라는 오명은 벗어야 한다.
화학에서 일등 하기로 약속했으니 다른 과목이 조금만 받쳐주면 탁월한 성적을 거두는 거야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수학, 과학과 무관한 국어나 영어, 심지어 사회 과목은 어떻게 해야 하지?
물론 고분고분 두 선생님에게 끌려갈 생각은 없었다. 이왕 할 거라면 최대한 얻어내야지.
“그런데…… 뭐든 다해주신다고요?”
강우가 눈을 게슴츠레 뜨고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신새벽이 흠칫 놀라 뒤로 몸을 물렸다.
“너, 너! 무슨 생각하는 거야?”
강우는 고개를 저으며 순진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 생각 없는데요.”
무엇이 그리 재미있는지 차도도가 책상을 치며 웃었다.
물론 강우도 특별히 생각해 둔 건 없었다. 다만 훗날을 위해 여러 선생님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 두는 게 유리하다는 정도는 알고 있다.
신새벽이 결심한 듯 호기롭게 받아들였다.
“좋아! 쌤이 알아서 보답해줄 테니까 넌 공부만 열심히 해. 열심히 하는 학생을 싫어하는 선생님은 없어.”
“알았어요. 담임쌤은요?”
기회를 잡았으면 양쪽으로 써먹어야지.
“으응?”
움찔하는 차도도를 신새벽이 옆에서 쿡 찌르며 바람을 넣었다.
“차 선생님 학생이잖아? 나라면 진짜 뭐든 다 해준다. 학생이 열심히 공부하겠다는데 팍팍 밀어줘야지?”
강우는 해맑은 웃음을 지으며 차도도와 눈을 맞췄다.
차도도가 주먹을 쥐고 응원했다.
“알았어. 파이팅! 꼭 유의미한 성적을 내야 해!”
“약속한 거예요?”
“그래.”
강우는 두 사람을 쓱 훑어보고는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신난다! 공부하러 가야지!”
꾸벅 인사하고 상담실을 떠나는 강우를 보면서 차도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신새벽이 키득키득 웃으며 중얼거렸다.
“아직 애야, 애! 저 자식 눈빛을 보니 백퍼…… 데이트해달라는 거야.”
데이트란 말에 차도도가 움찔했다. 며칠 전 함께 옷 사러 갔던 일이 떠올라서다.
“아닐 것 같은데?”
“아냐, 저 나이 때 남학생들이 생각하는 건 다 비슷해. 내가 다 알아.”
신새벽의 야릇한 표정에 당황한 차도도는 정색하며 차분하게 말했다.
“그럴 일 없어. 그리고…… 수학과 물리에 재능이 있다고 화학을 무슨 수로 다 맞춰? 중학교 성적으로 봐선 다른 과목까지 잘할 리는…… 없지. 강우가 목표를 달성하긴 쉽지 않아. 우리는 강우가 열심히 공부하도록 유도하면 돼.”
담임인 만큼 차도도는 강우에 대해 꿰고 있었다. 당연히 중학교 학생부에 기초한 예측이다.
“……그렇겠지?”
신새벽도 동의하며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혹시나 강우가 정말 사고를 치면 어떻게 할지 궁금해졌다.
* * *
학년 주임 김윤택은 이메일을 열어본 후 기분이 팍 상했다.
생각해보겠다던 강우가 지구과학으로 주제를 골랐다며 지도교사 제안을 정중하게 거절한 것이다.
입학 전 과제연구에서 강우가 천문 쪽으로 주제를 선정하고 최우수상을 받았으니 전혀 이상하지 않은 선택이었다. 애초에 강우가 물리를 선택하리라는 예상부터 착오였다.
‘물리를 잘한다고 꼭 물리를 선택하지는 않지.’
과거의 우수학생 경우를 보면 의외로 타 과목을 주제로 정한 학생들이 꽤 많았다.
‘그래도 담임인 차도도에게 뺏기진 않아서 다행이군.’
그나마 위안은 차도도를 선택하지 않았다는 거다. 강우가 그를 거절하고 차도도를 선택하면 그건 그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행동이었을 테니까.
뭔가 교묘하게 피해 간 느낌이 들었다.
‘어차피 지구과학으로 3년 내내 과제연구를 하진 않을 거니까…….’
강우의 과제연구나 R&E를 맡을 기회는 아직 충분히 남아 있었다. 3학년이 가까워질수록 진학에 유리한 수학이나 물리를 주제로 선정하는 학생들을 수도 없이 보아 온 그였다.
김윤택이 그렇게 자신을 위로하고 있을 때 멀끔하게 생긴 한 학생이 들어왔다.
“민찬 학생, 무슨 일인가?”
당연히 김윤택은 이민찬이 찾아온 이유를 짐작하고 있었다. 분명히 과제연구 때문이다. 수석인 이민찬은 그가 담임이었기에 애초에 그를 피해갈 일이 없다.
“과제연구 때문에요. 제가 이번 학기 과제연구를 물리로 해볼까 하고요.”
역시 예상대로였다.
“주제를 생각해봤나?”
“아직입니다.”
“그래 좋아, 같이 주제부터 골라보자고.”
기분이 한결 나아진 김윤택이 이민찬을 격려했다. 문득 그에게 오겠다던 손차희가 떠올랐다.
“민찬 학생, 손차희 학생도 나를 지도교사로 선택했는데…….”
“아! 차희가요?”
“그래. 혹시…… 같이 연구해볼 텐가?”
과제연구는 네 명 이하의 학생들이 팀을 이루어 협업 연구를 할 수 있다. 당연히 다른 반 학생과도 가능했다.
이민찬의 얼굴에 곤혹스러운 표정이 떴다.
이민찬이 수석이고 손차희가 차석이니 둘의 연합은 외부에서 보기에도 좋은 그림이 나왔다. 지도교사로서도 둘을 따로 지도하기보다 한팀으로 지도하는 게 훨씬 수월하기도 했다.
이민찬은 손차희의 성격을 잘 안다. 둘은 경쟁 관계여서 자칫 연구가 산으로 갈 수 있다. 중학교 때부터 계속 손차희를 접했던 이민찬이 그걸 모를 리 없었다.
“차희는 아마 저랑 같이하지 않으려고 할 겁니다.”
이민찬이 에둘러 거절 의사를 밝혔다.
“그래, 알았다. 더 생각해보기로 하지.”
김윤택은 쓴웃음을 삼켰다. 괜히 둘을 붙였다가 손차희가 차도도에게 옮겨간다면 최악이었다.
그렇게 김윤택은 자신의 목적대로 수석과 차석의 지도를 맡게 됐다.
* * *
“우와! 이 맛이야!”
“오늘 떡볶이 대박이었지?”
강우는 환호성을 지르는 두 여학생을 보며 실소를 머금었다.
“먹다가 입안이 불타 죽을 맛이었지.”
퉁명스러운 그의 평가에 손차희와 윤수아가 도끼눈을 했다.
고곽천재는 오랜만에 떡볶이집에서 저녁을 먹은 후 다시 학교로 들어가는 중이었다.
강우는 손차희와 윤수아의 환호에 합세한 최대우를 보면서 자신이 전생에 가졌던 입맛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입안이 여전히 불타는 듯 매워 해결책이 필요했다.
두리번거리는 그의 눈에 편의점 대신 가우스 카페가 들어왔다. 이 학교에 왔던 첫날 손차희와 윤수아를 만난 장소였다.
불타는 입 때문에 커피가 고팠으나 주머니 사정을 생각하니 눈물이 앞을 가렸다.
‘방법이 없나…….’
그렇다고 두 여학생에게 커피마저 얻어먹기엔 차마 양심이 찔렸다.
궁하면 통하는 법이다.
강우의 눈에 막 교문을 나와 퇴근하는 차도도가 보였다. 후다닥 뛰어가서 넙죽 인사했다.
“쌤!”
“어? 강우?”
인사를 받은 차도도의 눈에 강우 뒤에 늘어선 세 학생이 보였다.
“너희들 학교에서 밥 안 먹고?”
“가끔 외식도 해야죠.”
윤수아가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해맑게 웃는 고곽천재를 차도도가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뭔가…… 바라는 게 있나 보네?”
“쌤! 우리 가우스를 논해볼까요?”
강우가 카페를 손으로 가리켰다.
차도도가 어이없다는 듯 미소를 머금었다. 마침 주임 선생님 때문에 기분이 별로였던 그녀는 바로 수긍했다.
“커피 사달라는 거지?”
강우는 재빨리 차도도의 팔을 붙잡고 카페로 끌었다. 커피를 사준다는데 싫어할 학생은 없었다.
본의 아니게 끌려간 차도도는 일단 자신의 메뉴를 주문했다.
“난 아메리카노. 너흰?”
손차희와 윤수아도 아메리카노를 시켰다.
반면에 강우는 이왕 얻어먹으려면 비싼 것을 먹자는 주의였다. 그의 눈에 신제품이 들어왔다.
엄청 달아 보이는 달고나 커피였다.
“전 저거요. 대우도! 괜찮죠?”
“살찔 텐데?”
차도도가 난감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훑어보자 강우는 재빨리 최대우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얘는 더 쪄야 해요!”
생물 시간의 굴욕을 생각하면 최대우를 더 찌워야 한다. 정작 단것을 먹고 싶었던 최대우도 바로 합세했다.
“저도 저걸로 할래요.”
정작 최대우는 말하면서도 진열장 안의 조각 케이크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차도도가 메뉴를 추가했다.
그렇게 아메리카노 석 잔과 달고나 커피 두 잔에 조각 케이크 두 개까지 들고 테이블을 잡았다.
노란 거품이 가득한 달고나 커피는 비쥬얼부터 달랐다. 커피를 앞에 두고 당사자인 강우나 최대우보다 손차희와 윤수아가 더 난리였다.
“우와! 맛있겠다!”
“거품 봐! 어째 거품이 꺼지지도 않아.”
차도도는 소란스러운 학생들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강우는 보란 듯이 달고나 커피를 살짝 입에 머금었다. 강한 단맛이 떡볶이의 매운맛을 죽여 주니 이제야 좀 살 것 같았다.
그가 커피잔을 내려놓았을 때 손차희가 질문을 쏟아냈다.
“달고나 커피의 거품이 왜 빨리 안 꺼지는지 알아?”
순간 강우는 그녀의 속셈을 눈치채고 피식 웃었다. 복수전인가? 태양의 색을 토론했던 조금 전의 기억이 나서다. 마침 화학에 능통한 손차희가 아는 문제인가 보다.
강우는 답을 모르겠다며 고개를 저었고 최대우나 윤수아도 마찬가지였다.
기가 산 손차희가 스스로 대답했다.
“이게 우유의 단백질 때문이거든. 단백질에는 친수성 아미노산과 소수성 아미노산이 있는데…….”
복잡한 설명이 이어졌지만 결론적으로 공기와 결합한 소수성 아미노산이 설탕의 도움을 받아 거품을 유지한다는 설명이었다. 이어서 물의 표면장력이 주제로 등장했다.
그들이 신이 나서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차도도가 기가 막힌 듯 고개를 저었다.
“너희들 평소에도 이러니?”
“가끔요.”
역시 과학고 학생들이라고 핀잔하며 차도도는 왠지 모를 뿌듯한 기쁨을 즐겼다. 그녀도 한때는 저렇게 과학에 미쳐 날뛰었던 적이 있었다.
그사이 조각 케이크는 최대우와 윤수아의 차지가 됐다.
케이크를 맛있게 먹던 윤수아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쌤, 과제연구요, 죄송해요.”
“뭘, 괜찮아. 강우랑 대우랑 같이 김선호 선생님과 하기로 했다며?”
“네.”
“하고 싶은 거 해야지. 차희는 김윤택 선생님과?”
손차희는 담임을 배신한 당사자였기 때문에 더 안절부절못했다.
정작 차도도는 그들을 편하게 대했다.
“과제연구를 해보면 배우는 게 많아. 주제를 잘 잡으면 재미도 있고. 하지만 곧 중간고사니까…… 학업을 소홀히 하면 안 돼. 알겠지?”
고곽천재 모두는 소리높여 수긍했다. 이어서 차도도가 돌아가면서 하이파이브를 하자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강우는 차도도의 얼굴에 어려 있던 씁쓸한 기색이 옅어졌음을 확인했다. 무엇 때문인지 오늘 차도도의 안색이 별로였는데 웃고 떠드는 사이 평소처럼 돌아와 있었다.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강우는 다음 학기, 늦어도 내년에는 반드시 차도도와 R&E를 하겠다고 다짐했다. 어차피 그는 지구과학이 아닌 물리로 가야 할 사람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