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화 주제 선정 (2)
“그게 가능해?”
윤수아와 최대우는 컵라면을 먹으면서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과학적 원리가 단순했기에 가능성 자체를 의심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이런 내용도 과제연구 주제로 받아들여지는지를 판단하기 어려웠다. 경험이 부족한 연구자의 전형이었다.
당연히 강우는 그런 부분에서 탁월한 경험자였다.
“가능해. 물론 달에 있는 산 하나만으로 연구를 채울 수는 없어.”
“그럼?”
“거기에서 한 발 더 나가야 하거든.”
강우는 말을 아꼈다. 여기에서 더 의견을 내면 두 사람의 창조성을 방해한다. 지난번과 달리 이번 과제연구 수행에서는 철저하게 두 사람을 활용할 생각이었다.
물리학의 어려운 이론이 필요하지 않은 이 문제는 단순한 상상력의 확장이다. 그렇기에 그보다 두 사람이 더 잘할 가능성도 있다.
윤수아가 창밖의 달을 쳐다보며 눈을 반짝였다.
“내가 우주인이 돼서 달 표면에 여행 갔다고 생각해보면…… 그때 달에서 해가 뜨고…… 산의 그림자가 길게 뻗겠지. 그 그림자는 시시각각으로 길이가 변해. 아! 그림자가 산 하나만은 아니겠지. 달에는 산도 있고, 산맥도 있고, 크레이터와 계곡이 널려 있으니까.”
자동으로 강우와 최대우의 시선도 달을 향했다.
옛날부터 달은 상상력의 원천이었다. 인류는 때로는 달에서 토끼를 연상했고 때로는 늑대를 상상했다. 지금 그달을 보며 윤수아가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우리는 달의 표면을 이곳에서 모형으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높이와 넓이의 비율을 딱 맞춰서…….”
강우가 바라던 쪽으로 윤수아의 상상력이 옮겨가고 있었다.
“가능할걸? 3D로…….”
“그래서?”
“그 작업을 프로그램으로 자동화한다면…….”
과연 프로그래머답게 컴퓨터와 결합하여 윤수아의 상상력이 멀리 뻗어갔다.
천문대 망원경에 잡힌 달에는 무수히 다양한 지형이 있다. 시간에 따라 그림자 길이가 달라지는 지형을 찍은 다음 이를 기반으로 달의 산과 계곡의 높이를 계산한다. 이런 지형이 한둘이 아니기에 일일이 손으로 계산할 수 없고 프로그램으로 자동화한다.
그 결과로 달 지형의 3D 입체영상을 구성할 수 있다.
“그 영상을 기반으로 실물을 만들면 되겠어. 달 지형의 축소 모형. 찰흙이나 아니면 3D 프린터를 이용하거나.”
달에는 알려진 것만 수십만 개의 크레이터가 존재한다. 당연히 그 모두를 작업할 수는 없다. 하지만 한두 지역을 꽤 자세하게 재구축하는 작업은 어렵지 않다.
윤수아와 최대우가 의견을 주고받으면서 점점 그럴듯한 과제연구 계획을 완성해 나갔다.
달 지형에 해박한 최대우와 프로그래밍 도사인 윤수아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내가 할 일은 별로 없겠네.’
강우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찬성했다.
“좋아, 요약해서 다시 김선호 선생님께 제안 넣어볼게.”
고곽천재의 두 번째 과제연구 계획이 수립됐다.
* * *
수업하던 차도도는 눈살을 찌푸렸다.
조별로 앉아 그녀의 설명을 열심히 경청하는 학생들의 태도 자체는 나무랄 것이 없다. 다만 테이블에 올려놓은 학생들의 교재가 그녀의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먼저 가장 앞에 앉은 두 조, 손차희네 조와 전상철네 조를 보면, 손차희는 보란 듯 대학교재를 펴놓고 있다. 윤수아도 마찬가지였다. 저 두꺼운 대학교재를 이해는 하는지 의문이었다.
그런데 최대우는 교과서와 고등학생용 참고서를, 강우는 오로지 교과서 하나만 펴놓고 있었다. 물론 프린트물은 제외다.
전상철네 조는 네 명이 모두 대학교재를 펴고 있었다. 이곳이 대학 강의실인지 혼란스러울 정도다.
차도도는 그 장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물론 고려 과학고에서도 이들이 펴놓은 물리 대학교재를 사용하기도 한다. 고등학교 물리를 다 마치고 3학년 때 배우는 고급물리연구라는 과목에서다. 하지만 그게 지금은 아니었다 눈에 거슬리긴 마찬가지였다.
열심히 운동의 법칙을 설명하던 차도도는 마카를 내려놓고 입을 열었다.
“아직 중간고사는 멀었는데 다들 열심히 공부하나 보네요.”
“쌤, 너무 힘들어요!”
학생들의 반응이 돌아왔다. 어려운 과학고 수업을 따라가려니, 또 자신과 비등한 동급생과 경쟁하려니 당연히 힘들었다. 게다가 온종일 함께 생활하는 기숙사 시스템은 자연스럽게 학생들을 경쟁으로 내몰고 있었다.
“그런데…… 올려놓은 책이 대부분 대학교재네요? 이 시간 정식교재는 교과서와 프린트물이죠.”
차도도가 시선을 맞추자 손차희가 대답했다.
“교과서는 너무 부실해서요.”
“그래서 프린트물을 내주는 거잖아요.”
“프린트물은…….”
무심코 대답하던 손차희는 바로 입을 다물었다. 프린트물도 부실하다고 대답하면 자칫 차도도의 자존심을 긁게 된다.
이번에는 차도도의 시선이 전상철에게 향했다.
“상철이는 어떻게 생각해?”
“교과서에는 풀 문제가 없어요. 프린트물에도 문제가 적고요.”
대학교재에는 문제가 수두룩하게 많았다. 대학생들도 교재에 나온 문제를 풀어서 레포트로 제출하느라 고생이었다.
차도도는 한숨을 쉬며 일장연설을 시작했다.
“물론 여러분들이 틀린 건 아닙니다. 그러나 해마다 수능이 끝난 후 ‘교과서 위주로 공부했어요.’라는 말 또한 완전한 거짓은 아니죠. 모든 시험은 교과서를 기준으로 나오니까요. 우리 고려 과학고도 마찬가지죠. 과학고라고 절대 어려운 시험 문제만 내지 않습니다.”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학생도 있고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는 학생도 있었다.
물론 강우는 앞에 오로지 교과서만 펴놓고 있었기에 저 말의 진실 여부와 상관없이 뿌듯한 마음으로 가슴을 쫙 폈다.
“어려운 교재를 사용하면 이로운 점이 있는 만큼 손해도 있어요. 특히 개념을 제대로 잡지 못할 때는 보지 않느니만 못하죠.”
이 강의실에서 초보적인 개념을 모른다고 생각하는 학생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이 학교에 입학하기 전부터 학원에서 고교과정을 훑어보고 들어왔으니까. 당연히 교과서에 있는 내용은 눈을 감고도 말할 수 있다고 자부했다.
다만 강우는 달랐다.
그는 차도도의 의견에 동의했다. 이미 예비입학 기간에 경험했었다. 손차희는 개념을 모른 채 관성모멘트 문제를 공식에 의존해서 기계적으로 풀고 있었으니까.
그동안 그녀와 함께 공부하면서 강우는 비슷한 경험을 자주 했다. 그녀는 문제는 풀더라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그런 경우가 꽤 많았다. 사실 고등학생이기에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기도 했다.
“여러분! 혹시 작년 물리 중간고사 문제를 봤나요?”
“아뇨.”
학생들이 자동으로 고개를 저었다.
“공부는 정보에 기반을 두고 체계적으로 해야죠. 수능 공부를 한다면 최근 수능 문제 경향을 살펴보고 거기에 맞춰야 하고 학교 시험도 작년 문제를 참고해서 어느 수준까지 공부해야 할지 결정해야 하죠. 작년 문제는 학교 홈페이지나 클래스룸 앱에 들어가면 있으니까 쉽게 구할 수 있어요.”
학생들이 웅성댔다. 그들은 고려 과학고 시험이 꽤 어렵게 출제된다고 듣고도 정작 시험 문제를 아직 구해보지 않았었다.
“작년 시험에서 가장 어려웠다는 문제를 지금 한번 살펴보기로 하죠.”
차도도가 칠판에 그림을 그렸다.
도르래에 매달린 판에서 한 사람이 줄을 당기고 있는 그림이다. 줄을 당기는 사람도 판과 함께 움직이기에 학생들은 꽤 어려운 독특한 문제로 취급했다. 통상적인 힘의 평형 해석으로 풀어야 할지 고민스럽다.
“이 문제 한 번쯤 봤을 거예요. 풀 수 있는 사람?”
손차희와 전상철은 당연히 손을 들었고 다른 학생들도 몇몇 손을 들었다. 학원에서 푼 문제집에 있었으니까.
차도도가 미소를 머금고 그림을 살짝 바꾸었다.
“이렇게 문제를 변경하면 어떻게 될까? 풀어볼 사람?”
문제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손차희는 손을 내리고 열심히 고민에 잠겼다.
강우는 차도도의 의도를 이해했다. 기본 개념을 안다면 어렵지 않다. 다만 학생들은 저렇게 변형된 문제를 예전에 다뤄본 적이 없다. 그렇다 보니 시험에서 저 문제를 만났을 때 극악 난이도라고 혀를 내두를 수밖에.
손차희와 전상철을 비롯한 몇몇 학생들이 손을 들었다.
“묘하게 안 풀리는데요? 숫자가 이상해요.”
“자, 대학교재를 열심히 풀었다고 이 문제를 풀 수 있을까요?”
아무도 자신 있게 대답하지 못했다.
“여러분들이 변형 전 문제를 제대로 이해하고 풀었다면 지금 이 문제도 어렵지 않아요. 그런데 풀지 못한다는 것은 앞의 문제를 제대로 모른다는 거죠. 물론 이해해요. 도르래 문제는 중학교 때 배웠고 고교과정에서는 거의 다루지 않으니까…….”
조금은 실망한 표정으로 차도도는 강의실을 둘러봤다.
“내 말의 요지는 어려운 책으로 공부해야 어려운 문제를 풀 수 있는 게 아니란 거예요.”
비장한 마음으로 설교를 마친 차도도는 학생들을 둘러보면서 자신의 당부가 잘 먹혔다고 생각했다. 똑똑한 학생이라면 이만큼 알려주면 깨달아야 한다.
물론 그녀도 하루아침에 학생들의 공부 방식이 바뀌지 않으리란 정도는 안다. 대학교재를 참고하던 학생들은 여전히 그 책에서 손을 떼지 못할 것이다. 그렇더라도 조금이라도 나아진다면…….
차도도의 눈썹이 쓱 올라갔다.
“강우!”
창밖을 보며 딴짓하던 강우는 후다닥 상체를 세웠다.
“예!”
“내가 무슨 말 했지?”
“그게…… 기본에 충실하라고…….”
대충 맞는 답변 같긴 한데 차도도는 강우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최근에 밤마다 보고하는 톡에도 물리 공부 이야기가 없다. 대부분이 화학이 어떻고 하는 톡이었다. 이 녀석이 화학만 공부하나? 중간고사에서 물리를 열심히 하겠다고 다짐했던 게 언제였더라…….
담임보다 화학 선생님과 더 친한가? 그 꼴을 절대 볼 수 없다고 생각한 차도도는 강우를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내가 알기로는…… 강우는 선행하지 않았다고 했으니 당연히 대학교재도 보지 않았겠지?”
그동안 손차희의 교재를 대충이나마 훑었기에 과거의 기억과 맞물려서 대학교재 내용은 강우의 머릿속에 훤하게 자리 잡은 지 오래였다.
그렇다고 지금 와서 봤다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강우는 입을 다물었다.
“이 문제 풀어봐. 나와서.”
당연히 차도도는 강우의 실력이라면 문제없이 푼다고 예상했다. 그녀는 교과서만 공부한 강우도 푸는 문제를 다른 학생들은 풀지 못하니 대학교재가 필수가 아니라고 강조할 생각이었다. 아마 학생들은 강우를 보면서 대학교재의 필요성을 다시 고민할 것이다.
허리를 몇 번 펴고 앞으로 나간 강우는 마카를 손에 잡았다.
그리고 그림을 한참 쳐다봤다. 차도도의 뜻을 알 것 같다. 하지만 그 이상을 보여줄까? 학생들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도록.
바로 뒤에서 고현성이 악담을 퍼부었다.
“당연히 풀 리가 없지. 오늘 우리 브라더 실력 다 드러나네.”
아무도 제대로 건드리지 못한 문제를 설사 강우라 하더라도 한 방에 풀 리가 없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손차희도 마찬가지 생각이었다. 비록 물리나 과학사에서 강우가 탁월한 재능을 보이긴 했으나 그렇다고 꼭 문제를 잘 푼다는 보장은 없다. 작년 시험에서 제대로 푼 학생이 드물었다는 문제를 강우가 단번에 풀면 그건 천재지.
그녀의 바람처럼 문제가 어려운 듯 강우는 칠판 앞에서 심호흡을 반복했다.
이윽고 마카가 움직였다.
스윽- 스윽-
강우는 칠판에 길게 등호를 그렸다.
무슨 뜻인지 짐작하지 못한 학생들의 눈이 동그래졌다.
강우는 등호 옆에 화살표를 이용해서 도르래에 걸린 힘을 단순화해서 표시했다. 강우가 그린 그림은 무척 단순했다.
모두가 짐작하던 풀이 방식과는 전혀 달랐다. 적어도 어려운 문제라면 칠판에 가득 적어야 하는 법 아닌가.
놀랍게도 그 옆에 강우는 바로 답을 적었다. 심지어 풀이 과정을 나타내는 수식 하나 적지 않았다.
“이렇게 단순화가 가능하니까…… 정답은 850N입니다.”
손차희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천재였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