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화 주제 선정 (4)
권유성이 주먹을 꾹 쥐고 강우를 노려봤다.
“내가 무조건 이길 거니까…… 달이야 하룻밤 관측이면 끝나지만 우리는 무려 일 년간 고생했어. 절대 지지 않아.”
“그래, 알았다. 이제 좀 비켜주라. 우리도 바쁘니까.”
강우가 손을 휙휙 젓자 권유성이 분한 표정으로 물러났다.
다시 셋이 모여 머리를 맞댔다. 윤수아의 푸념이 시작됐다.
“그런데 우리가 이길 수 있을까?”
“왜? 내가 걱정되어서? 아니면 유성이가 걱정되어서?”
“둘 다. 하필이면 나랑 친한 친구 둘이 잡아먹을 듯 싸우니…….”
윤수아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강우를 째려봤다.
강우는 손을 저으며 말했다.
“내 탓 아니야. 먼저 도발한 건 권유성이라고.”
“그냥 선배라고 불러주면 되잖아.”
“아, 유성이가 먼저 깐죽거렸어. 어쨌든 권유성의 능력을 확인해 볼 수 있겠지. 단순히 평균태양시와 태양시의 오차만 논의한다면 별것 없는 리포트가 되고 케플러 법칙까지 끌고 와서 지구 공전과 자전을 제대로 고려하면…… 대단한 논문이 되겠지.”
강우의 알 수 없는 대답에 윤수아는 반박을 포기했다. 여전히 강우에게는 알 수 없는 부분이 너무 많다.
“네가 어떻게 알아? 너도 오늘 그 주제를 처음 들었잖아?”
잠시 고민하던 강우가 웃으면서 변명했다.
“우리 연구과제 주제 고민하면서 나도 고민해봤던 문제거든.”
공교롭게도 걸렸다는 건데 과연 믿어야 할지. 윤수아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다시 월면도로 시선을 돌렸다.
* * *
일반적으로 고등학생에게 가장 재미없는 과목은 수학이다.
물론 그 이유는 일반고와 과학고에서 조금 달랐다. 일반고 학생 대부분은 수학 과목 자체가 어려워서 수학 시간을 싫어한다. 반면 과학고 학생들은 지금 배우는 내용이 너무 쉬워서였다.
학원에서 고교과정을 여러 차례 반복해서 훑은 학생이 절반이 넘으니 인수분해 공식과 이차방정식 수업이 재미있을 리 없다. 미적분을 들어가면 그나마 나아지겠지만 그전까지 배우는 내용은 이들에게는 말 그대로 하품만 나올 수준이다.
“그래서 이 다항식은 여기를 치환하여 인수분해할 수 있고…….”
열심히 설명하던 정명욱은 학생들의 반응에 한숨이 나왔다. 지겨워하는 학생들의 태도가 눈에 보인다. 하지만 그렇다고 뛰어넘을 수도 없다. 무려 이 반에는 수학 선행을 하지 않은 녀석이 둘이나 있으니까.
설명하던 정명욱은 그 두 녀석을 찾았다.
역시 예상대로 강의실 맨 뒤에서 떡 하니 버티고 있다. 한 녀석은 큰 덩치를 자랑하듯 늠름하게 앉아 있고 다른 한 녀석은 그 뒤에 숨어 보이지도 않는다. 아마 오늘도 자고 있으려나.
“이런 유형을 복이차식 문제라 하고…….”
풀이과정을 쓰던 정명욱은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강우? 강우 어디 있어?”
뒤에 앉은 한 녀석이 재빨리 강우를 깨웠다.
“흐으…… 예?”
“이 문제 어떻게 풀지?”
흐릿한 눈으로 한참 문제를 노려보던 강우가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는데요.”
“정말 몰라?”
“네.”
“어휴, 자랑이다!”
정명욱은 한숨을 내쉬며 다른 학생에게 질문했다.
학생들은 강우가 정작 쉬운 문제를 모른다는 사실에 놀라 쑥덕였다.
정명욱도 강우의 대답이 거짓이 아니라 생각했다. 다만 저런 실력으로 2차 진단 고사에서 어떻게 만점을 받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가 본 강우는 단순 문제풀이가 아닌 고도의 사고력을 요하는 문제나 어려운 미적분 문제 등에서는 모르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평범한 학생과 차별되는 현상이다.
어쨌든 강우를 깨우는 데 성공한 정명욱은 학생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KMO 신청한 사람?”
KMO는 한국 수학 올림피아드 시험이다. 이 시험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면 한국대학교에서 방학 때 개설하는 여름학교와 겨울학교 과정을 수강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도 우수한 성적을 거두면 2차 시험을 거쳐 내년 여름에 국제 수학 올림피아드(IMO)에 출전하게 된다.
즉 KMO는 IMO에 출전할 국가대표를 뽑는 시험이라 할 수 있었다. 물론 사교육 방지를 위해 이 시험에서 상을 받더라도 학생부에 기재할 수 없었다.
국제 올림피아드 금상을 받고도 대학 진학을 걱정하는 나라는 전 세계에서 한국밖에 없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었지만.
몇몇 학생들이 손을 들었다. 그중에는 손차희와 전상철도 포함되어 있었다.
실제로 예년의 경우를 보면 이 학교 재학생 중 많은 학생이 KMO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뒀고 최종적으로 국가대표로 발탁되어 세계 무대에 진출했다. IMO에서 금메달을 따면 학교 역사에 이름이 남는다.
“예전에 말했듯이 고려 과학고의 전설이었던 세 사람은 모두 국제 수학 올림피아드에서 발군의 성적을 남겼다. 여러분들도 전설에 이름을 올리고 싶으면 이번에 꼭 신청해라. 물론 올해 처음 신청한 학생은 내년이 돼야 출전 자격이 생긴다.”
올림피아드 이야기가 나오자 학생들의 눈빛이 또렷또렷해졌다.
“참고로 지금 이학년 중에는 KMO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고 여름학교, 겨울학교를 마친 학생이 모두 셋이다. 이 학생들이 최종 선발전에서 무난한 성적을 거두면 올해 여름방학 때 국가대표로 출전한다.”
학생들의 눈에 감탄과 부러움이 가득했다.
정명욱은 학생들을 훑어보다가 강우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강우! 넌 왜 신청 안 했나?”
“저요? 제가 왜요?”
“예전에 근의 공식 문제를 푼 실력으로 보면 가능성은 충분한데?”
“전 관심 없어요.”
강우는 급하게 손을 저었다.
물리에서 탁월한 성적을 내는 게 우선이다. 국내로 진학하든 국외로 진학하든 이것은 필수였다. 그런 상황에서 괜히 수학까지 일을 벌이고 싶진 않았다.
정명욱이 실망한 음성으로 다시 물었다.
“정말 생각 없나? KMO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면 이로운 점이 많아.”
“참으렵니다.”
“아쉽군.”
정명욱은 더는 다그치지 않았다. 보통 학생이라면 하나라도 더 실적을 쌓으려고 대회 참가를 원한다. 그런 점에서 강우는 예외였다.
그때 종이 울렸고 정명욱은 수업을 끝냈다.
강우가 다른 강의실로 이동하려고 짐을 챙기고 있을 때 고현성이 거들먹거리면서 나타났다.
“어이, 브라더! KMO 신청 안 하냐?”
“안 한다니까.”
“왜 안 하는데?”
“못 칠 것 같으니까. 괜히 쪽팔릴 이유는 없지.”
강우는 대충 대답하고 자리를 떠나려 했다.
고현성이 그의 팔을 잡았다.
“오호! 경시 문제 유형에 의외로 약한가 봐? 좋아! 승부다!”
강우는 짜증 난 표정으로 녀석을 노려봤다.
“또 뭔데?”
“KMO 시험에서 누가 점수를 더 잘 받는지. 어때?”
“넌 대체 하루라도 내기하지 않으면 어디가 덧나냐?”
처음 볼 때 느꼈지만 고현성 이 자식도 참 특이한 놈이다. 손차희나 윤수아에게 껌벅 죽는 것도 그렇고, 볼 때마다 내기를 거는 것도 그렇고. 우습게도 내기에서 반드시 패배한다. 그런데 지금 또 승부를 걸고 있다. 아무리 잡초는 밟히면서 자라는 법이라지만.
“두렵지? 큭큭, 나를 피하다니!”
고현성이 흐뭇한 표정으로 강우를 빈정거렸다.
“너, 돈 많아?”
그동안 내기에 져서 밥값을 냈던 고현성의 표정이 바로 일그러졌다.
“마, 많긴. 어쨌든 이번에는 내가 분명히 이길 수 있어! 덤벼라! 바보처럼 피하지 말고.”
아, 귀찮은 녀석! 수학에선 사고 치지 않으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나? KMO 시험이 중간고사 직후라서 학교공부에 방해되진 않는다. 그래도 이런 녀석에게 휘둘릴 수는 없지.
강우는 고현성의 어깨를 툭툭 치며 강의실을 나섰다.
“너 혼자 해!”
“야! 무슨 내기를 혼자서?”
“그럼 차희랑 하든가!”
회피하는 강우를 뒤따라가며 고현성이 방방 떴다. 수업 시간에 강우가 쉬운 인수분해 문제를 제대로 풀지 못했으니 고현성은 이번에야말로 이긴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 * *
점심을 먹은 후 고곽천재는 편의점 휴게실에 모였다.
금방 밥을 먹었는데도 부족하다고 입을 쉬지 않는 사람이 둘 있다.
한 사람은 최대우. 그의 앞에는 빵과 우유가 놓여 있었다. 다른 한 사람은 윤수아. 그녀의 앞에는 초콜릿과 과자가 가득했다.
이 모습을 강우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관찰하고 있었다.
“초콜릿은 사랑이지.”
“빵은 못 참지!”
죽이 잘 맞는 두 사람을 향해 강우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대우야, 내가 생각해봤는데…… 네가 부족해. 아직 부족해.”
“무슨 말이야?”
“네가 조금만 더 몸이 부풀었어도…… 오늘 쌤에게 안 걸렸거든.”
“그렇지? 내가 더 많이 먹어야겠지?”
수업 시간에 자다가 지적당한 상황을 떠올리며 최대우가 머리를 긁적였다.
윤수아가 환한 웃음을 터트리며 엄지를 척 내밀었다. 그녀의 입술에는 초콜릿이 묻어있다.
먹을 때면 온 세상을 다 가진 표정을 하는 윤수아와 최대우를 보면 저렇게 잘 어울릴 수가 없었다.
문득 존재감이 사라진 한 사람이 신경 쓰였다.
강우는 자신의 옆에 앉은 손차희에게 시선을 돌렸다.
수업 시간부터 시작해서 휴게실에 들어와서도 뭔가를 열심히 하고 있다. 그녀가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을 한두 번 본 게 아니지만, 오늘따라 유별나 보였다.
강우는 조용히 손차희의 시선을 따라 그녀의 연습장을 주목했다.
열심히 뭔가를 적다가 잘 안 풀리는 듯 줄을 쭉쭉 긋고 다시 열심히 쓰다가 지우기를 반복한다. 문제가 잘 안 풀리는 모양이었다.
“수학 문제구나…….”
- 원 위의 두 점 R, S가 지름이 되지 않도록 잡고…….
원과 삼각형, 직선이 얽힌 복잡한 기하 문제였다. 당연히 고등학교 과정에서는 다루지 않는 문제였다. 오히려 중학교 경시 심화 문제와 닮아 있었다.
중간고사가 다가오는 이때 수업과 전혀 상관없는 이런 문제를 왜 풀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여기에는 신기한 문제를 보면 눈을 떼지 못하는 강우가 있었다. 오지랖이 넓지 않더라도 손차희가 헤매고 있으니 당연히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하아!”
한참 고민하던 손차희가 한숨을 푹 내쉬다가 강우와 눈이 마주쳤다.
괜히 죄를 지은 듯 움찔한 강우는 급히 시선을 돌렸다.
“풀어볼래?”
“무슨 문젠데?”
“국제 올림피아드 문제. 수학연구반 시험 문제였는데…… 잘 안 풀리네.”
그 순간 강우는 천체관측반 시험 문제를 떠올렸다. 그곳에도 골치 아픈 문제가 하나 있었었다. 어느 동아리이든 신입생 기를 죽이려고 그런 문제를 하나씩은 끼워 넣는다.
마침 수업 시간에 IMO, KMO 이야기가 나왔었기에 강우도 관심이 갔다.
강우의 기분을 눈치챈 손차희가 문제지를 쓱 내밀었다.
한동안 시간이 정지한 것처럼 강우는 뚫어지게 문제를 쳐다봤다. 손차희는 그런 강우를 조심스럽게 관찰했고 윤수아와 최대우는 여전히 먹느라 정신없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강우가 연필을 들고 문제에 보조선을 그었다.
“이렇게 하면…… 문제가 단순해지니까…….”
마치 신들린 것처럼 연필이 움직였다. 증명 문제라서 수식이 아닌 기호가 나열됐다. 대략 열 줄가량 쓴 다음 강우가 결론을 내렸다.
“이렇게 하면 접한다는 게 증명되지.”
강우는 연필을 내려놓았다.
손차희는 충격에 사로잡혔다.
이 문제를 앞에 놓고 이틀째 고민했다. 하지만 답이 보이지 않았다. 풀릴 듯 풀릴 듯하다가도 이상하게 막혔다. 역시 국제 올림피아드 문제라고 내심 자위하면서 어떻게든 풀어보겠다고 끙끙대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문제를 강우는 몇 분 만에 풀어버렸다. 그것도 이런 유형의 문제를 손에도 대지 않았던 녀석이. 이게 가능한 일일까.
손차희의 까만 눈동자가 지진이 난 듯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