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과학고 천재-45화 (45/325)

제45화 명사 강연 (1)

이때 강우도 내심 놀란 상태였다.

‘이게 왜 풀려?’

그가 미적분을 잘 푸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미적분은 전생에서 열심히 공부했던 과목이고 전공인 물리 때문에라도 깊게 심화 학습한 분야였다. 하지만 기하는 달랐다. 딱히 기하를 별도로 공부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 이 문제가 풀렸다. 마치 예전에 알고 있었던 문제인 것처럼. 왜 이런 현상이 벌어졌는지 그도 몰랐다. 강우로 새로운 삶을 살게 된 후 천재성이 증가한 느낌이 들었었는데 이 문제를 푸는 순간 확실해졌다.

요즘 물리와 수학, 나아가 화학을 공부하며 미묘한 이질감과 친밀감을 경험했다. 확실히 예전보다 이해력과 응용력이 발전했다. 그가 이렇게 느낄 정도라면 실제로 그 능력이 꽤 향상되었을 것이다.

그는 정말 천재가 됐다. 하늘이 강우로 빙의한 그에게 선물을 준 걸까. 어쨌든 그 능력을 확인해 보고 싶긴 했다.

“이게 이렇게 쉽게 풀려?”

“그냥 풀었는데…….”

딱히 변명할 수도 없어 강우는 적당하게 얼버무렸다.

입술을 지그시 깨물던 손차희가 말을 꺼냈다.

“강우야, KMO 생각 없어?”

“응, 없어. 왜?”

“그거 천재라면 꼭 통과하는 관문인데…….”

“나 천재 아냐.”

“내 생각에 강우 넌 천재 맞아. 그래서 너도 KMO 경시를 쳤으면 좋겠어.”

손차희는 강우가 천재인지 확인해 보고 싶었다. 지금까지 그녀가 인정한 천재는 이민찬과 권유성이다. 그녀는 그 둘의 범주에 끼려고 무던히도 노력했고 자존심도 세워보았었다.

아직 졌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어쨌든 지금까지의 결과는 그녀의 패배였다.

이대로 무기력하게 밀릴 수는 없기에 손차희는 이번 중간고사에 모든 것을 걸었다. 중간고사에서 이민찬을 이긴다. 그리고 이민찬이 KMO 시험에 나간다고 해서 그녀도 신청했다.

그런 그녀의 눈앞에 강우가 등장했다. 아직 강우를 제대로 평가하기는 이르지만, KMO를 쳐보면 강우의 본 실력을 확인할 수 있다.

상황을 눈치챈 윤수아가 회심의 카드를 꺼냈다.

“유성이 있잖아? 유성이는 이번 여름에 국가대표로 IMO에 나갈지도 몰라. 지난 방학 때 한국대 겨울학기 수업을 끝냈거든.”

권유성이 수학에도 대단한 재능이 있었나 보다. 그의 수학 과목 등급이……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쨌든 S는 물리뿐이었다.

“그런데 유성이는 물리 올림피아드에도 출전하는 천재야.”

만날 때마다 봤던 권유성의 자신감을 이해했다. 물리와 수학 양쪽으로 천재성을 보이는 녀석을 누가 함부로 대할까.

어쨌든 권유성 이야기가 나오자 강우도 가슴이 뛰었다. 천재들의 이야기는 묘한 경쟁심과 동료의식을 불러왔다.

“그래서?”

“강우야, 유성이 이기고 싶지? 과제연구보다 천재들이 겨루는 올림피아드에서 이겨야 정말 이긴 거야.”

“나도 올림피아드에 나가라고?”

“확실히 못 박으려면 수학, 물리 둘 다.”

“끙!”

강우는 신음을 토해냈다. 무엇보다 천재라고 일컬어지는 권유성 녀석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고 싶다. 그래야 녀석의 천재성도 제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현재로는 녀석에게 자극을 줄 마땅한 사람이 없어 보이니까.

그러다가 자칫 주변의 이목을 끌면 어떻게 될까? 어쩌면 천재라는 소리를 들으며 이 학교에 다녀야 할지도 모른다. 그게 정말 바람직한지 판단하기가 쉽진 않았다.

다만 마음에 든 점은…….

“일단 신청만 해둬. 시험을 응시할지 말지는 나중에 정해도 되니까.”

윤수아의 권유가 결정타였다.

그 순간 최대우마저 꼬임에 넘어갔다.

“좋아, 나도 신청한다! 수학과 물리 모두. 고곽천재 전부가 하는 거지?”

강우도 순순히 수락했다.

그래, 어차피 결정은 나중으로 미뤄도 되니까. 내일의 그에게 맡길 생각이다. 어쩌면 올림피아드를 준비하면서 국내의 수많은 천재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국가대표로 출전하면 세계적인 천재를 확인하게 될지도.

천재를 떠올리니 갑자기 가슴이 뛴다. 그들과 어울리며 그들에게 뒤지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는 수학만 신청했다. 단순히 실적을 챙기려면 물리가 더 쉽지만, 열심히 하는 학생들에게 물리마저 피해를 주고 싶진 않았다.

* * *

주말에 학원을 다녀온 손차희는 세미나실에서 강우를 유심히 관찰했다.

놀랍게도 강우는 수학과 물리에서 완벽한 재능을 보였고 부족하던 화학도 어느새 제 궤도에 올랐다. 이제는 생물과 지구과학에 신경 쓰고 있으니 두 과목에서도 조만간 탁월한 성과를 거둘 것이다.

차도도는 학생들에게 대학교재 활용을 말렸지만 손차희가 보기에 강우는 딱히 교재를 가리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실제로 강우는 모든 과목에서 대학교 교재를 활용했다. 동시에 고교 교과서, 참고서도 같이 이용했다.

보통 학생은 고교 참고서를 끝낸 후 대학교재를 본다. 그런데 강우에게는 이런 순서가 존재하지 않았다. 무슨 규칙인지 모르지만 때로는 대학교재를 먼저 보기도 했다.

중요한 점은 어느새 강우는 고교 과정 문제집을 풀면 거의 틀리지 않는 수준에 이르렀다는 사실이다.

‘대체 어떻게 된 걸까?’

손차희는 강우의 방식을 이해하기도, 수준을 짐작하기도 어려웠다. 어떨 때는 기초 개념을 간신히 깨우친 초보처럼 보였는데 어떨 때는 어려운 학원 문제지를 손쉽게 풀었다.

강우를 유심히 볼수록 넘을 수 없는 벽이 존재하는 기분이다.

‘정말 천재였나…….’

질투심 속에서도 아니라고 부정하기는 어려웠다.

그녀가 강우를 유심히 살피고 있을 때 정작 강우는 핸드폰을 내려놓으며 한숨을 푹푹 쉬었다.

“흐어…….”

“왜 그래?”

그녀의 눈길이 강우의 핸드폰 화면으로 자연스럽게 옮겨졌다. 화면에는 평범한 톡이 떠 있었다. 다만 그 상대가 시선을 끌었다.

‘신 선생님이네…….’

강우가 매일 밤에 차도도와 신새벽 선생님에게 공부한 내용을 보고하는 것을 조원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었다.

매일 두 사람에게 톡을 보내는 강우를 보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신새벽 쌤이 또 숙제를 냈어. 으흐흑.”

의자에 축 늘어진 강우가 볼멘소리를 늘어놓았다.

“숙제가 많나 보네.”

“완전 마녀야, 마녀. 겉으로는 그렇게 안 보이더니.”

“그만큼 실력이 늘어나잖아.”

“아니야, 이건 갈굼이야, 갈굼.”

투덜대던 강우가 화학 문제지에서 숙제 분량을 확인했다.

저렇게 싫어하면서도 이제는 숙제를 복사해서 내지 않고 직접 푸는 것을 보면 학교생활에 완전히 적응했다는 표시다.

강우가 넘기는 문제지에서 채점된 많은 동그라미가 보였다. 이제는 틀린 문제가 가물에 콩 난 듯하다. 괄목상대할 만한 성장이었다.

손차희는 강우에게서 관심을 떼고 책을 펼쳤다. 화학 대학교재인 옥스토비. 그녀는 이 교재를 마르고 닳도록 보고 있었다.

‘강우는 부분부분 떼서 공부하던데…….’

그녀는 이 책을 학원에서 처음부터 쭉 훑었었다. 강우는 필요한 부분만 골라서 집중했다. 물론 공부는 각자 취향이라지만…….

문득 오늘 낮 학원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다른 날과 달리 학원에서 본 화학 시험을 망쳤다. 그리고 화학 선생님께 불려갔다.

수학 시험에서도 최악이었다. 안 풀린 문제는 없는데 이상하게 머리가 정지한 기분이고 실수가 잦았다. 최악이었다.

- 실력은 줄지 않으니까 열심히 하면 다시 정상 궤도로 돌아올 거다.

수학 선생님의 격려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마음은 어두웠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요즘 들어 유독 이런 경향이 심해졌다. 그게 고등학교에 들어오면서 수업 내용이 어려워져서인지 아니면 그녀 자신의 문제인지 불분명했다.

어쩌면 모든 과학고 학생이 입학 후 겪는다는, 동료와의 경쟁 압박감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라면…….

손차희의 시선이 강우를 뚫어지라 쳐다봤다.

강우는 여전히 투덜대면서 차도도에게 톡을 보내고 있었다. 공부한 결과 보고인지 아니면 연인 사이의 잡담 톡인지 모호했다. 녀석의 표정을 보면, 싫어하는 것 같기도 하고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하고. 적어도 그녀가 볼 때는 그랬다.

어쩌면 최근 들어 그녀의 공부 패턴이 흐트러진 원인이 강우에게 있을지도 모른다. 경쟁할 엄두도 안나는 그를 만나 위축되었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 빠진 건 아닐까?

‘설마…….’

그녀는 아직 강우를 이민찬이나 권유성과 동급으로 놓지 않았다. 그런데 머리와 달리 마음은 이미 그 사실을 아는 게 아닐까.

‘그럴 리가 없지.’

강우 때문에 그녀가 흔들릴 리는 없다. 적어도 그녀는 십 년간 공부한 자신만의 방식이 있으니까. 이 방식을 지금도 끊임없이 수정 보완하고 있었다. 강우의 방식도 참고하면 그뿐이다.

교재의 익숙한 내용이 눈에 들어왔다. 이제는 눈 감고도 외울 정도다. 그런데 왜 정작 테스트를 보면서 틀린 문제가 계속 나오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어쨌든 이번 중간고사에서 손차희는 수석을 양보할 생각이 없다. 적어도 그녀의 목표는 반 수석을 뛰어넘어 전교 수석이니까. 전상철은 당연히 눌러주고 이민찬도 밟아준다.

그만큼 열심히 했고 또 하고 있으니까, 노력은 배신하지 않으니까.

강우는? 강우를 이길 수 있을까?

핸드폰에 불만을 터트리며 톡을 보내는 강우를 힐끔 살핀 손차희는 어쩌면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3년간 그녀의 최대 적수는 이민찬이 아니라 눈앞의 강우일지도 모른다.

* * *

고려 과학고에는 여러 가지 장점이 있다.

무엇보다 학생들의 발전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한다. 유명 과학자를 초빙하여 강연을 듣는 일도 그런 장점 중 하나였다. 한 달에 평균 한 번 실시하는 과학 강연이 대강당에서 열렸다.

이 강연은 유명한 석학을 통해 현재의 과학기술 발전 방향을 듣고 미래를 향한 꿈을 키울 목적으로 기획된다. 언론에서 말로만 듣던 유명인사를 직접 눈으로 보고 들을 기회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이 강연을 좋아하는 학생도 많았다.

다만 귀찮다고 싫어하는 학생도 있었다. 그런 학생들은 강의 도중에 숙면하기 마련이다.

강당은 강연을 들으러 온 학생들로 가득했다.

강우는 조원들과 나란히 앉아서 연사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오늘은 그도 기대하는 바가 컸다.

오늘 예정된 강연은 물리이고 주제는 무려 핵융합 분야다. 예전에 강우가 전생에서 연구했던, 가장 친숙한 분야였다.

강우는 남다른 감회에 휩싸였다. 당분간은 핵융합에 다시 손대지 않을 거라고, 노트북에 자료를 받고서도 고이 묻어두기만 했었는데 이런 식으로 접하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학생들의 눈빛이 반짝반짝했다. 적어도 이런 강연이 처음인 신입생들은 모두 의욕에 불탔다. 그의 옆에 앉은 윤수아, 손차희, 최대우도 잔뜩 흥분한 표정이었다.

“영어로 하는 거겠지?”

“강연자가 미국 사람이니까 그렇지 않을까? 한국말 알겠어?”

“그럼 질문도 영어로 해야 하는 거야?”

“으아, 어떡해? 나 영어 못하는데?”

윤수아가 호들갑을 떨었고 강우는 피식 웃으며 맞장구를 쳐주었다.

“나도 그래.”

오늘 강연자는 미국 MIT 공대의 상온 핵융합 권위자인 요셉 교수였다. 당연히 강우의 기억에 남아 있는 사람이다. 손강우 시절 학술발표회장에서 몇 번 만나 악수하고 대화를 나누기까지 했었다.

서로가 세계적인 권위자였던 만큼 가끔 서신을 교환하던 사이이기도 했다. 요셉 교수는 사십 대 중반의, 한창 활발하게 연구 활동을 펼치는 과학자로 세계적으로 이 분야에서 손꼽히는 몇 안 되는 전문가이기도 하고.

그랬던 사람을 오늘 다시 본다니 당연히 가슴이 뛸 수밖에 없었다.

“유명한 사람이 바쁠 텐데 어떻게 우리 학교까지 와서 강연한대?”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