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6화 명사 강연 (2)
문득 든 궁금증이 강우를 고민에 휩싸이게 했다.
요셉 교수의 왕성한 연구 활동을 고려해보면 이렇게 한가하게 고등학교에서 강연할 시간이 있을 리 없었다.
다른 곳처럼 학교에서는 고액의 강연료를 지불하지도 못할 테니 요셉 교수의 방문은 정말 뜬금없었다.
그의 궁금증을 손차희가 풀어줬다.
“과제연구 수업 시간에 들었는데…….”
요셉 교수의 강연을 유치한 사람이 김윤택이었나?
논리적으로 본다면 이 학교에도 요셉 교수와 친분이 있는 사람이 한 사람은 있어야 설명이 됐다. 물리 부장인 김윤택의 발이 꽤 넓다고 했으니 첫 번째 후보였다.
“요셉 교수가 한국에 일이 있나 봐. 얼마 전에 우리나라에서 핵융합 관련 유명 교수가 죽었다나? 그래서 그 연구 자료 때문에 왔다고 하더라고. 한국대 교수님이랑 만났을 때 우리 학교 강연 이야기가 나왔다던데?”
충격이었다.
손강우의 죽음을 이런 식으로 또 듣다니! 본인의 죽음을 본인이 듣는 기분은 정말 낯설었다.
얼핏 복잡한 사정처럼 들렸지만, 강우는 바로 상황을 짐작했다.
손강우 시절 마지막으로 서신을 주고받았던 미국 방위 산업 업체는 요셉 교수와도 사업적으로 얽혀 있었다. 그런데 손강우가 갑자기 죽게 되자 사업 진행에 차질이 발생했고 이를 해결하려고 급히 요셉 교수를 한국으로 파견한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요셉 교수의 한국 쪽 파트너는 한국대 물리학 교수인 마도환이 된다. 마도환이 손강우의 연구실에 있던 개인 컴퓨터와 관련 자료를 모두 가져갔다고 했으니 정황상 거의 확실했다. 마도환은 컴퓨터에서 자료를 얼마나 빼냈으려나?
“김윤택 선생님이 그 한국대 교수님이랑 친하대.”
이어진 손차희의 설명이 강우의 기분을 확 일그러트렸다. 마도환과 김윤택이 친구라고? 나쁜 놈의 친구도 나쁘게 보이는 법이다.
김윤택과 마도환이 가까운 사이라니! 아무리 세상이 좁다지만 또 이렇게 엮이게 되나. 새삼 과제연구 지도교사로 김윤택을 거절한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고.
손강우가 죽고 아직 두 달이 채 되지 않았으니 요셉 교수의 다급함이 이해되긴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관련 자료는 점점 사라지니까.
하지만 마도환이 얼마나 도울 수 있을까. 마도환이 확보한 자료와 마도환의 핵융합 분야 지식……. 보지 않아도 그 한계가 뚜렷하다.
강우는 싸늘한 미소를 머금고 단상 위를 집중했다.
강당에 모인 학생들이 슬슬 지겨워할 때쯤 단상에 물리 부장인 김윤택이 올라왔다.
“자! 학생 여러분! 이번 학기 첫 명사 강연회입니다. 오늘의 주제는 인류의 에너지 발전. 강연하시는 분은 미국 매사추세츠 공과대학 물리학과의 프리드 요셉 교수님입니다. 우리 학생들을 위해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와주신 연사님께 감사드립니다.”
다부진 인상의 중년 남자가 단상에 나타났다. 키 크고 몸집 있는, 전형적인 앵글로 색슨 계통의 백인 남자다.
요셉 교수는 예전에 강우가 봤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갑자기 예전의 추억들이 떠올랐다.
요셉 교수와 상온 핵융합의 관심사를 논하던 그 시간이 무척 즐거웠었는데 불과 일 년 만에 다른 환경에서 만나게 됐다. 요셉은 변화가 없지만, 그는 교수에서 학생으로 바뀌었다. 대학생도 아닌 고등학생으로.
이제는 요셉 교수와 그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
강우는 착잡한 마음속에 요셉 교수를 주목했다.
김윤택의 소개를 받은 요셉 교수가 강당을 쭉 둘러봤다.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그가 학생들을 향해 인사했다.
“헬로 에브리원.”
이어서 영어를 빨리 듣지 못하는 학생들을 배려해서 느린 속도 또박또박 말하기 시작했다.
“오늘 여러분들과 인류의 에너지 발전을 논의하고자 합니다. 문명의 발전을 표현하는 많은 관점이 있지요. 에너지 소비량도 인류의 발전을 측정하는 하나의 지표가 될 수 있습니다. 과거 인류는 오로지 사람과 동물의 힘으로 필요 에너지를 충당했지요. 그러다가 근대 산업혁명 이후 증기 에너지를 이용하면서 인류가 가용할 수 있는 에너지가 폭발적으로 늘었습니다.”
예전의 손강우는 순수 국내파였다. 그렇기에 영어를 자유자재로 사용하지 못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강우는 다른 학생들보다 평균적인 어학 실력이 절대 뛰어나다고 말할 수 없다. 적어도 영어에서만큼은 나이가 어릴수록 영어를 많이 접해서 잘하는 경향이 있으니까.
하지만 강우는 대학에 들어간 후 외국 교수와 접할 기회가 많았다. 또 그들과 공동연구를 자주 했다. 덕분에 일상 영어에서는 부족할지라도 이처럼 전문용어가 오가는 영어회화에서는 대화에 지장을 받지 않았다.
덕분에 지금 요셉 교수의 강연도 막힘 없이 자연스럽게 들을 수 있었다.
일부를 제외한 다른 학생들은 강연 중간중간에 나오는 전문용어 때문에 오히려 영어 듣기에 문제가 발생했다. 하지만 흐름을 따라잡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요셉 교수의 강연은 흥미로웠고 과학 상식 위주여서 학생들이 이해하기에 어렵지 않았다. 대부분 학생은 요셉 교수의 강연에 귀를 기울였다.
손차희는 강연 도중에 강우를 흘낏 살폈다. 강연에 집중하는 모습이 낯설었다. 강우가 시골 학생이기에 영어에 곤란을 느낄 줄 알았는데 그런 낌새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추측과 달랐기에 손차희는 적잖게 당황했다.
‘영어도 잘하나?’
손차희는 서울 태생이고 어릴 때부터 영어학원에다 영어연수까지 받았기에 영어에 자신 있었다. 그래서 영어 강연에 부담을 느끼지 않았다.
그 때문일까, 오늘 강연회에서 강우가 당황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 바람이 물거품이 되자 손차희는 강우를 다시 평가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알다가도 모를 녀석이네.’
알 수 없는 실망감을 느끼면서 손차희는 다시 요셉 교수에게 집중했다.
“해마다 인류가 사용하는 에너지의 양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그 대부분을 석탄이나 석유로 충당했으나 현재는 원자력이 많은 부분을 감당하고 있고, 전 세계적으로 보면 태양광이나 풍력 등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요셉 교수가 손을 저어 신호를 보내자 스크린에 비치는 자료 화면이 바뀌었다. 줄지어 선 풍력 발전소 사진과 이글거리는 붉은 태양이 등장했다.
“그 어떤 에너지원도 단점이 있고 충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궁극의 에너지원이 있습니다. 바로 핵융합이지요. 이 우주를 밝히는 별빛 에너지를 공급하는 핵융합, 수소 원자가 결합하여 헬륨 원자를 만드는 21세기의 연금술, 이 핵융합 에너지야말로 인류를 에너지 부족 문제에서 해방할 궁극의 수단입니다.”
요셉 교수의 강연은 흥미로웠다.
강우는 느긋한 심정으로 강연을 들었다. 평소 수업 시간에 졸거나 자기만 하던 그의 태도에 비하면 해가 서쪽에서 뜰 지경이다.
강연이 길어지면서 학생들 절반은 열심히 듣고 절반은 졸거나 딴짓하는 상황으로 흘러갔다.
대략 한 시간이 지나고 강연이 마무리됐다.
박수가 지나간 후 질문이 시작됐다.
“교수님께선 원자력 핵분열 에너지와 수소 핵융합 에너지의 미래를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고학년의 한 학생이 유창한 영어 발음을 앞세워 질문했다.
요셉 교수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쉬운 언어로 대답했다. 결론은 핵분열과 핵융합은 모두 인류의 궁극적인 에너지이지만 핵분열은 방사능을 비롯한 위험 요소가 많고 핵융합은 그렇지 않다는 설명이었다.
“핵융합은 언제부터 가능해질까요?”
다른 학생이 질문했다. 그렇게 몇 차례 질문이 이어졌고 그때마다 요셉 교수는 친절하게 설명했다.
김윤택을 비롯한 학교 관계자는 흐뭇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학생들이 강연자 앞에서 적극적으로 호응해주니 체면을 세웠다는 안도감이 드러난다.
어차피 고등학생이니 깊은 이해가 필요한 세부적인 문제를 질문할 수는 없었다. 강연자가 지향하는 방향과 주제를 이해했다면 충분하다. 강연자인 요셉 교수도 그 정도면 충분히 학생들의 수준을 높이 평가할 것이다.
그렇게 질문과 답이 흘러가고 있을 때였다.
강우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있었다.
요셉 교수에게 존재감을 드러내야 할까? 훗날 그의 진로에서 요셉 교수가 필요하다면 당연히 지금 어떤 식으로든 눈도장을 찍어둬야 한다. 앞으로 핵융합을 연구하면 결국 요셉 교수와 마주칠 수밖에 없다.
다만 이곳에서 존재감을 드러내기에는 부담감이 있었다. 그는 시골에서 올라온 가난한 고등학생일 뿐이니까. 그런 학생이 핵융합에 특별한 지식이 있다면 그 파장이 만만찮을 것이다.
‘괜한 짓 같긴 한데…….’
강우는 요셉 교수를 눈여겨보면서 발생 가능한 여러 상황을 머릿속으로 확인했다.
그러기를 한참, 질문을 끝내고 강연을 마무리하려고 김윤택이 앞으로 나오는 장면이 포착됐다.
강우는 재빨리 손을 들며 일어났다.
“이것으로 질문 시간을 마치고…….”
입을 열던 김윤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강우를 노려봤다. 질문하려면 빨리할 것이지 뒤늦게 왜 이러냐는 표정이다. 그것도 손만 들면 될 일이지 눈에 띄게 일어나기까지.
김윤택이 말을 멈추고 요셉 교수의 눈치를 봤다.
다행히 요셉 교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강우의 질문을 허락했다.
강우는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질문을 시작했다. 물론 그의 영어 발음은…… 엉망이었다.
“현재 핵융합을 위해서는 가장 유리한 DT 반응에서도 1억K 이상의 고온이 필요합니다. 이를 낮출 방법이 있습니까?”
강우의 첫 질문은 조금 세부적으로 들어가긴 했으나 핵융합 상식이 충분하다면 질문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요셉 교수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앞으로 과학기술이 발전하면 온도 조건을 내릴 수 있으며 이를 위해 많은 과학자가 연구 중이라고.
강우가 예상했던 가장 손쉬운 대답이었다. 이제 진짜 의도했던 둘째 질문을 할 차례였다.
“현재 대부분의 핵융합 연구는 수소 플라즈마를 가두어 두는 시간, 온도, 에너지 이득 계수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혹시 뮤온 입자를 촉매로 이용한 방법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강우의 질문이 시작된 순간 요셉 교수의 안색이 확 변했다. 묘하게도 강우의 질문이 그가 한국을 방문한 이유와도 일부분 맞닿아 있었기 때문이다.
예상치 못한 질문에 잠시 강우를 살펴보던 요셉 교수가 대답을 시작했다.
“핵융합이 일어나려면 로손 조건을 충족해야 합니다. 고온의 수소 플라즈마를 장시간 고밀도로 유지하는 기술은 현재 개발되지 않았습니다. 이를 극복하려고 한때 뮤온 촉매를 이용한 방법이 추진되었으나 뮤온 입자의 손실과 에너지 이득이 낮아 현재로서는 가능성을 낮게 보고 있으며…….”
“뮤온 입자의 수명을 증가시키는 새로운 아이디어는 나오지 않았습니까?”
요셉 교수가 대답을 중단하고 강우를 쳐다보았다. 그의 시선에 의문이 담겼다.
그가 한국에 온 이유도 바로 이 문제 때문이었다. 죽은 손강우가 핵융합 반응에서 촉매로 사용하는 뮤온 입자의 수명과 스티킹 현상을 개선하는 이론을 연구했었다.
한국대를 방문해서 손강우와 친분이 있다는 교수를 만나고 관련 자료를 넘겨받았으나 핵심 아이디어는 남아 있지 않았었다. 그의 한국 방문은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던 차에 관련 내용이 질문으로 등장하자 요셉 교수의 놀라움은 컸다.
고등학생이, 핵융합에 관해 전혀 모르는 학생의 질문치고는 지나치게 구체적이었다.
강우의 질문이 나온 순간 강당에는 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강우의 질문을 이해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모두 요셉 교수의 미묘한 표정 변화를 읽었다.
요셉 교수가 질문을 심상치 않게 받아들이는 기색이 역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