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화 명사 강연 (3)
“한국의 손 교수가 뮤온 입자를 열심히 연구했습니다. 다만 지금은…….”
요셉 교수가 가까스로 말을 꺼냈을 때 김윤택이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요셉 교수님, 지금 한국대에서 교수님을 급히 찾고 계십니다. 될 수 있으면 빨리 연락했으면 한다고…….”
“아, 네.”
요셉 교수는 질문하는 학생을 찬찬히 살폈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학생이다. 저 학생이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 알아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으나 한국대와의 일이 더 급했다.
그는 미소를 머금고 대답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대답하기에는 시간이 마땅치 않은 듯합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말씀드리기로 하지요. 일정상 오늘 질의답변을 이쯤에서 마칩니다.”
요셉 교수가 마감을 알렸고 학생들은 박수로 강연을 마무리했다.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강우는 미소를 지었다.
이 정도면 충분했다. 적어도 요셉 교수는 오늘 일을 기억할 것이다. 여기에 고교과정을 벗어난 주제에도 그가 관심이 있다는 인상을 학생과 선생님에게 심어주었다. 강연 참석의 목적을 모두 달성했다.
* * *
강당을 떠나는 강우를 고현성이 붙잡았다.
“이야! 브라더! 너 영어 잘하더라?”
“내 영어? 잉글리시 말고 콩글리시라고 들어봤어?”
“그보다 훨씬 잘하던데? 강연 재밌었어? 하긴 잘 들었으니 질문도 했겠지.”
강우는 고현성을 힐끔 돌아보며 입가에 웃음을 띠었다. 한 번씩 태클을 거는 이 녀석이 칭찬이라니? 무슨 의도일까.
“넌 강연 다 들었어?”
“크크! 나야…… 당연히 들었지. 내 영어 실력이 보통이냐?”
괜히 목을 뻣뻣하게 세우는 고현성의 태도가 우스웠다.
“그래? 그럼 핵융합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열심히 설명했잖아? 그거 기억나?”
“으…….”
고현성이 못마땅한 눈으로 강우를 노려보다가 저쪽으로 사라졌다.
“싱거운 놈.”
걸음을 옮기는 강우의 옆으로 이번에는 조원들이 다가왔다.
“강우야, 영어 잘하더라?”
오늘 3반에서 유일하게 질문한 사람이 강우뿐이었으니 단연 강우가 화제의 중심이 됐다. 그리고 반 학생들은 오늘 강연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에 질문 수준보다 영어 실력을 평가하는 정도였다.
“근데 발음이 좀…… 하여튼 이상했어.”
윤수아가 킥킥 웃으며 엄지를 척 내밀었다.
강우는 대수롭지 않게 반문했다.
“뭐가 이상해? 그 교수는 내 발음을 듣고도 아무 불평 안 했잖아? 잘만 알아먹던데? 꼭 미국식으로 발음해야 한다는 건 강박관념이지. 말만 통하면 그만이지.”
“아닐걸? 마지막에 강연자가 우물쭈물하다가 끝내버렸잖아? 그거 분명히 네 영어 발음이 나빠서 벌어진 일이야. 미국 사람이라 콩글리시를 모를 수도?”
윤수아가 농담처럼 강연 마지막 장면을 이야기했다.
옆에서 최대우마저 윤수아를 두둔했다.
“하아, 그렇지, 그 교수가 몰라서 대답 안 해줬을 리가 없으니까.”
“으구, 그렇다고 하자.”
괜히 반박하며 말다툼하기 싫었던 강우는 인정하며 발걸음을 빨리했다.
바로 뒤에서 잡담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손차희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에게 오늘 강우는 놀라움 그 자체였다.
예상과 달리 강우의 영어 실력이 대단했다. 그의 표정과 마지막 질문을 보면 강연 내용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비록 발음이 조금 서툴렀지만, 어차피 미국인 입장에선 한국 사람들의 영어 발음은 대부분 이상하게 들리기 마련이니 크게 흠이 될 문제는 아니었다.
다른 학생과 달리 손차희는 강우가 한 질문의 내용에 주목했다.
분명히 강우의 질문은 그 교수를 당황하게 했다. 질문 수준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알 수 없었지만. 터무니없는 질문이라 당황한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미리 준비했었나?’
요셉 교수의 강연 포스터가 강당 앞에 일주일 전부터 붙어 있었으니 사전에 공부했을 수도 있다. 인터넷에 찾아보면 요셉 교수의 관심사와 강연 내용을 대략 유추할 수 있으니까. 강우가 치밀하게 계획했다면 오늘처럼 질문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저녁 자습시간에는 그런 기미가 전혀 없었는데…….’
그녀의 기억에 강우는 이 강연을 한 번도 신경 쓴 적이 없었다. 굳이 강우가 그녀를 피해 질문 연습을 할 리도 없고, 남은 시간이라 해봐야 늦은 밤 기숙사가 유일한데 그렇다면 최대우가 모를 리 없었다.
‘정말 핵융합에 관심이 있던 거야?’
유추해볼수록 애초부터 강우의 핵융합 지식이 대단했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수업 시간에 강우는 가끔 물리학의 특정 분야에서 놀라운 실력을 보였으니까 하필 이 분야도 그의 관심사였을지도 모른다.
‘하여튼 천재란 거지…….’
손차희는 강우의 뒷모습을 보면서 슬그머니 주먹을 꾹 쥐었다.
어쨌든 그녀는 천재니까, 아니 천재로 인정받고 싶으니까 이번 중간고사에서 강우를 누르겠다고 다짐했다. 전상철이나 이민찬을 이기고 전교 수석을 차지하면 강우를 당연히 이기게 된다.
금방 그녀의 표정이 찌뿌둥해졌다.
최근에 그 실력을 가늠하기 힘들어진 강우의 공부 장면이 떠올라서였다.
* * *
시험이 코앞에 다가오자 강우의 생활패턴에 변화가 일어났다.
“잠 안 오냐?”
“응? 잠? 잠이 왜?”
최대우의 공격에 강우는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상대를 쳐다봤다.
반쯤 졸린 눈으로 노트북을 들여다보던 최대우가 길게 하품했다.
지금 시간은 새벽 한 시 반. 평소라면 잠자리에 들었을 시간이다.
원칙대로라면 기숙사에서는 밤 11시에 야간 점호를 하고 밤 12시가 되면 소등한다. 밤 12시부터 아침 6시 사이에 불을 켰다가 걸리면 벌점을 받는다.
어차피 6시에 일어나 아침 점호를 하려면 일찍 자야 하기에 평소에는 12시 취침이 비교적 잘 지켜졌다. 간혹 불 끄고 게임하는 녀석들이 있긴 했지만.
문제는 시험 기간. 시험이 임박하면 학생들의 새벽 공부시간이 늘어난다.
그래서 학교 측에서는 시험 일주일 전부터 소등 시간을 새벽 1시로 늘려줬다. 그래도 지금 시간이라면 잠을 자야 정상이다. 두 사람이 이 시간에 깨어 있을 수 있는 이유는 학교 측도 학생들의 이런 생활 패턴을 잘 알기에 이 기간에는 점검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잠 오면 자.”
강우는 퉁명스럽게 이야기하고는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예전에 밤잠을 자지 않고 연구에 몰두했던 이력 때문에 강우는 다른 학생들보다 잠을 훨씬 잘 제어했다. 다른 학생보다 취침 시간을 줄이고도 낮에 훨씬 잘 버텼다.
솔직히 강우는 이렇게 늦게까지 공부할 필요가 없다. 고등학교 공부에 익숙해진 그는 이제 전 과목에서 본궤도에 오른 상태. 낮에만 집중해도 시험 준비에 지장이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옆에서 고생하는 다른 조원들을 보면 차마 그런 티를 낼 수 없는 노릇이었다. 어쩔 수 없이 강우도 그들 옆에서는 열심히 공부하는 척했다. 차도도, 신새벽에게 장담한 바도 있으니 대충 공부할 수 없는 형편이기도 했다.
최대우는 올빼미파였는지 밤에도 열심이었다. 지금도 그는 노트북으로 인강을 듣다가 하품하기를 반복했다.
“하아! 그래도 해야지. 오늘 다 못 들으면 밀려서…… 내일은 더 죽음이야.”
“그래, 좋은 생각이긴 한데…… 졸면서 하면 무슨 소용이야?”
“그렇긴 한데…….”
시무룩한 표정으로 노트북을 조작하던 최대우가 갑자기 눈을 반짝였다.
“잠이 올 때는 이 동영상을 감상해봐! 눈이 번쩍 뜨인다?”
게슴츠레한 표정으로 강우는 최대우가 내민 노트북 화면을 봤다. 화면에는 걸그룹이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수면제야?”
강우는 걸그룹이나 연예인에 거의 관심이 없었다. 전생에서는 연구하느라 정신이 팔려 티비를 볼 일이 없었고 이번 생에는 티비가 없어서 변화가 없었다.
“얘네들 몰라? 요즘 제일 핫한 아이돌인데?”
“핫이고 쿨이고 난 모른다.”
강우는 관심을 끄고 책에 신경을 집중했다.
“이거 잠 깨는 데 특효약인데…… 강우야 네 노트북에도 깔아줄게.”
물론 강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최대우는 한쪽에 놓인 강우의 노트북을 가져와서 걸그룹 동영상을 바탕화면에 옮겼다.
문득 노트북 바탕화면이 눈에 띄었다. 노트북 제조사에서 제공한 시원한 풍경화면이었다.
“음, 이런 바탕화면은 대한민국 고등학생으로서 쪽팔리는 일이지.”
최대우는 노트북 화면에 걸그룹 사진을 깔았다. 예쁘장한 여자 아이돌들이 큼지막하게 화면을 장식했다.
“이 정도는 돼야…… ‘아! 남고생 노트북이구나!’하는 표시가 나지.”
확 바뀐 강우의 노트북을 보면서 최대우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 * *
시험 기간이 되면 취침 시간이 줄어들고 야식이 유별나게 늘어나는 경향이 있었다.
당연히 기숙사 내부에서 음식물 섭취는 벌점 사항이다. 또 11시 야간 점호 이후에 돌아다녀도 벌점이다.
원칙대로라면 밤에 야식을 절대 먹을 수 없다. 그런데 학생들은 숨어서라도 야식을 즐겨 먹었다.
밤 11시 이후에 학생들은 기숙사 아래층 식당을 출입한다. 밤에 물을 먹어야 한다는 핑계로 식당 출입이 허용되기 때문이다. 물론 학생들은 밤에 물을 먹는다. 라면 건더기도 같이 먹어서 그렇지.
즉 편의점 자판기에서 컵라면을 산 후 식당에서 야식으로 컵라면을 먹는다.
학교 측에서도 이 사실을 눈치채고 있지만 룸에서 라면을 먹는 것보다 훨씬 낫기에 알고도 눈감아주는 형편이었다.
시험 기간이 되면 학생들의 행동은 조금 더 과감해졌다.
외부에서 배달음식을 시켜 먹는다. 물론 배달 라이더는 기숙사 내로 들어올 수 없다.
식당 한쪽에는 학교 외부로 작은 창문이 나 있고 이 창으로 라이더가 야식을 배달한다. 즉 배달음식을 주문한 후 이 창문 앞에서 기다리다가 음식을 건네받는다.
학교 인근 배달음식점에서는 이 방식을 알고 있기에 배달을 주문하면 알아서 창문 앞으로 가져온다.
지금은 시험 전날. 내일 중간고사를 앞두고 식당에 꽤 많은 학생이 모여서 야식을 먹고 있었다.
“으으, 12시 넘어서 먹으면 살찌는데…….”
윤수아는 울상을 지으면서도 절대 야식을 포기할 사람이 아니다.
“야밤의 치맥은 사랑이지!”
최대우가 옆에서 부추겼다. 과연 먹어도 먹어도 부족한 나이다웠다.
“치맥은 무슨! 술은 안돼!”
“말이 그렇다는 거지. 아! 맥주 그립다.”
최대우가 허공을 보며 한탄했다.
“맥주 먹어봤어?”
“아니, 맛 조금 봤는데 맛없더라.”
윤수아와 최대우가 주문한 치킨을 기다리며 창문 앞에서 대기했다.
주변에는 그들 외에도 배달 야식을 기다리는 학생들이 줄을 서 있었다. 이미 판을 깔고 열심히 먹고 있는 학생들도 많았다.
“2134?”
창문 밖에서 전화번호 뒷자리를 부르는 나지막한 소리가 들리자 윤수아는 잽싸게 손을 내밀었다.
“여기요.”
“콜라는 서비스요.”
치킨을 건네받은 윤수아의 입에 흐뭇한 미소가 걸렸다.
탁자에 치킨을 늘어놓고 네 사람이 둘러앉았다. 내일이 시험이라 정신이 없을 때지만 이처럼 야밤에 함께 먹는 치킨은 새로운 재미를 불러왔다.
“캬!”
맥주 대신 콜라를 한 모금 들이켠 최대우가 탄성을 터트렸다.
치킨을 뜯던 강우가 눈을 가늘게 떴다.
“이 자식 왜 이래?”
“시커먼 게 맥주인가 봐.”
윤수아가 낄낄대며 웃었다.
“누가 보면 완전히 주당으로 착각하겠어.”
강우가 설레설레 고개를 흔들었고 조원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의 시선이 슬그머니 옆에 앉은 손차희를 향했다.
손차희는 최근 들어 유달리 말이 없어졌다. 입학 초기에 비하면 말수가 절반 이하로 줄었다.
시험 압박 때문일까? 강우는 그녀를 관찰하면서도 정확한 원인을 알 수 없었다.
초기에 그의 공부를 자주 봐주던 그녀는 최근 들어서는 뜸해졌다. 이제는 질문도 답변도 하지 않는다. 예전에는 윤수아가 그녀에게 자주 질문했으나 그 질문이 요즘은 강우에게로 넘어왔기에 손차희는 더더욱 말수가 줄었다.
‘하긴 공부하느라 바쁘면…….’
강우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녀와 함께하는 공부는 이번 학기가 처음이기에 원래 저렇게 공부하는 학생이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