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화 중간고사 (2)
둘째 날은 물리부터 지구과학까지 모두 네 시간 동안 시험을 진행했다.
강우는 첫 시간인 물리를 비교적 손쉽게 쳤다. 수학에 비하면 과학은 문제 난이도 자체가 쉬운 편이었다. 물론 이는 그에게만 해당하는 일이었으나 강우는 거의 느끼지 못했다.
어쨌든 가볍게 물리 시험을 친 강우는 둘째 시간에 화학을 보게 됐다.
모든 조건이 항상 유리하게 돌아갈 수는 없다. 감독 선생님이 들어오는 순간 강우의 안면이 확 구겨졌다.
“젠장!”
교탁 앞에서 신새벽이 환한 웃음을 머금고 서 있었다. 하필이면 그를 주시하는, 시험과 같은 과목 선생님이다. 그것도 시험 내기까지 걸려 있고. 가슴에 천근만근 돌덩이가 내려앉은 기분이다.
“수학과 물리 시험은 잘 쳤나요?”
신새벽의 밝은 목소리와 달리 학생들은 반쯤 풀이 죽어서 합창했다.
“아니요!”
“어려웠어요?”
“예!”
학생들과 즐거운 대화를 주고받던 신새벽이 서류뭉치를 풀며 시험 주의사항을 알렸다.
“이 시험은 정식 성적에 들어가는 거니까 성심껏 치세요. 알다시피 대학 입시에 반영되거든요. 그래서 화학 시험은 비교적 쉽게 냈습니다만…….”
“에이, 거짓말! 어려울 거면서.”
학생들은 믿지 않고 얼른 문제지를 달라고 했다.
눈썹을 쓱 올린 신새벽이 두리번거리다가 마침내 강우를 찾았다.
“제대로 풀지 않고 찍고 잠을 자거나 성의 없이 답지에 그림을 그리거나…… 그러면 절대 안 됩니다. 알겠죠?”
이게 무슨 소리인지 모르는 학생들이 신새벽을 쳐다봤다.
신새벽이 마지막으로 버럭 소리쳤다.
“특히 강우!”
“푸하하!”
한바탕 웃음이 터지고 신새벽이 시험지를 배분했다.
문제지를 들고 강우는 앞뒤를 쓱 훑었다.
‘음, 별거 없네.’
딱히 어려운 문제는 보이지 않는다. 아는 문제들이 곳곳에 널려 있다. 진단 고사 때와는 확실히 다른 느낌이었다.
강우는 앞에서부터 하나씩 풀기 시작했다.
시험이 시작되고 절반가량 시간이 흘렀을 때 강우는 대부분 문제를 다 풀었다.
화학식에서 몰수를 계산하는 문제는 숫자가 지저분해서 빨리 풀기 어려웠다. 대부분 학생이 시간 부족에 시달리며 고생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하지만 강우는 달랐다.
그는 계산 속도가 빠르고 방정식 풀 듯 순서대로 계산하지 않았다. 정석으로 풀면 복잡한 연립방정식 문제가 되어 시간이 너무 걸렸다.
물론 시험에서는 정답이 항상 존재한다. 반면 실험에서는 깨끗한 정답이 도출되지 않는다. 당연히 그런 경우에는 실험식에서 답을 유추하는 다른 방법이 있다.
덕분에 강우는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계산문제를 순식간에 해결했다.
모두 풀고 나니 할 일이 없어졌다. 강우는 수학 때처럼 그 자리에 엎어져서 눈을 감았다.
강우에게서 비스듬히 뒤에 앉은 손차희는 오늘도 강우의 눈치를 봤다.
화학은 강우가 재능이 없는 과목이다. 그런데 벌써 자고 있다. 정말 다 풀고 자는 것인지 아니면 찍고 자는 것인지 구분이 어렵다.
어제 시험의 여파 때문에 손차희는 문제가 제대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차분하게 시험을 치르기는커녕 시험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마음이 동요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다 풀고 자는 강우를 보자 마음을 진정하기 어려웠다. 그렇지 않아도 복잡한 계산문제에서 더욱 계산이 느려졌다. 이러다가는 시간이 부족할 판이다.
‘아니야, 강우는 포기하고 자는 거야.’
손차희는 자신에게 유리하게 해석하며 마음을 다졌다. 그제야 겨우 마음이 진정됐다.
그녀가 열심히 문제를 풀려는 순간이었다.
인상을 확 구긴 신새벽이 강우에게 다가왔다.
예전처럼 신새벽은 강우를 깨우진 않았다. 대신에 세상에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강우를 노려보며 강우가 푼 문제지를 살폈다.
‘화학 쌤 표정을 보니 강우가 제대로 안 푼 게 확실해.’
손차희는 나름대로 해석하고 힘을 내어 다시 문제를 풀려 했다.
‘어?’
신새벽의 표정이 갑자기 변했다. 동시에 손차희의 표정도 같이 변했다.
신새벽은 입을 쩍 벌리고 문제지와 강우를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그 모습은 절대로 찍고 잠을 자는 학생을 나무라는 표정이 아니었다.
‘설마?’
손차희는 불안감이 커졌다. 제대로 풀고 시간이 남아 자는 건가? 이 어려운 문제를? 이렇게 계산량이 많은 문제를 그렇게 빨리?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강우의 답지를 살피던 신새벽의 안색이 환해지더니 급기야 고개까지 끄덕끄덕했다.
‘푼 거구나…….’
손차희는 그 표정의 의미를 알아챘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가 단단하게 쌓았던 심리적 장벽이 무너졌다.
갑자기 손이 벌벌 떨리고 머리가 텅 빈 기분이다. 문제조차 제대로 읽히지 않았다.
손차희는 연필을 들고 마음을 진정하려 애썼다.
그사이 강우를 살피던 신새벽이 다른 학생에게로 이동했다.
“하아…….”
손차희는 긴 한숨을 내뱉었다. 이래서는 시험을 제대로 칠 수 없는데. 왜 이러는지 그녀는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중학교 때는 항상 시험에 자신이 있었다. 시험시간이 기다려지기도 했고 먼저 다 풀고 다른 학생들이 푸는 모습을 반쯤 비웃으며 구경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고등학교에 들어와서 치르는 첫 시험에서 그녀는 지옥을 맛보고 있었다.
본래 실력을 전혀 발휘할 수 없었다. 분명히 예전에 풀어 본 문제와 닮았는데 어떻게 풀었는지 전혀 실마리가 잡히지 않았다.
‘내가 이렇게 공부를 못했었나?’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다른 학생들 표정이 강우를 제외하고는 별로 다르지 않았다.
그렇게 우왕좌왕하는 사이 종이 울렸다.
손차희는 시간 부족으로 제대로 풀지 못한 상태에서 답지를 제출했다.
그녀의 답지를 받은 신새벽이 안면을 확 구기자 손차희는 더욱 우울해졌다.
* * *
시험 기간의 유일한 즐거움, 야식 시간이다.
밤늦게까지 공부하다가 한데 모여 치킨을 시켜 먹는 시간은 의외로 시험 스트레스를 확 풀어줬다. 다행히 학교 측에서도 시험 기간에는 취침 규칙을 엄격하게 따지지 않았기에 적당히 눈치 보면서 즐길 수 있었다.
오늘도 자정이 지나자 강우는 최대우에게 끌려 아래층 식당으로 내려갔다.
띄엄띄엄 학생들이 탁자마다 진을 치고 있었다. 일부는 컵라면, 일부는 치킨이나 피자였다.
저쪽 구석에서 윤수아가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강우야, 강우야아!”
“차희는?”
“일찍 자겠대.”
“너무 무리했나?”
“과학까지 끝났으니 사실상 시험이 다 끝난 거나 마찬가지야. 차희는 국어나 영어를 웬만큼 하니까.”
“그래도…….”
“이 세상에서 제일 쓸데없는 걱정이 차희 걱정이야. 차희가 아무리 못 쳐봐야 나랑 같겠어?”
손차희를 칭찬하는 건지 자신을 내리까는 건지 아리송한 윤수아의 답변에 강우와 최대우는 부러움을 삼켰다.
과학고에서 가장 중요한 수학과 과학시험이 끝났으니 한시름 덜었다. 물론 강우나 최대우는 앞으로 남은 시험도 부담감이 컸다. 영어를 잘하는 손차희나 윤수아와 달리 강우와 최대우는 영어를 못했다. 국어도 마찬가지.
“강우 넌 강연회 때 보니까 영어 잘하던데?”
“그거랑 시험 영어는 다르잖아?”
특히 학교 내신 영어는 영어회화나 각종 토익, 텝스 같은 자격시험과도 달랐다. 교과서와 시험 참고 도서를 달달 외워야 했다. 중학교 시절과 비교하면 시험 범위가 엄청 넓었다.
“외고랑 시험 스타일이 비슷하다니! 이거 너무한 거 아냐?”
윤수아가 툴툴댔다.
강우는 오히려 이런 시험에 강점이 있었다. 평범한 영어 능력 측정 시험이라면 요즘 학생들을 당할 재간이 없지만, 교과서와 참고 도서를 외우는 시험은 시간만 투자하면 된다. 다행히 내일 시험에서 특별히 망하리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수아 넌 국어를 잘하니까 내일 완전 물 만났네?”
최대우가 부러운 표정을 지었고 윤수아는 가소롭다는 미소를 지었다.
“헤헤, 나보다 차희가 더 잘해. 차희는 모든 과목이 거의 완벽하니까.”
“차희가 못하는 건 뭐야?”
“적어도 너보다는 뭐든 다 잘할걸?”
질문한 최대우는 오히려 핀잔을 들었다.
그사이 치킨이 배달됐고 그들은 콜라를 곁들여 맛있게 치킨을 먹었다.
손차희가 빠진 치킨 파티는 분위기가 묘했다. 어딘지 평소와 달리 한곳이 비어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괜찮으려나?”
물론 강우는 손차희의 상태를 몰랐다. 그녀가 시험을 어떻게 쳤는지도. 시험장에서 잠시 본 손차희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지만. 시험 기간이라 긴장한 기색이 심했고 말수가 줄긴 했다.
손차희의 단짝인 윤수아가 특별히 말이 없으니 별일 아닌 게 분명했다.
머릿속에서 걱정을 날려 보내고 있자니 윤수아가 화제를 바꿨다.
“강우야, 오늘도 담임 쌤에게 톡했어?”
“아니, 시험 기간에는 빼주셨는데?”
“담임도 양심은 있네.”
“아니면 사람이 아니지. 마녀지.”
“쌤한테 일러야지!”
이어서 이번 시험이 끝나면 무엇을 할거라는 둥 흔한 이야기로 흘렀다.
누구나 그렇듯 시험 기간에는 저렇게 원하는 리스트를 쭉 늘어놓지만 정작 시험이 끝나고 나면 모두 잊어버린다. 그렇게 보면 이건 단지 시험 스트레스를 푸는 행동이다.
정작 강우는 시험 스트레스를 거의 받지 않았다.
원인은 불분명하지만 아마도 시험 부담감이 크게 없어서일 것이다. 무엇보다 시험을 잘 쳐서 대학을 가겠다는 생각은 없으니까.
다만 이 시험을 통해 강우로 빙의한 이후 자신의 천재성을 확인해 보고 싶은 욕구는 있었다.
이틀간의 시험을 통해 완벽해진 능력을 확인했다. 과거 손강우 시절과는 확실히 다르다. 예전의 손강우가 천재였다면 지금의 강우는 천재 중의 천재였다. 적어도 그 능력이 두 배는 향상된 느낌이다.
앞으로 이 능력을 어떻게 활용할지 고민해봐야 한다.
그렇기에 내일과 모레 시험도 걱정하지 않았다. 장기인 수학이나 과학이 아니어도 남들보다 잘할 자신이 있다. 손강우로 살았던 전생에서 습득한, 사물을 보고 파악하는 합리적인 사고가 지금 고스란히 천재성으로 되돌아왔으니까.
나이를 먹는다고 수학 실력이 나아지진 않지만, 문맥을 파악하는 국어나 경험이 필요한 사회 과목에는 확실한 장점이 생긴다.
그렇기에 이번 시험 결과는 분명히 놀라울 것이다.
문득 차도도와 신새벽의 당부가 생각났다.
‘게임은 끝났네.’
구체적인 약속이 무엇이었는지 이미 잊어버렸지만 어쨌든 두 사람에게 시달릴 수준을 훨씬 넘어선 결과가 보였다.
시험이 끝나고 두 선생님을 만날 생각을 하니 세상 즐거웠다.
* * *
금요일 중간고사가 끝났다.
거의 보름 동안 시험에 짓눌렸던 학생들은 오랜만에 가슴을 펴고 집을 향했다.
그동안 집에 가지 않았던 강우도 이번 주말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빈 기숙사에 혼자 있기도 쉽지 않고 그렇다고 낯선 집에 가기도 어색하지만 어쨌든 기숙사는 벗어나야 했다.
겨울옷을 집에 가져가고 여름옷을 가져오는 것은 덤이다.
짐을 싸는 그와 마찬가지로 최대우도 짐을 싸고 있었다.
“강우야, 집에 가냐?”
“가야지. 넌 울릉도?”
“후딱 다녀오려고. 이것저것 필요한 것도 있고.”
다른 학생들과 달리 집이 먼 최대우는 정말 오랜만에 기숙사를 떠난다.
비장한 기분이 든 강우도 짐을 들쳐멨다.
보금자리를 떠나기 싫어하는 새끼처럼 기숙사 앞에서 다시 뒤를 돌아보며 돌아올 때까지 무사히 기숙사가 남아 있기를 기원했다. 물론 두 사람이 자리를 비운다고 기숙사가 무너질 일은 없겠지만.
“가자!”
늠름하게 몇 걸음을 옮겼을까. 뒤에서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강우야! 강우야아!”
윤수아였다. 그리고 그 옆에는 손차희가 있었다.
둘 다 가방을 든 모습을 보니 집에 가는 것이 분명했다. 물론 주말마다 집에 가는 두 사람의 짐은 강우와 최대우처럼 많지 않았다.
오랜만에 본 손차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