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2화 한국대 탐방 (1)
강우가 완벽하게 처리했다며 자화자찬하고 있을 때였다.
- 신새벽 쌤 : 강우, 그것만은 안 되겠다. 그만두면 네 화학 성적이 또 곤두박질칠 거란 말이지. 안 돼. 다른 소원 말해.
이건 반칙인데? 하지만 지위가 깡패니 항의할 수도 없다. 강우는 다른 소원을 고심했다. 그렇다고 갑자기 소원이 떠오를 리 없었다.
“데이트나 한번 해달라고 할까?”
선생님과 제자 사이에 데이트라고 할 것까지도 없었지만, 휴일에 밥 한 끼 얻어먹으면 빈곤한 주머니 사정에 꽤 도움이 되기도 했다.
강우는 그렇게 답장을 보내려다가 바로 지웠다. 문득 차도도의 얼굴이 떠올라서였다. 과제연구 지도교사 문제로 한 번 배신했는데…… 왠지 또 배신하는 것만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더구나 그녀와는 옷과 노트북을 사느라 따로 나갔던 적도 있었고.
- 강우 : 나중에 말해도 돼요?
- 신새벽 쌤 : 그래라. 오늘은 봐줄 테니까 내일부터는 화학 공부한 거 보고해.
- 강우 : 네. 안녕히 주무세요.
톡을 끄고 강우는 빙그레 미소를 머금었다. 신새벽의 의도는 모르겠지만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그때 전화가 걸려왔다. 차도도였다.
도둑질하다가 걸린 기분으로 강우는 전화를 받았다.
“쌤?”
- 강우야! 오늘도 세미나실에서 공부하니?
“아뇨, 시험 끝나서 오늘은 안 하는데요?”
- 아! 그렇구나.
“왜요?”
- 음, 혹시 차희랑 이야기해봤어?
시험 잘 쳤다고 칭찬하는 줄 알았더니 갑자기 손차희 이야기가 나왔다. 반갑게 전화 받은 기분이 착 가라앉았다.
“아뇨.”
- 차희에게서 무슨 변화가 보이면 나에게 빨리 이야기해줘.
“네. 무슨 일 있어요?”
- 아니.
바로 전화가 끊어졌다.
생각해보니 시험 후에 차도도에게 제대로 칭찬을 듣지 못했다. 예전에 차도도 또한 신새벽과 마찬가지로 뭔가 해준다고 했던 것 같은데.
핸드폰을 침대 위에 집어 던지고 강우는 창밖을 바라봤다. 어둠이 깔린 학교가 무게감 있게 다가왔다.
차도도의 전화는 그녀가 손차희의 성적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표시였다. 하긴 그도 뜻밖이긴 했다. 손차희가 윤수아에게도 밀릴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국어나 사회과목은 손차희의 공부 스타일로 보아 편차가 적을 테니 이번 성적 하락은 수학과 과학이 원인일 가능성이 컸다.
강우는 중간고사 기간 손차희의 공부 태도를 되짚어봤다. 거의 항상 붙어 있었으니 그녀가 무엇을 주로 공부했는지 어떤 식으로 했는지 대충 알고 있었다.
“어?”
그렇다면 손차희 역시 그가 공부하는 것을 계속 보지 않았을까?
분명히 그녀에게 그의 공부법은 매우 이상하게 보였을 것이다. 기본 문제도 제대로 못 풀면서 심화 문제를 이상하게 잘 푸는. 교과서도 헤매면서 대학교재를 쓱쓱 잘 넘기는.
그의 과거 이력을 안다면 전혀 이상할 게 없지만, 그런 모습들은 그녀가 한 번도 마주한 적이 없는 방식이었을 것이다. 만일 그녀가 그를 경쟁자로 받아들였다면, 그리고 공부법을 염탐했다면 멘탈이 흔들리기 딱 좋았다.
“그랬었군.”
강우는 손차희의 성적 결과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는 그를 과도하게 의식했고 그 때문에 심리적으로 중심을 잡지 못했다. 자신의 공부법과 실력을 의심하다 보니 깊은 사고력을 요구하는 과학고 문제를 만나자 바로 자신감을 잃어버렸다.
이런 심리적 불안은 특히 수학 과목에서 더 문제가 발생하기 마련이다. 하필이면 수학이 첫 시험이었으니 그녀에게는 최악이었을 것이고.
갑자기 온몸이 싸늘하게 식는 기분이 들었다.
자신이 과학고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손차희는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런데 거꾸로 그녀에게는 자신의 존재가 독이 됐다. 만일 그와 손차희가 같은 조가 아니었더라면, 같이 모여서 공부하지 않았더라면 결과는 달랐을 것이다.
“나 때문이었나…….”
본의 아니게 한 사람을 구렁텅이로 밀어버렸다.
강우는 착잡한 심정으로 창밖의 학교에 시선을 돌렸다. 어둠에 잠긴 학교, 적막에 잠긴 학교는 그의 마음을 묵직하게 짓눌렀다.
어쨌든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타인에게 손해를 끼치는 행위를 한 셈이라 마음이 편치 않았다. 어떻게든 손차희를 원래의 궤도로 돌려놓아야 한다.
문득 기숙사로 들어오다 만난 고현성의 말이 떠올랐다.
서로 적이라고, 대학 문 크기는 정해져 있다고, 그래서 몇몇이 이를 갈고 있다고.
단순히 서로 열심히 경쟁하고 그 과실을 나누는 그런 동료가 아니란 의미였다.
그 순간 강우는 자신의 존재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을 품었다.
벌컥-
“강우야!”
방문이 열리고 최대우가 들어왔다. 편의점 다녀온다더니 벌써 먹고 온 모양이다.
“이거 먹을래?”
최대우가 그에게 바나나 하나를 건넸다.
이 녀석이 배고픈 줄 어떻게 알고. 이래저래 인정 많은 녀석이다. 강우는 바나나를 입에 물었다.
“오징어는 어떻게 했어?”
“수아에게 일단 넘겼지.”
고향에서 말린 오징어를 가져온 최대우는 윤수아에게 모두 넘겼다. 그녀가 알아서 어떻게든 구워올 것이다.
바나나를 먹으면서 강우는 고민하고 있던 문제를 꺼냈다.
“대우야, 성적 만족해?”
“하아! 난 그냥 무난하게 본 것 같아. 난 불만 없어.”
의외로 욕심이 없는 녀석이다.
강우의 눈치를 슬쩍 보던 최대우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강우 넌 많이 잘 봤잖아? 다른 애들이 난리도 아니더라.”
정작 강우는 다른 학생들의 반응에 별 관심이 없었으나 방금 하던 고민과 엉켰다. 아마 이민찬이나 손차희가 1등이었다면 학생들은 쉽게 받아들였겠지.
그런데 정작 생각지도 않았던 강우가 모두의 앞에 서버렸다. 학생들은 억울하다는, 또는 뭔가를 빼앗겼다는 기분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대우야, 넌 대학 문 크기가 정해져 있다거나 친구들이 동료가 아닌 적이라고 생각해본 적 있어?”
“하아, 난 그렇게 생각한 적 없지만 사실 어려운 문제야. 현실에서는 인원이 정해져 있으니까. 우리 학교만 봐도 최상위권 대학에 진학하는 학생이 대략 절반이잖아? 그 절반에 낄 수 있느냐는 매우 중요하지. 거기에서 한 자리가 비면 내가 들어갈 수도 있으니까. 물론 근시안적인 시각이긴 하지만.”
최대우가 우물쭈물 대답했다. 조금 불편한 주제였던 듯하다. 어쩌면 줄 세우기 교육을 받은 대한민국 학생 상당수가 같은 생각일지도 모른다. 설명이 부족했던 듯 추가로 덧붙였다.
“하지만 이 학교는 작을지 몰라도 이 나라는 엄청 크잖아? 그 대학에 입학하는 전체 학생을 따지면 말이 안 돼. 적어도 이 학교 학생끼리 서로 도와야 정상이니까. 하지만 때로는 경쟁도 바람직한 측면이 있지. 그건 왜?”
“나에게 이를 가는 학생이 있다더라고.”
최대우가 별일 아니란 듯 피식 웃었다.
“하아, 최상위권 학생들 사이에서 그런 말이 나돌긴 하더라. 단순한 경쟁심 아닐까?”
“그렇겠지.”
강우는 웃음을 지으며 대화를 멈추고 침대에 누웠다.
서론은 이 나라 학생이라면 누구나 고민하는 문제였지만 본론은 완전히 다르다.
그는 어쩌면 이 세상에 존재하지 말아야 할 인간일지도 모른다. 이미 손강우의 경험과 지식을 가진 그라는 존재는 다른 사람과는 출발선 자체가 다르다.
경쟁에서 패하면 도태되는 이 세상 시스템에서 그 때문에 다른 한 사람이 손해 보지 않았을까. 그가 없었다면 그 자리에 다른 사람이 서 있을 테니까.
중간고사에서 그가 없었다면 이민찬이나 손차희가 1등을 했을지 모른다. 가장 가까운 사이였던 손차희는 그 때문에 피해를 봤다.
그녀가 열심히 하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미안한 마음이 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보기에 그녀는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 했다. 그렇기에 더욱 생각이 많아졌다.
지금까지 그는 손강우의 원한을 갚으려고, 새로운 인생의 목표를 달성하려고 다시 주어진 삶을 열심히 살겠다는 생각만 했다.
그런데 결과를 따지고 보니 손강우의 삶을 빼앗은 마도환이나 손차희의 삶을 바꿀지도 모르는 그나 무슨 차이가 있는가.
솔직히 공평한 경쟁도 아니었다. 손차희가 아무리 발버둥 치더라도 절대 이길 수 없는 승부 아니었나? 손차희만 그럴까? 다른 학생도 마찬가지다.
그가 없었다면 1등을 했을 이민찬이 2등으로 만족할까?
순수한 실력을 겨루는 공평한 경쟁이 아니었기에 강우는 모두에게 미안함을 느꼈다.
‘이건 아니지…….’
중간고사는 한순간의 점수로 끝나지 않는다. 대학 입시 때까지 따라다니는 중요한 지표다.
이런 식으로 3년을 보낸다면 그는 만족할지 모르지만 다른 학생들은 그 때문에 피해를 본다.
강우는 그 점이 견딜 수 없었다. 그도 같은 출발점이었다면 전혀 거리낌이 없었겠지만 지금 상황은 게임에서 그만 좋은 아이템을 독차지한 상황과 같았다.
강우는 이번 중간고사에서 전 과목을 열심히, 엄밀하게는 시험을 잘 친 이유를 다시 생각했다. 차도도나 신새벽과의 내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그렇게 잘 나온 성적으로 대학 진학을 노렸기 때문이다.
복수에 성공하려면 한국대든 어디든 좋은 대학을 가야 한다고……. 학생부 성적을 이용해서 입학해야 한다고.
과연 그런가?
솔직히 그에게 좋은 대학은 큰 의미가 없다. 다시 한국대에 들어간다고 해서 마도환에게 우위를 점하기 어렵다. 그런데도 그가 성적에 집중하면 다른 학생들은 3년간 피해를 보게 된다.
엄밀히 따지면 그는 성적이 불필요하다. 한국대가 아니라 외국으로 유학 가면 되니까. 그것도 내신 성적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손차희의 권유로 올림피아드에 신청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성적을 포기하자.’
자신 때문에 남을 괴롭힐 수는 없다. 달리 어쩔 수 없더라도 적어도 대입 내신에서만은 피해를 주지 않겠다는 결심이 섰다.
“딱 중간만 하는 거야.”
“응?”
열심히 걸그룹 동영상을 시청하던 최대우가 무슨 말이냐는 듯 쳐다봤다.
강우는 재빨리 손을 저었다.
가슴이 후련해졌다. 최근에 돌덩이처럼 내려앉았던 짐을 덜어낸 기분이다.
그 때문에 망가질 위기에 처한 손차희도 제 궤도에 데려놓아야겠지. 강우는 눈을 감고 이불을 뒤집어썼다.
* * *
시험이 끝난 다음 주에 1학년들은 체험학습을 나간다.
이번 체험학습 주제는 대학교 탐방. 목표한 대학을 미리 둘러보고 더 정진하자는 목적이다.
학생들은 조별로 움직였다. 마침 부모가 해당 학교 또는 학과에 연고가 있는 사람이 몇 명 있었기에 적절하게 나누어 탐방이 이루어졌다.
이도 저도 아닌 조는 담임과 함께 움직였다.
강우네 조는 차도도와 함께 움직이게 됐다. 덕분에 아침 일찍 학교 교문 앞에 모여 차도도가 오기를 기다렸다.
윤수아와 최대우는 아침부터 뭔가를 질겅질겅 씹고 있었다. 최대우가 가져온 오징어를 구운 것이다. 윤수아가 식당 아주머니께 부탁해서 몇 마리 구웠다나.
“오징어 다리 하나 줘?”
“됐어.”
강우는 이빨이 시원찮다는 핑계로 오징어를 피했고 손차희는 오늘도 조용했다.
주변에는 그들처럼 선생님을 기다리는 조가 이리저리 진을 쳤다.
“어? 신새벽 선생님이다!”
담임이 오기만을 학수고대하던 최대우가 한쪽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평소와 달리 멋을 잔뜩 낸 신새벽이 이쪽을 향해 오고 있었다. 신새벽도 그녀의 반 학생을 데리고 체험학습을 간다. 그녀도 한국대 출신이랬으니 모교 탐방을 빠질 리 없다.
“완전 연예인이네, 연예인.”
최대우가 헤벌쭉 입을 벌리며 눈을 떼지 못했다.
“연예인은 무슨.”
콧방귀를 뀌며 무시하던 강우는 곧바로 눈을 부라리는 신새벽과 눈을 마주쳤다.
“강우! 뭐라고 했어?”